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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말기는 내선일체화, 일본식 성명 강요, 한민족의 황국신민화라는 명분 아래 한민족의 전통, 풍습, 언어 등을 말살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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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21년도 물동계획수요조서(화약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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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경금속
생산년도
: 소화16년 ~ 소화17년(1941년 ~ 1942년)
생산부서
: 불명
관리번호
: CJA0012856
문서번호
: 88-4
M/F번호
: 88-1187
총쪽수
: 181면
배경지식
: 조선질소화약주식회사(朝鮮窒素火藥株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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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물철은 조선질소화약주식회사(朝鮮窒素火藥株式會社, 이하 조선질소로 약칭)에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기획부(企劃部)에 제출한 1942년도 물동계획수요조서로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다. 이 기록물철은 희초산(稀硝酸), 농초산(濃硝酸), 초산암모니아, 초안폭약, 뇌관, 다이너마이트, 과염소산안문(過素酸安門), 카리트, 흑색화약, 면화약, 도화선 등의 1941년도 이전생산실적조서, 1942년 이후 생산계획조서, 1941년 및 1942년도 제품소화계획조서, 기존설비상황, 확충계획의 개요, 확충이 필요한 이유, 확충계획설비개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조선질소는 총독부로부터 생산품의 증산허가를 받아서 생산설비의 확충공사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되는 1942년 말 즈음에는 조업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이 회사의 증산계획에 대하여 생산품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초산은 국내에서 매우 부족한 형편으로 증산이 시급히 요청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조선질소에서는 1940년부터 희초산 25톤, 농초산 14톤의 증산공사에 착수하여 희초산공장은 대략 완성되었고 농초산공장은 당시 공사가 계속 중으로 1942년 10월에는 두 공장 모두 조업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1942년도에는 다시 희초산 12.5톤의 증산을 계획하고 있었다. 초안폭약은 당시 조선내에 조선질소 외에는 제조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질소에서 원료부터 제품까지 일관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탄갱재해 방지를 위해 초안폭약의 사용이 현저하게 증가하는 경향에 있었다. 조선질소의 생산능력은 일일 생산 2톤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일 생산 2.5톤, 4월 이후는 다시 일일 생산 3톤(1941년 11월 18일경(警) 제128호 허가)으로 제조량을 늘려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능력 이상의 생산을 지속하는 것은 심한 위험과 곤란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1942년도에는 초산암모니아, 초안폭약 모두 당시의 능력과 동액의 생산설비증설계획을 계획하고 있었다. 뇌관은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파약에 파괴적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서 도화선과 함께 폭약사용에는 꼭 필요하다. 조선질소는 폭약의 일일 생산 34톤에 대해서 뇌관의 일일 생산 20만발의 제조능력이 있는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공장은 1940년부터 일일 생산능력을 10톤 증설 중이었고 1942년 9월말에는 완성될 예정이었는데 완성 뒤에는 뇌관의 생산량과 평형을 잃게 되기 때문에 뇌관의 증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조선질소의 뇌관은 질화연의 뇌관으로 당시 시국에 있어서 가장 부족한 동(銅) 및 수은을 원료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질소에서 뇌관의 증산을 도모하는 것은 국책적 견지에서도 이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면화약은 다이나마이트의 원료로서 1940년 4월 19일 경(警) 제452호로 일일 생산 10톤 제조의 허가를 받아서 1940년부터 일일 생산 1톤의 공장 건설에 착수했는데 자재의 입수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공사의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1942년 다시 계획을 추진하여 1942년 8월말까지 공사를 완성시킬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자가용 면화약의 자급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일찍이 면화약은 연강시 소재 일본질소화약주식회사로부터 공급을 받아왔는데 그 회사도 당시 설비로는 다른 곳에 공급할 여력이 거의 없게 되었다. 또 전시(戰時)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수송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선박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입수하기는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면화약을 자급(自給)하는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고 증산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선질소는 1939년 2월 4일 경(警) 제1496호로서 다이나마이트 일일 생산 28톤에서 58톤(30톤 증산)의 허가를 받아 우선 그 중 10톤에 대해서 194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42년 9월말 공사가 완성될 예정이었다. 또 1942년에 10톤 증산 공사의 계획을 세워서 착수하였다. 당시 조선내의 다이너마이트 수요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남방(南方)에서도 더욱 다이너마이트의 소비가 증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급에 부족을 가져오면 국책상 어려움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에 1943년에 다시 10톤 증산을 할 수 있는 공장을 증설하여 일일 생산 58톤에 이르게 할 계획이었다. 화약류 중 가장 오래 전에 발명되어 19세기 말경까지는 유일한 화약이었던 흑색화약은 도화선의 심약(心藥)과 광산채석용 폭파약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질소의 흑색화약 제조능력은 도화선용 가루화약 1.5톤, 흑색광산화약 0.5톤, 합계 2톤이었다. 그리고 도화선의 하루생산 설비는 조선질소 22만m, 일본질소화약 오쿠라(小倉)공장 17만m, 합계 39만m으로 여기에 소요되는 흑색화약이 2톤이었기 때문에 흑색광산화약의 제조를 중지하고 모든 능력을 도화선용 흑색분화약(黑色粉火藥) 쪽으로 돌려야 했다. 또 조선질소의 도화선은 폭약제조량이 증가됨에 따라 순차적으로 증산을 해야 했다. 1942년에 있어서는 도화선을 4만m 증산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오구라공장분과 아울러 43만m에 이르고 여기에 소요될 흑색화약은 일일 생산 2.2톤으로 증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도화선은 지름 1.5mm 정도의 분말 흑색화약인 심약을 실이나 종이로 피복하여 끈처럼 만든 것으로 한쪽 끝에 점화하면 심약의 연소가 진행되어 다른 끝에서 발한 불꽃이 접속한 뇌관이나 화약·폭약을 점화·점폭(點爆)한다. 조선질소의 도화선 제조능력은 하루 생산 22만m로 폭약 증산에 따라 점차 부족하게 되었고 따라서 현재 도화선공장의 공질(空窒)을 이용하여 여기에 피복기(被覆機) 설비를 두어 하루 생산 4만m를 증산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조선질소는 생산품을 증산하기 위해서 각각의 생산 라인을 확충해야 하였고 이러한 확충 공사내용 및 필요한 자재 등에 대해서 확충계획설비개요 집계표·명세표에 자세히 밝혀두었다. 또 생산설비의 보수에 필요한 물품에 대해서도 집계표와 명세표를 별도로 작성하였다. 이 기록물철은 조선질소의 1942년 한해 동안의 생산계획, 운영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1942년은 전해에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긴박해진 전시상황이었고 그러한 전시 통제경제하에서 국책상 주요 물품의 하나인 화약을 생산·판매하는 조선에서의 대표 기업인 조선질소의 이 자료는 조선내 화약류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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