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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말기는 내선일체화, 일본식 성명 강요, 한민족의 황국신민화라는 명분 아래 한민족의 전통, 풍습, 언어 등을 말살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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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향교 및 객사에 관한 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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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 개요 보기

분류
: 사회교육 > 종교 관계 > 유교일반 관계
생산년도
: 명치 44년 ~ 명치 44년(1911년 ~ 1911년)
생산부서
: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관리번호
: CJA0004740
문서번호
: 88-10
M/F번호
: 88-924
총쪽수
: 1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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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물철은 1909∼11년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 객사(客舍)에 관련된 문서들을 편철한 것이다. 이 기록물철은 성균관 학칙·성균관 예산·성균관 활동 등 성균관에 관련된 문서, 향교 직원(直員)·향교재산 등 향교에 관련된 문서, 객사(客舍)의 사용·불하·소실 등 객사에 관련된 문서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록물철은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기 직전 성균관 및 향교의 실태 및 이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정리 방침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 성균관에 대한 관리가 장예원(掌禮院)에서 학무국으로 이전되고 각종 비품비, 인건비 등 성균관에서 사용하는 예산이 제대로 편성, 지급되지 않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성균관의 지위를 격하시켜 유림의 구심점을 제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군(府郡)의 통폐합에 따라 각 부군(府郡) 소재 향교를 통폐합하여 향교를 지방제도의 일부로 귀속시키고 향교의 향사(享祀)를 양력으로 시행하도록 하는 등 향교재산의 지방관청 귀속 이후 향교에 대한 정리와 개편을 시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기록물철은 성균관 및 향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정리 방침이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반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유림의 구심체로 만들기 위하여 여러 차례 청원을 올렸으며, 지방에서도 향교의 향사(享祀)를 양력으로 시행하도록 한 것에 대하여 전례에 따라 음력으로 시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유림의 반대에 대하여 총독부에서는 유림의 요청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이들을 회유하고 있다.

주요기록물

목록

번호 기록물건명 생산년도 생산부서 쪽수 공개구분 원문보기
36 수학여행 귀관보고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1 공개가능 원문보기
35 석전제 집행보고의 건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1 공개가능 원문보기
34 성균관 제기비품 등 파손수선의 건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2 공개가능 원문보기
33 향교직원 선임원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3 공개가능 원문보기
32 지방 문묘석전제 설행의 상황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26 공개가능 원문보기
31 교관영건도면 및 직원피천자 이력 진달의 건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8 공개가능 원문보기
30 성균관에 관한 청원반려의 건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2 공개가능 원문보기
29 표지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1 공개가능 원문보기
28 색인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5 공개가능 원문보기
27 성균관생도 피복불급여의 건 공공누리마크 1유형타입 1911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2 공개가능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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