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물철은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 경무과(警務課)에서 1940년, 1941년 당시조선 전역의 경비관계 서류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문건들은 주로 1940년 1월부터 1941년 8월경까지 전국 각도의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밖에도 경무국장이 각도의 도지사나 경찰부장에게 보낸 것, 조선 총독이 일본 육군 대신(大臣)에게 보낸 것,또 경성 재근(在勤) 해군 무관(武官)이 관계 각 부(部)에 보낸 것, 경무국장이 조선군 참모장에게 보낸 것, 조선군 참모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것, 진해요항부(鎭海要港部) 참모장이 조선총독부 식산국장이나 일본 농림성(農林省) 수산국장(水産局長)에게 보낸 것, 경무국 경제경찰과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것, 방호과장(防護課長)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것 등도 포함되어 있다. 수록 문건들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1940년부터 1941년의 시기는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들어가고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으로써 이후 일제가 태평양전쟁이라는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시점이다. 따라서 여기에 수록된문건들은 중일전쟁 후반기이자 태평양전쟁의 전야(前夜)에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대한정책을 어떻게 취했는가의 한 단면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일제는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 의 건설을 부르짖으면서 ‘남방(南方)’ 진출 계획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유럽에서의 전쟁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면서 이전까지의 영·미종속의 일본에서 탈피하여 아시아에서 일본을 맹주(盟主)로 한 ‘신질서’의 구상을 본격화하려 했다.물론 이것은 현실에서 전쟁의 확대로 나타났다. 1940년 7월 일본 고노에(近衛)정부는 ‘기본국책요강’ 을 통해 ‘대동아신질서’ 의 건설을 주창하면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동남아시아의 거점을 확보하였으며, 9월 23일 ‘원장(援張, 영·미의 중국 장개석에 대한 지원을 말함)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북베트남 진주를 강화하고 9월 27일에는 일·독·이(日·獨·伊) 삼국동맹(三國同盟)을 체결하였다. 이는 전쟁의 전면적인 확대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1941년까지만 해도 일본 고노에(近衛)정부 외교의 기본방침은 소·일(蘇·日)중립조약을 체결하고 미국 등과의 교섭을 계속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영국·네델란드 등은 일본자산의 동결과 석유수출 금지 등을 통해 삼국동맹에 대항하였다. 결국 일본정부는 결전(決戰)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1941년 10월 ‘강경파’ 를 중심으로 도우죠내각(東條內閣)을 구성하여 ‘자존자위(自存自衛)’, '동아(東亞)의 영원한 평화 확립’ 등을 내세우면서 전면 개전(開戰)으로 돌입하였다. 한편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獨蘇戰爭)이 발발한 후 미·영·소(美·英·蘇)는 7월말에 제휴하여 8월 대서양헌장을 발표하면서 반파시즘연합을 본격화했다. 여기에 수록된 기록물들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당시 국경지역 뿐만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경비 상황을 보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1940~1941년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개시하는 전(前) 단계로서 그 준비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식민은 조선 내의 체제 ‘정비’ 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일제의 ‘정비’ 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경찰당국의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선 내의 치안을 확보하고 경계 경비를 강화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일제 경찰이 전국 각지에서 추진한 경비 강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육군의 관병식(觀兵式), 항공훈련이나 비행훈련의 실시, 일본 육군기념일행사, ‘사변(事變, 중일전쟁을 말함) 기념일’ 관련, 일제의 시정(施政) 30주년 기념식 및 초혼제(招魂祭) 등 여러 행사와 관련한 경비 대책을 세우고 그 세세한 내용을 중앙의 경무국에 보고하고 있다. 이 밖에도 비행 이동 훈련에 관한 문건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만주 등지 군대의 조선 내 이동 상황, 기타 경비상황 등과 관련한 보고와 그 회의보고 등도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