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물철은 1940년부터 1942년 말 현재까지 동원된 조선인 노동력의 취업 상황을 담은 것으로, 일제 말기에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력의 사용 현황에 관한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의 제정 공포(한반도 시행 4월 5일)를 통해 전쟁 수행을 위한 전면적인 국가통제와 동원체제가 수립된 이후 조선인 노동력의 동원은 1939년부터 시작된다. 1939년 7월 28일, 내무성과 후생성은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을 발표함으로써 집단적 전시 노동력 동원체제의 서막을 선언했다. 이 통첩은 조선총독부가 9월 1일에 각 도지사 앞으로 ‘조선인노동자 모집 및 도항취체요강(要綱)’을 통보함으로써 9월부터 발효하였다. 그 결과 조선인은 이전시기의 도일정책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실시된 ‘노무동원계획’에 의해 집단적으로 도일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시기의 노동력 동원의 형식을 단계별로 모집(1939년 9월 ~ 1942년 1월), 관알선(1942년 2월 ~ 1944년 8월), 강제징용(1944년 9월 ~ 1945년 8월) 등으로 나누어 실시하였으나 내용 면에서 볼 때 세 단계 모두가 강제력을 발동하여 연행하고 노동력을 수탈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모집방식은 1939년 7월 28일 내무성·후생성 양 차관의 통첩에 의해 그해 9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관계법령은 <조선인노무자 이주에 관한 건>, <조선인 노무자 모집요강>, <조선인 노무자 이주에 관한 사무취급수속>, <조선직업소개령> 등이다. 1939년 9월 1일에 발효한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취체요강’에 따르면, 조선인이 모집 할당을 받은 석탄, 광산, 토건 등 시국관계 사업주는 먼저 일본에서 고용허가를 받은 다음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총독부가 지정하는 지역에서 사업주의 책임 아래 노동자를 모집하고 신체검사와 신원조사, 명부 작성 등을 행한다. 또한 모집된 노무자는 고용주나 책임 있는 대리자의 인솔 아래 집단적으로 도일하여 취로하게 된다. ‘모집’이라는 방식을 내세운 동원 형태는 1942년 2월 13일 관알선이 결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각의결정). 일본당국은 조선인 노동력의 동원의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관알선’이라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사업주로 부터 알선신청서를 받아 각 도에 통보하면, 각 도는 부읍면에 할당하여 노무자를 마련하는 방식인 관알선은 「조선인 노무자활용에 관한 방책」, 「조선인 내지 이주 알선 요강」등에 근거를 두고 시행되었다.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은 바로 1940년부터 1942년 말 현재까지 동원된 조선인 노동력의 취업 상황을 담은 자료로서 자료 생산기간은 1943년 1~3월이다. 여기에 포함된 기록물들은 제5일본해군연료창을 비롯한 조선 내 각 노동현장에서 조선총독부 사정국장에 보낸 조사통계이다. 이들 노동현장은 삼릉(三菱)광업·중천(中川)광업·일본화학공업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공장이나 무기를 만드는 조병창 등인데, 이들 기업이 조선에서 가동 중인 공장에서 취로하는 조선인에 대한 통계자료이다. 사정국이 1942년 11월말 경에 이들 노동현장에 보낸 공문에 따라 이듬해 1월부터 3월 사이에 조사보고서를 제 출한 것이다. 제출처는 제출 당시에 조사보고서와 함께 공문서를 생산하였으나, 공문서의 내용은 “*월*일자 문서에 의거하여 **년도 대내지구인취업자의 취업상황조사를 보고한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조사보고내용에 대한 배경적 이해를 돕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제출처는 토건현장을 제외한 모든 광업·운수·방적·목재·제조업 사업장이다. 여기에는 조선총독부 부서 및 소속사업장과 기업이 모두 해당된다. 1939년부터 ‘모집’단계에 들어선 조선인노동력동원정책에 대해 1942년말에 일제히 취업상황을 조사한 것은 다음 단계인 ‘관알선’ 시행을 앞두고 노동력의동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1942년 12월 말에 작성한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조>에 의하면, 1940년도의 취업조선인은 4,418명(신청수 32,382명, 충족수 7,131명)이고, 1941년도에는 6,627명(신청수 31,045명, 충족수 8,749명)이다. 배당한 인원 가운데 2,643명과 2,096명이 각각 퇴직을 한 것이다. 이는 노동현장에서 요구하는 노동력에 비해 공급량이 부족했음과 아울러 높은 퇴직율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모집’단계의 이러한 인력공급난은 일본당국이 강제연행정책을 수정하여 ‘관알선’으로 이행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동원대상자들은 신규중학교졸업자와 국민학교 수료자, 기타 등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세 종류의 노동자를 비슷한 수치로 신청하였으나 실제 노동력으로 동원된 대상자들은 기타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즉 1940년에는 7,131명 가운데 중학교 졸업자는 1,906명이고, 국민학교 수료자는 1,971명이다. 이에 비해 기타는 3,244명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1941년에는 기타의 수치가 3,587명으로 조금 낮아지기는 하였으나 중학교 졸업자 2,756명과 국민학교 수료자 2,496명에 비해서는 여전히 다수를 차지한다. 노동현장에서 학력별로 노동자를 요구한 것은 단순 노동력 외에 기능공 및 기능공보조원에 대한 수요가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조선 내에서 일본인 기능공의 확보가 쉽지 않았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에 의하면, 노동력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1940년과 1941년에 보고를 올린 노동현장에 취업중인 조선인은 4,418명과 6,627명이다. 같은 시기에 일본 지역에는 8만명(1940년)과 12만명(1941년)의 조선인 노동력이 각각 동원되었다. 이러한 점은 토목공사 현장을 제외한 군수 관련 현장에 동원된 노동력만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에 대상이 된 조선인은 ‘모집’에 응한 조선인이다. 이들은 명목상으로 모집에 응하였으므로 자발적인 노동력 확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점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즉 이들 기업은 좋은 조건을 내걸고 노동자를 모집한 후 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1940년에 일본제철주식회사의 모집에 응했던 경험자의 경험담에 의하면, 당시 일본제철주식회사는 신문지상에 노동자모집광고를 냈었는데, 모집에 응한 조선인들은 서류심사와 엄격한 신체검사를 거쳐 선발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모집에 응한 이유는 좋은 조건 때문이었다. ‘야학에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2년간 근무하면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집에 응한 노동자들은 임금도 받지 못하고 하층노동력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계약서에 따르면, 자유로운 입장에 놓인 노동자였으나 실제 생활은 그렇지 못하여 근무가 끝난 후에도 노동자숙소에서 감금상태로 지냈다.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본제철주식회사의 경우를 유추해 보면, 삼릉(三菱)이나 중천(中川) 등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에 기업명이 명기된 다른 노동현장도 이와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대내지구인취직자취업상황≫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 내 군수공장과 군수 관련 공장에서 필요로 했던 노동력의 수와 실제 공급내용 및 변화 추이를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각 기업별·지역별로 통계표를 만든다면, 기업별·지역별 조선인 노동력의 변화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조사자료에 내재된 노동력 동원 및 변화상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는 활용가치가 많지 않다. 즉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노동력에 대한 보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망자에 대한 원인이나 퇴직자 상황 및 퇴직사유 등도 명기되어 있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각 기업이 조선 내에서 담당했던 역할 및 조선 소재 공장의 운영규모, 총동원체제 아래에서 노동력 동원이 갖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와 실제로 노동현장에서 일을 했던 경험자의 구술자료 등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