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물철은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 경무과(警務課)에서 1938년도 국경지방의 경비에 관련된 문건들을 엮은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문서 앞부분에 40여 종에 달하는 각 문건의 목차와 면수가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기록물들은 주로 1938년 1월부터 12월까지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함경북도 등 국경지역 3개도의 경비와 관련된 것으로서 주로 도(道)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보낸 것들이 많다. 간혹 경무국장과 조선군 참모장에게 동시에 보낸 것, 혹은 도쿄의 이토오(伊藤) 경무과장에게 보낸 것, 경무국장과 조선군 참모장 사이에 오고 간 것, 조선군 참모장 구노(久納誠一)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大野綠一郞)에게 보낸 것 등이 있다. 또한 여러 전보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대부분 각 도경찰부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것이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개시한 이래 8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중·일 양군(兩軍)의 전투가 개시되고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여 대학살을 저질렀지만 1938년에 들어와 전황은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 일제는 일본 국내와 식민지 조선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등을 통해 점차 전시 파시즘을 정비해 갔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대(對)중국 원조를 강화해 오던 소련측에서도 국내외 여러 요인으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 결과 1938년 7월 11일 소·만(蘇·滿) 국경지역의 장고봉(張鼓峯)에서 소·일간의 국경분쟁인 ‘장고봉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측을 더욱 긴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일제측은 ‘사건’이 민심(民心)에 끼칠 영향이나 조선인의 동향 파악에 더욱 신경을 썼으며,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교전(交戰) 직후 실제로 공습을 우려한 조선인들이 금융기관의 예금을 인출하는가 하면 상인들은 대량 거래를 보류하는 등 경제계의 전반적인 침체를 가져왔으며, 국경지방의 부민(府民)들 중에는 공습을 예측하여 재빨리 가족을 고향이나 남쪽지방으로 피신시키려는 경향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1938년 당시 일제 경찰측에서는 이러한 변화 등으로 인해 국경지방 경비대책을 강화해야만 했다.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등 만주 항일무장투쟁세력과의 교전도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황(戰況)의 여파마저 미치게 되어 일제측으로서는 자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찰당국에서는 함북지역을 중심으로 경찰관 증원, 군사 원조, 민심의 지도, 안정과 유언비어(流言蜚語) 단속, 외첩(外諜)의 방지, 피난민 구호 지도, 방공(防空) 실시 등의 대책을 마련했으며, 또한 조선 내에서 이른바 ‘비적(匪賊)’이나 외국의 첩보·모략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방첩(防諜)대책도 더욱 강화하였다. 1938년 10월 이후 각 지역에 방공단(防空團)을 결성하여 방첩활동을 병행시켰으며, 이 밖에 방첩상 중요한 지역과 공장 등에는 별도로 방첩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기록물철에는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1938년 당시 일제경찰이 국경지역의 경비를 강화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물에는 이른바 ‘대안비적(對岸匪賊)’에 대한 경비·경계를 다룬 문건이 많으며, 특히 그 관할에 혜산경찰서를 두고 있는 함경남도 경찰부의 보고문건이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다. 즉 여기에 수록된 문건들은 당시 일제경찰의 ‘비적’에 대한 대책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평안북도의 경비에 관한 기록
함경남도의 경비에 관한 기록
함경북도의 경비에 관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