마산부 관련 문서철에는 18개의 문건이 편철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형식은 앞서 소개한 문서철과 동일하다.
마산부 관계서류
1929년 1월 30일 내무국장이 동경에 주재하고 있던 정무총감에게 올린 보고인데, 이 문건에는 ① 이 건에 대한 내무국의 의견 ② 그리고 ‘마산 부유지(府有地)에 관한 경위 ’③ 조선인 주민들의 ‘진정서’④ 경남도지사가 내무국장...
1929년 1월 30일 내무국장이 동경에 주재하고 있던 정무총감에게 올린 보고인데, 이 문건에는 ① 이 건에 대한 내무국의 의견 ② 그리고 ‘마산 부유지(府有地)에 관한 경위 ’③ 조선인 주민들의 ‘진정서’④ 경남도지사가 내무국장 앞으로 올린 ‘마산부유지 불하 문제’(1월 21일) ⑤ 경남도지사가 내무국장 앞으로 올린 전보(1월 16일) ⑥‘마산부유지 처분안의 경과 개황(부협의회 상황)’ 등이 첨부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 일찍이 마산부는 부가 매수한 철도용지 1만 7천여 평(농경지)을 마산학교조합에 평당 1전 5리에 빌려준 뒤 일반 소작인에게 이를 전대(轉貸, 평당 평균 10전 5리)하게 하여 중간 이익을 학교조합 유지비로 활용하게...
내용을 보면 △ 일찍이 마산부는 부가 매수한 철도용지 1만 7천여 평(농경지)을 마산학교조합에 평당 1전 5리에 빌려준 뒤 일반 소작인에게 이를 전대(轉貸, 평당 평균 10전 5리)하게 하여 중간 이익을 학교조합 유지비로 활용하게 해 왔다는 것 △ 이에 대해 1928년 4월 9일에 열린 부협의회에서 조선인 의원들은, 부자산의 전대 이익금을 일본인 교육에만 쓰이는 학교조합비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이를 부예산으로 편성하여 그 이익을 부민 전체가 누리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조선과 일본인 의원들 사이에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 △ 그 과정에서 황용주(黃用周) 외 3인의 조선인 의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나간 뒤 사표를 제출하였다는 것 △ 이후 마산내의 조선인 유력자 모임인 마산동인회(馬山同人會)는 일본인 부협의원들에 대항하기 위해 위원회를 개최한 뒤 부윤을 방문하여 항의하고, 총독부에 진정서를 내기로 결정하였다는것 △ 교섭이 여의치 않자 동인회는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시내 곳곳에 대자보를 붙이는 등의 적극투쟁을 결의하였다는 것 △ 당시 경찰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민대회 중지를 요구했다는 것 △ 그러자 동인회측은 대회중지를 위원회에서 결의하고 부윤과 재교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