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물철은 1920년 10월 현재 조선 내 외국인의 토지 소유 및 임차 현황을 집계한 서류철이다. 이 집계는 일본정부 척식국의 요청에 의거하여 이뤄졌다. 1920년 10월6일 척식국 장관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앞으로 보낸 <재조선외국인의 소유지 및 차지(借地) 취조의 건>을 보면, 이 조사 작업의 근거에 대해서 “외무성에서 캘리포니아 배일(排日) 문제에 관련하여 다음 사항을 급히 알려 달라고 요청해 왔으므로, 조사한 뒤 바로 회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배일 문제’ 란 그해 하반기에 최고조를 보인 미국 서부 연안 지대의 반일 캠페인을 가리킨다. 그해 11월 2일 대통령 선거전에서 승리한 미국 신임 대통령 하딩은 대일 강경 정책을 천명했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태평양 일대를 둘러싼 미국·일본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었다. 캘리포니아주는 관내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임차를 금지하는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며, 이 움직임은 서부 여러 주로 확산되고 있었다. 미국·일본 관계의 악화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이후 전후 처리문제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일대의 이권을 둘러싼 양국의 각축은 캘리포니아 배일 문제를 둘러싸고 최고조에 달했다. 조선 독립운동자들은 양국의 모순 격화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미일 관계의 악화가 조선 독립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고 기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신 대통령 하딩씨 취임후 미·일 관계가 점점 험악하게 되어, 그 추세가 결국 전쟁에 이르려는” 형세에 놓여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대한민국대사관공보』제2호, 1921. 5. 12) 일본 정부는 미국 내 반일 운동의 고조에 대항하는 여러 조치에 착수했다. 자국 내 미국인 토지소유 현황 파악도 그 일환이었다. 따라서 이 집계는 식민지 조선에서만 이뤄진게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만 등의 여타 식민지와 일본 본국에서도 동일한 조사가 이뤄졌을 것이다. 이 기록물철은 다음 두가지 문제를 연구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20세기 세계체제와 국제관계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에 유용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가 변동될 가능성이 높았던 그 당시에,조선 문제는 점증하는 일본·미국의 모순 속에서 결코 국외자일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가 대미 관계 악화를 대비하여 어떠한 대응책을 준비했는지를 엿볼수 있게 한다. 미국·일본의 대립은 결국 1921년 말 워싱턴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타결되었지만, 그 이전 유동적인 정세 속에서 일본 당국은 자국 내 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시키는 보복 수단마저 고려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이 기록물철의 사료적 가치는 일제하 조선내 외국계 기독교 단체의 재산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데에 있다. 외국계 기독교 단체는 일제하에서 조선의 상공업자,신지식층 등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이 사회 집단이 민족주의 세력의 기반이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료는 일제하 조선 민족주의 세력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던 외국계 기독교 각 단체의 토지소유 현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조선 내 외국인 토지 소유 및 임차현황 집계에 관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