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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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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화영화의 제작 환경 및 경향

한국영화사에서 1970년대는 국가 통제의 강화와 영화 산업의 위축이라는 이중적 난관으로 점철된 침체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유신체제 하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의 경색과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에 따른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과 문화적 파급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하여 동시기 한국영화가 산업 규모나 예술적 수준 양면에서 1960년대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에도 적용되는 양상이었으나, 문화영화에 있어서는 1960년대의 흐름을 이어가는 한편 부분적으로는 이보다 체계적인 일면을 갖추기도 하였다. 먼저, 두 차례에 걸친 영화법 개정과 이후의 시행령 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속하지 않는 요건들이 제시됨으로써 문화영화에 대한 범주가 법적 차원에서 규정되어 갔다. 즉, 1970년대에는 1970년, 1973년, 1975년, 1976년에 개정된 영화법 시행령 상에서 문화영화의 범주가 조정되고 재조정되었는데, 이를 통해 문화영화에 대한 정책 당국의 인식과 방식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문화영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이 강화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주류 영화로서 취약한 산업적, 대중적 기반을 가진 문화영화가 보다 안정성을 추구하게 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다음으로, 1970년대 영화 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 활동에 대한 국가 권력과 행정 기구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는 데 있다. 1970년대 영화법 개정은 1970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특히 1973년 2월 16일 4차 영화법 개정을 계기로 국가 주도적 성향과 실행의 강도가 더욱 짙어졌다. 물론 3차 개정 영화법과 4차 개정 영화법 사이에는 정책 기조 및 방향성에 있어 상통 혹은 연결되는 지점도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한국 문화영화는 진흥과 통제라는 양면적인 정책으로 1960년대를 계승하는 동시에 시대적 특수성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는 문화영화 업계에 대한 단속이 유지되고 외국 문화영화에 대한 규제와 국산 문화영화 지원 양상이 변화하며 문화영화 수입처와 제작처가 일원화되는 과정을 통해 문화영화의 제도적 기반이 보다 공고해졌다. 아울러, 문화영화의 제도적 안정성 추구와 더불어 그 제작-상영의 목적 및 이에 따른 생산 주체의 구분 체계가 점차 명확성을 띠어 갔다는 것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특히 국립영화제작소의 존재성이 두드러졌는데, 1970년대 들어 해외로 보급되거나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문화영화 중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의 비중이 높아졌고 1976년부터는 극장에서 의무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영화 모두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에는 국가 기구로서 국군홍보관리소의 문화영화 제작 활동도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그렇다고 민간 영화사의 활동이 저조하기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4차 개정 영화법 도입에 따라 영화사 설립에 제약이 커진 상태에서도 문화영화 제작사의 수는 극영화 제작사보다 적지 않았으며, 이들의 조직체인 제작자 협회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졌다. 이와 같은 제반 여건 하에서, 1970년대 한국 문화영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첫째, 제작 목적별로 국민 계도용 문화영화와 해외 홍보용 문화영화, 그리고 상업적 목적의 비극영화(非劇映畵)가 제작되었다. 둘째, 형식적으로는 현저하게 시리즈 작품의 비중이 증가하고 컬러 필름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셋째,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진 국책 문화영화를 들여다보건대, 내용상으로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치 지도자의 동정을 기록하는 한편 경제 개발의 성과를 제시하며 국민의 생활상을 조명함과 동시에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영화 범주의 조정과 재조정

3차 개정 영화법 시행령에 따른 범주 설정 (1970~1973)

1970년 8월 4일 법률 제2217호로 공포되고 동년 9월 4일 시행된 3차 개정 영화법은, 외국영화 수입쿼터제를 제작 성과에 따라 부여하던 방식을 폐지하는 동시에 영화 제작업과 수입업을 분리하고(제3조, 제5조의 2) 영화 제작자 담당자로 전속된 경우에 한해 ‘대명 제작’을 허용하며(제7조) 기존의 협회와 더불어 조합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제19조) 점 등에서 이전과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대 후반 제기된 정책을 둘러싼 영화계의 문제 제기와 영화인들의 요구 사항이 수용된 결과라 할 만하다.

  • 국무회의록-영화법 중 개정법률 공포(안)(제56회), 1970,
    총무처, BG0000696

한편, 3차 개정 영화법 상 문화영화는 “사회ㆍ경제ㆍ문화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교육적ㆍ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ㆍ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로 정의되었다.(제2조) 그러나 동 법에서 극영화에 관해 “배우를 출연시켜 연극화한 영화를 말하다.”라고 단순 기술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종류별 영화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다분히 불분명하고 비구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러던 것이 1970년 12월 23일 대통령령 제5423호로 공포ㆍ시행된 영화법 시행령 제16조 ‘수입추천기준’ 조항을 통해 보다 세부적인 범주 설정이 이루어졌다.

  • 국무회의록-영화법 시행령 개정(안)(제94회), 1970,
    총무처, BG0000712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②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외국영화에 대하여는 문화영화로서 수입추천을 할 수 없다. 1. 주된 소재나 구성에 있어서 극적 요소가 있는 영화. 2. 단순히 오락 또는 흥행을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서 극영화에 준하여 상영할 수 있는 영화. 3. 단순히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 또는 사항을 소개하거나 선전하는 영화.”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작품의 성격이나 제작 목적, 상영 방법 등에서 극영화와는 차별성을 명시하며, 세 번째 항목은 문화영화에 대한 영화법 상의 개념적 범위를 부가적으로 설명한다. 특징적인 점은 이들 모두 문화영화가 ‘아닌’ 경우를 다룬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문화영화에 대한 범주가 그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 사항들을 통해 조정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1960년대 후반 영화계에서는 문화영화의 범주에 관한 논란이 일었는데, 그 핵심은 외국영화 수입을 둘러싼 경제적 이권에 있었다. 가령, 당시 장편 문화영화의 쿼터 가격은 편당 1백만여 원이었던 데 비해 장편 극영화의 경우 6~7배를 호가하였는데, 이 때문에 <혹성탈출(>(1968), <바바렐라(Barbarrella)>(1968) 등의 상업용 SF영화들이 문화영화로의 신고를 거쳐 수입되는 ‘탈법적인 관행’이 문제시되었다.1) 이에 대해 1968년 문화공보부 영화위원회는 “문화영화의 개념을 비교적 탄력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방침을” 고수하기도 하였으나,2) 결국 1970년대 들어 부정적 요건을 통해 그 범주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4차 개정 영화법 시행령에 따른 범주 설정 (1973~1976)

3차 개정 영화법과 시행령이 1960년대의 영화계 환경과 영화인의 요구 사항을 수용한 것이라면, 4차 개정 영화법과 시행령은 197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동시기를 대표하는 영화 법령이라 할 만하다. 1973년 2월 16일 법률 제2536호로 공포ㆍ시행된 4차 개정 영화법은 외국영화의 수입 추천을 부여받을 대상을 ‘극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업자’로 한정함으로써 영화 제작업과 수입업을 다시 일원화하였고,(제10조) 기존의 영화진흥조합을 ‘영화진흥공사’로 법인화하였으며,(제15조) 특히 ‘영화진흥시책’(제3조), ‘영화업의 허가’(제4조) 및 ‘허가취소 등’(제5조), ‘영화의 제작 및 수입편수의 조절’(제6조) 등의 조항을 통해 영화(업)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을 강화하였다.

  • 국무회의록-영화법 중 개정법률(안)(제18회), 1973,
    총무처, BG0000813

여기에는 1972년 12월 27일 헌법 제8호로 공포된 ‘유신헌법’의 영향이 있었던 바, 한국영화사 서술에서 4차 개정 영화법은 이른바 ‘유신영화법’으로 일컬어진다. 4차 영화법 개정과 동시에 방송법 2차 개정이 단행되어 한국방송공사가 창립되고 매년 방송지침이 고시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3) 4차 개정 영화법 상 문화영화의 범주는 여타 종류의 영화의 경우처럼 3차 개정 영화법에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1973년 2월 17일 대통령령 제6507호로 공포ㆍ시행된 영화법 시행령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데, 제16조 ‘수입추천기준’ ②에서 수입추천 불가 항목 가운데 “3. 단순히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 또는 사항을 소개하거나 선전하는 영화.”라는 내용이 삭제된 것이다. 이를 두고 영화업 자체가 기존의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된 상태에서 “수입 대상 문화영화 규정이 다소간 완화”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으나,4) 제작 부문까지로 시야를 넓혀 보면 문화영화에 대한 당국의 이해와 정책적 지향을 발견하는 일도 가능하다.

  • 영화법 시행령(대통령령제6507호), 1973,
    총무처, BA0192371

단적으로, 1970년대 한국 문화영화의 특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점 하나는 다름 아닌 “단순히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 또는 사항을 소개하거나 선전하는 영화”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특정 인물이나 새마을운동의 ‘영웅’과 경제 개발의 성과, 북한의 도발 및 국방의 중요성 등을 시리즈로 구성하여 소개ㆍ선전하는 작품이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져 의무상영이라는 제도 속에 극장 곳곳에서 상영되던 것이 당대 문화영화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행령 개정안에 따른 범주 설정 (1976~)

영화법 4차 개정 이후 시행령은 1970년대에만 1973년과 1975년, 1976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되었다. 1975년 9월 4일 대통령령 제7787호로 개정ㆍ시행된 영화법 시행령에서는 ‘영화업의 허가신청’ 서류가 간소화되고(제2조) ‘변경 가 등’에 관한 내용이 수정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1976년 9월 1일 대통령령 제8227호로 개정ㆍ시행된 영화법 시행령의 경우 외화 수입에 관한 내용 변경을 포함하기도 하였다.(제9조의 2)

  • 영화법 중 시행령 중 개정령(대통령령제8227호), 1976,
    총무처, BA0193394

이와 함께 외국 문화영화 수입추천 불가 항목 중 “단순히 오락 또는 흥행을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서 극영화에 준하여 상영할 수 있는 영화.” 부분을 세 가지로 세분화하여 총 4개의 항목을 둠으로써 그 기준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 주된 소재나 구성에 있어서 극적 요소가 있는 영화”와 더불어 “2. 순수기록물 또는 준기록물이 아닌 영화”, “3. 영화의 주된 내용을 해설이 아닌 대사로 처리한 영화”, “4. 교육적ㆍ문화적인 효과가 없는 단순한 오락위주의 영화” 등의 요건이 제시됨으로써 극영화와는 구별되는 문화영화에 대한 정책적 범주 설정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 배경에는 태창흥업이 1975년 12월에 수입한 영화 <엔터테인먼트(That's Entertainment)>(1974)의 검열 과정에서 붉어졌다. 미국 MGM사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의 유명 장면들이 편집된 채 구성된 이 작품에 대해 수입 추천 당시 자문위원들은 문화영화로 인정하였지만, 1976년 1월에 실시된 검열 과정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오락 또는 흥행을 위하여 제작된 것”(영화 시행령 11조 2항)이라는 이유로 문화영화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태창흥업 측에서는 영화법 시행령의 해당 항목에 포함되어 있는 ‘극영화에 준함’이라는 문구의 모호성을 문제 삼아 문화공보부에 소원장을 제출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최종적으로 이 작품이 문화영화로 인정받게 되었다.5) 이를 계기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법규 상 문화영화에 대한 범주 설정이 일단락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외국 문화영화의 수입처가 영화진흥공사로, 극장 상영 문화영화의 제작처가 국립영화제작소로 일원화되고 기존의 한국문화영화제작자협회가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로 재정비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문화영화에 대한 정책적, 산업적 개념이 보다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문화영화를 둘러싼 통제책과 진흥책의 변천

문화영화 업계에 대한 단속

1970년대 한국 영화 정책의 기조는 국가 권력의 주도 하에 영화 산업을 육성하며 영화 문화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두어졌다. 이에 정부는 영화계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영화를 통해 국민의 의식을 선도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이를 활용하였다. 1962년 영화법 제정 시점부터 존속되어 온 문화영화 의무상영제 역시 그 일환이었다. 극장에서 본편인 극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한뉴스>와 함께 문화영화를 반드시 상영해야 한다는 규정은 ‘국민 의식 고양’과 ‘문화적 건전성 확보’라는 정책적 명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문화영화 제작업계가 일정 규모를 유지하게 된 측면도 공존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당국은 문화영화 의무상영을 이행하지 않는 극장에 대해 행정적 조치를 가하였다. 문화영화를 상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시 도봉구 미아동 소재 세일극장이 1973년 9월 7일 하루 동안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일이 하나의 사례라 할 만하다.6) 한편, 1971년 5월에는 서울시에서 시내 각 영화관에 동시상영 중이던 문화영화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빛나게>로 교체하라고 지시한 일도 있었는데,7) 이를 통해 일상적 문화 공간인 극장에서의 문화영화에 대한 정책 당국의 입김이 의무상영 자체를 넘어 상영 작품의 선택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문화영화 제작업계에 대한 정비 작업도 꾸준히 행해졌다. 일례로 1971년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문화공보부에서 행해진 영화 제작사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른 영향으로 기존의 74개사가 40개사로 줄어들었는데, 등록이 취소된 34개사 가운데 극영화 제작사는 3곳, 광고영화 제작사는 16곳이었던 데 비해 문화영화 제작사는 19곳으로 가장 많았다.8) 특히, 기존의 영화사 등록제가 허가제로 대체된 4차 개정 영화법 하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극영화제작사와 마찬가지로 문화영화제작사도 허가제(영화법 시행령 제3조 2항에 의거)로” 적용되면서 국가적 관리 체제 안에 포섭되었다.9)

외국 문화영화에 대한 규제와 국산 문화영화 지원 양상의 변화

한국에서 외국영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1960년대부터 명문화되어 있었다.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을 거치면서 외국영화 수입쿼터제가 도입되고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서는 스크린쿼터제가 의무화되었던 것이다. 외국영화 수입쿼터제의 경우, 1970년 영화법 3차 개정을 계기로 영화 제작업과 수입업이 분리되며 기존의 관행이 깨지기도 하였으나 1973년 영화법 4차 개정 이후에는 1960년대로 환원되었다. 그러면서 외국영화의 수입 편수 및 수입권 배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문화공보부가 매년 발표한 1970년대의 영화시책을 들여다보건대, 외국 극영화 수입권은 1972년 50편(+정책수입권 5편)이던 것이 1973년 43편(+정책수입권 4편), 1974년 40편(+정책수입권 4편), 1975년 38편(+정책수입권 3편), 1976년 40편, 1977년 40편 내외였음이 확인된다. 외국 문화영화에 대한 수입 편수에 있어서도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제한되었는데, 1974년 8편, 1975년 8편, 1976년 10편, 1977년 10편 등이었다.10) 그 내용에 대한 제한도 두어졌다. 예컨대 1976년의 경우 “문화적ㆍ교육적 가치가 있는 순수 기록영화에 한하여” 외국 문화영화 수입쿼터가 적용되었다.11) 더욱이, 1977년 영화시책에는 외국 문화영화에 대한 수입권을 “극영화 제작업자 중 신청자에 배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외국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에 대한 수입권까지도 극영화 제작업자들에게 집중되는 독과점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렇다고 문화영화 제작에 대한 공적 차원의 독려와 지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종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등에서 문화영화 부문에 대한 시상이 포함되었음은 물론이고,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까지도 제작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4차 개정 영화법을 근간으로 하여 1973년 4월 3일 발족한 영화진흥공사를 통한 제작비 융자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 영화진흥공사 창립식 1, 1973
    공보처 , CET0057778(12-1)
  • 영화진흥공사 창립식 2, 1973
    공보처 , CET0057778(15-1)

이는 1960년대까지 논의만으로 그쳤던 제작비 융자 사업이 실천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영화 제작 여건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지만, 결과적으로는 ‘불황기’ 한국영화의 제작 자본 형성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지녔다.12) 더욱이 문화영화에 경우 극영화와 다른 지원 조건이 적용된 데다가,13)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영화의 종류를 막론하고 제작비 융자 규모 자체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14)

문화영화 수입처와 제작처의 일원화

1970년대 문화영화 관련 제도적 변화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 수입처와 제작처가 특정한 국가 기구로 지정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1976년 9월 1일부터 문화영화를 포함한 외국영화의 수입처가 영화진흥공사로 통합되었다. 개정된 영화법 시행령 내 “법 제2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외국영화의 수입의 알선을 위하여 영화진흥공사는 수입 대상 영화 선정과 그 가격을 절충한다.”(제9조의 2)라는 ‘외국영화의 수입알선’에 관한 신설 조항을 근거로 한 문화공보부의 이러한 조치로, 국책 영화 제작, 영화 수출 진흥, 기술 개발, 시나리오 지원, 제작비 융자 등의 사업을 진행해 오던 영화진흥공사는 “수입 대상 영화의 선정과 그 가격 절충”뿐 아니라 “수입한 영화를 국내업자에게 배포”하는 업무까지 겸하게 되었다.15) 다음으로, 역시 1976년 이후 극장에서 의무적으로 동시 상영되는 국산 문화영화의 제작처가 국립영화제작소로 제한되었다. 당시 문화영화의 연도별 제작 편수(문화공보부 검열 기준)는 1969년 137편으로 최고를 기록한 뒤 1970년 119편, 1971년 100편, 1972년 111편, 1973년 120편으로 유지되다가 1974년 96편, 1975년 52편, 1976년 46편으로 급감하고 있었다.16) 이에, 가장 안정적인 제작 여건을 자랑하고 있던 국립영화제작소가 극장 상영용 문화영화의 제작 업무를 도맡게 된 것인데, 그럼으로써 ‘유신시대’로 일컬어지는 동시기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문화영화의 종류와 성격이 표준화되었다. 한편,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 시간도 규제되었는데, 문화공보부가 전국극장연합회 측에 지시한 바에 따르면 “휴게시간 5분, 광고 5분, 좌석 정리 및 애국가 예고 방송 5분, 애국가 2분, 대한뉴스 5분” 및 문화영화의 경우 15분을 초과할 수 없으며 ‘메인 프로그램’인 장편 극영화의 경우도 90~100분으로 배분해야 하였다.17) 이와 같은 제도적 조건 하에서 한국에서 문화영화는 보다 더 국가 정책(국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생산되었는데, 가장 핵심적인 ‘생산의 주체’는 바로 국립영화제작소였다.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국립영화제작소

앞서 살펴본 바대로, 1970년대에는 민간 영화사의 문화영화 제작 편수가 하락 추세에 있었을 뿐 아니라 문화영화 제작업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 역시 다소 제한적이었다. 이에 반해, 국립영화제작소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뉴스영화 및 각종 문화영화 제작의 산실로 자리해 갔으며, 1970년대 들어서도 이러한 추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국립영화제작소 소속 인원 또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줄곧 125명을 유지하던 것이 1971년에는 125명이 되었고 다시 1972년부터 1976년까지는 144명을 유지하다가 1977년 149명, 1978년 157명, 1979년 158명 등으로 계속해서 늘어났다.18)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동시기 한국의 영화 산업적 흐름과는 배치되는 풍경이었다. 국립영화제작소는 기획과, 제작1과, 제작2과, 제작3과, 현상과 등 총 5개 과로 조직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제작1과에서 <대한뉴스> 등의 뉴스영화를, 제작2과에서 국내 홍보용 문화영화를, 제작3과에서 국외 홍보용 문화영화를 만드는 일을 전담하였다. 이러한 환경 하에 여기서는 1960년대부터 각종 문화영화를 대량으로 ‘생산’하며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들의 작품에 ‘모범’을 제시하였다. 가령 1973년 한 해 동안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나온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제작 편수는 총 131편이었는데,19) 모두 12개사에서 125편을 만들어낸 같은 해 영화계 전체의 극영화 제작편수를 능가하는 수치였다.20)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1960년대 후반 장편영화 <팔도강산>(배석인 감독, 1967)이 기획ㆍ제작되기도 하였는데, 이 작품은 325,904명이라는 해당년도 최고 관객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낳았다. 이듬해에 나온 <속 팔도강산: 세계를 간다>(양종해 감독, 1968) 또한 217,000명으로 흥행에 성공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도 ‘팔도강산’ 시리즈는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감독,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감독,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감독, 1972)으로 이어졌다.

  • 팔도강산 관람객 촬영, 1971,
    공보처, CET0057715

그러던 중에 1973년 영화진흥공사가 출범함으로써 장편 극영화 제작의 ‘임무’는 여기로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대한뉴스>와 더불어 각종 문화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전술한 바대로 1976년 이후에는 극장에서 의무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영화까지도 이곳에서 나온 작품으로 한정됨으로써 본편인 극영화 상영 시 반드시 틀어야만 하는 ‘뉴스영화+문화영화’의 제작 주체가 국립영화제작소로 일원화되었다. 한편, 1970년대는 한국 문화영화의 예술적 측면에 있어서도 국립영화제작소의 존재성이 상당히 확대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1965년부터 이어져 오던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 부문의 비극영화상(悲劇映畵賞)에서는 1972년 이래로 줄곧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진 문화영화들이 수상을 독점하였다. 동시기 해외 영화제에서 입상한 한국 문화영화 중 국립영화제작소 제작 작품의 비중 역시 매우 컸다.

국군영화제작소

1970년대에 문화영화를 지속적으로 생산한 그 밖의 국가 기구로는 국군영화제작소를 꼽을 수 있다. 이 조직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4일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로 창설된 뒤 전황을 담은 <정의의 진격>(한형모 감독, 1951~1952) 시리즈 2편을 내놓은 바 있으며, 전후에는 1957년부터 군인용 교육영화를 만들어 오다가 1963년 12월 16일 국군영화제작소로 개편된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내용의 선전/홍보 영화가 ‘생산’되었다. 1966년부터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베트남전쟁 관련 소식을 뉴스 기록물 형식으로 다룬 <월남전선>과 <국방뉴스>가 만들어졌는데, 극장 상영용으로 기획된 <월남전선>과는 달리 텔레비전 방영용으로 쓰인 <국방뉴스>의 경우 베트남전쟁이 종결된 1975년 이후로도 그 제작이 이어졌다21) 이곳에서는 특히 1970년대 이후 회당 정해진 분량으로 <배달의 기수>가 계속해서 만들어졌는데, “군의 사기앙양을 위한 계몽영화로 군의 활약상 소개 및 교육적 가치가 있는 드라마 위주로” 제작된 문화영화 성격을 띤 이 작품은 주기적으로 극장에서 상영됨과 동시에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다.22)

  • 배달의 기수 제1호-초병의 눈초리, 1970
    국방부, CEN0009278
  • 배달의 기수 제400호-영해의 눈초리, 1978
    국방부, CEN0006185

민간 영화사

1970년대에 문화영화를 기획ㆍ제작한 민간 영화사의 수도 적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4차 영화법 개정 이후로 1975년까지 허가를 받은 극영화 제작사가 14개였던 데 비해,23) 1976년 2월 현재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문화영화 업자는 총 18명이었다.24) 하지만 이들 영화사는 대체로 영세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970년대에는 정부 각 부처나 국영 기업체에서 국민을 목적으로 한 홍보영화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입찰 과정에서 민간 영화사 간의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다 보니 “문화영화를 만들 경우 판로가 협소하고 프린트 값 계산이 맞지 않을 정도로” 저렴해지곤 하였다. 이것이 문화영화의 질적 하락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에, 유현목 감독은, 문화영화 제작 업체들이 단결하여 ‘덤핑’을 근절하고 제작자 측의 경우 흔쾌히 제작비를 투자하며 관련자들 모두가 문화영화만의 영화제를 개최하는 일 등을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25) 그러나 문화영화 업계의 위기감은 이미 1970년 3차 개정 영화법을 통해 영화진흥조합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비영리 단체인 한국영화인협회까지도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영화 제작업자들이 배제되었던 때부터 있어 왔던 터였다.26) 그러면서 유신체제라는 특수한 권위주의적 사회 구조 하에서 1976년 이후에는 기존의 뉴스영화 <대한뉴스>와 함께 극장에서의 의무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처가 국립영화제작소로 일원화되었는데, 이후 더욱 설 곳이 없게 된 민간 문화영화사들은 새로운 조직화의 시도를 통해 난국을 헤쳐 나가려는 시도를 하였다. 즉, 1976년 12월 8일 문화영화 제작 19개사 중 12개사가 참여한 가운데 상호 협동, 기술 향상, 제작의욕 고취 등을 취지로 한국문화영화제작자협회가 발족되었다.27) 사실 한국문화영화제작사협회는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며 이 단체의 주관 하에 문화영화 대회28) 나 문화영화 감상회29) 가 개최된 일도 있었던 바, 1976년 12월에 결성된 협회는 다분히 이전의 것이 재조직 혹은 재정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1977년 4월 29일에는 다시금 새롭게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가 창립되었다. “회원간의 상호 협동과 친목을 도모하며, 문화ㆍ광고 영화의 질적 향상 발전과 연구 및 제작기술을 육성 창달하여 유신과업에 이바지”한다는 목적 하에 세워진 이 단체는, 이외에도 문화ㆍ광고 영화행정에 대한 관계 기관과의 협의, 기업과의 주선, 행정 협조, 국내 및 국외 영화 교류, 우수 문화ㆍ광고 영화상 제정 및 집행, 외국 문화영화 수입ㆍ배급, 문화ㆍ광고영화의 자율정화 심의 등 제반 사항을 관리하였다.30) 회원은 총 23개사였으며, 기존의 문화영화 제작사뿐 아니라 전문적인 광고 제작사 및 기업과 문화재단은 물론 유력 신문사와 방송사 등이 포함되었다.31) 이를 통해, 문화영화 제작의 국가 주도적 추세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문화영화 부문의 민간 제작사들의 선택적 행보를 포착할 수 있다.

197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제작의 목적


1960년대부터 법문화된 문화영화 의무상영제가 1970년대에도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영화계의 환경과 영화 제작을 둘러싼 제반 여건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영화가 지니는 장르적 특성과 그 제작을 통해 창출되는 효용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1970년대 한국에서의 문화영화 제작의 목적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국민 계도를 위한 제작이다. 1970년대는 정치, 외교,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커다란 지각 변동이 있던 시기였다. 즉, ‘데탕트시대’ 도래에 따른 국제 사회의 재편과 석유 파동 등으로 인한 세계 경제의 불안정 속에, 당시 정부는 대통령에 대한 직선제 폐지와 권력 집중화를 골자로 하는 유신체제를 수립하였고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중공업 부문으로까지 확대ㆍ적용하였다. 또한, 남북 대치 상황과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개개인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한편, 국토의 균형적 개발과 근대적 생활의 영위를 목표로 내세운 ‘새마을운동’의 기치 하에 국민을 동원하는 일이 많았다. 이에 정부에서는 법령 및 검열 장치 등을 매개로 ‘영화가 다루지 말아야 할 것’과 우수영화 선정 기준 등을 통해 ‘영화가 담아내야 할 것’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계도를 꾀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의무상영의 제도화가 정착되어 있던 문화영화의 경우 특히 영화가 담아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국민을 계도하는 기능을 충실히 담당할 것을 요구받았다. 둘째, 해외 홍보를 위한 제작이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국력 신장과 경제적 발전, 문화적 역량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적극적인 해외 홍보 활동을 추진하였다. 1972년 미국, 일본, 프랑스, 홍콩, 레바논 등에 ‘해외홍보지역센터’를 설치하고 캐나다, 오스트리아 등에 ‘해외홍보협회’를 설립하기로 한 예가 대표적인 경우다. “북괴와의 의 치열한 홍보전”의 일환으로까지 명명된 이러한 활동에는 각종 간행물 발간과 함께 연간 6편의 극영화 및 12편의 문화영화 제작 및 배포가 포함되어 있었다.32) 그리고 문화공보부 산하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한국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교육영화 제작에 주력하여 국제 간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한편,33) 이를 위해 국민총력 안보, 청소년과 근로자, 도시민의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해외 홍보를 위한 문화영화 시나리오를 공모하기도 하였다.34) 이어 197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해외용” 문화영화를 제작하여 “각 공관에 배포할 계획”을 실행해 갔는데,35) 1978년의 경우 연간 문화영화 제작 계획 편수 45편 가운데 국내용이 30편, 해외용이 15편이었다.36) 셋째, 이윤 창출을 위한 민간 차원에서의 제작이다. 1970년대를 통과하며 문화영화 업계에 대한 각종 지원이 축소되고 문화영화 제작의 수입처와 제작처가 국가 기관으로 집중되었으나, 그렇다고 민간영화사의 제작 여건이 부정적 변화를 보였던 것만은 아니다. 1974년 영화진흥공사에서 발표된 ‘영화진흥 5개년 계획’을 살피더라도, 민족 영화 제작, 제작 시설 현대화, 작품 소재 개발, 우수 영화 지원, 인적 자원 양성, 해외 시장 개척 등과 함께 별도로 문화영화 진흥을 위한 계획이 1억 원의 예산으로 편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37) 아울러 공공 기관이나 문화 시설 등에서도 문화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잦아지는 추세였으며, 특히 본격적인 텔레비전 방송 시대의 도래에 따라 스크린에서 밀려난 민간 문화영화 콘텐츠가 ‘안방극장’으로 수용될 여지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문화영화 업자들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광고영화와의 연계 등을 통해 문화영화의 제작 혁신과 판로 개척을 도모하며 격변하는 시대적 흐름과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대응해 갔다. 이밖에도, 위의 세 가지 경우와 중첩되는 것으로서 문화영화를 통한 예술적 추구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국내의 각종 영화제와 국제 규모의 해외 영화제로의 출품과 수상이라는 행위가 결부되어 있었다. 가령, 1962년부터 이어져 온 대종상 내에는 ‘(최우수)문화영화작품상’과 ‘(문화영화)특별상’ 부문이 있었는데, 전자는 민간영화사 제작 문화영화가, 후자는 국립영화제작소 제작 문화영화가 그 대상이 되었다.

형식적 특징


1970년대 한국 문화영화의 형식적 특징은, 컬러 화면의 일반화와 시리즈 작품의 증가라는 크게 두 가지 현상으로 요약된다. 주목되는 점은, 둘 모두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과 텔레비전 방송의 일상화로 대표되는 당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먼저, 1970년대 문화영화 제작 과정에서는 컬러 필름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물론 이는 동시기 상업용 극영화를 비롯한 한국영화의 일반적 경향이기도 하였다. 한국영화의 컬러화는 1960년대 “10여 년에 걸쳐 더디게 정착”되는 과정을 거쳐 1969년에 이르면 “완전한 컬러영화의 시대로 진입”하였기에 그러하다.38) 문화영화의 경우 이미 1960년대부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진 작품들 중심으로 컬러영화를 다수 내놓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국립영화제작소가 안정적인 제작 예산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컬러영화 현상 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 문화영화의 컬러화는, 텔레비전 방송의 컬러 시대가 1980년대 들어서야 개막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대중 영상 매체로서의 헤게모니가 텔레비전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그나마 영화가 담보할 수 있는 시각-기술적 우위가 화면의 크기 및 비율과 더불어 화면 색상에 두어졌던 시대적 특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동시기 문화영화에도 전반적으로 묻어나 있다. 다음으로, 1970년대 문화영화 중에는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이전에 비해 괄목할 만큼 많아졌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작품을 예로 들면, 대통령의 활동상이나 ‘새마을 일꾼’들의 활약상, 미술 및 체육 행사 등이 적게는 2~3편, 많게는 10편 이상의 시리즈물로 기획ㆍ제작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대 최고의 대중 영상 매체로 급부상한 텔레비전과의 영향 관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한국에서 텔레비전 수상기는 1970년 38만여 대였던 것이 1973년 128만여 대, 1975년 201만여 대를 거쳐 1979년에는 597만여 대로 크게 증가한 반면, 영화 관객 수는 1970년 1억 6,635만여 명, 1973년 1억 1,463만여 명, 1975년 7,560만여 명, 1979년 6,552만여 명으로 크게 감소하였다.39) 이러한 매스 미디어의 위상 변화 과정을 겪으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징인 텍스트의 시리즈화 경향이 문화영화의 기획ㆍ제작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텔레비전 방송은 프로그램의 내용은 물론이고 편성 비율에 있어서도 국가 권력의 통제를 강하게 받았는데, 이에 대한 문화공보부의 지시는 1973년 4월 1일 기준으로 보도 프로그램 10% 이상, 오락 프로그램 20% 이상, 그리고 기존의 문화영화 성격의 콘텐츠를 주로 범주 안에 두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30% 이상이었다.40)

내용적 특징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1970년대 한국 문화영화는 대부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들 작품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적 특징을 보인다. 첫째, 국가 안보의 중요성 강조. 1970년대에도 당시 정부는 반공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국민 총화’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당시 문화영화 가운데는 북한의 무력 침공에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들이 다수 포진되었다. 이들 문화영화는 크게 한국전쟁의 참상 혹은 국난 극복 과정을 상기시키거나 남북 대치 및 남한 국방력의 현 상태를 점검하거나 타국의 사례를 통해 한국을 되돌아보게 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분류되는데, 개중에는 둘 이상의 복합적 사안을 다룬 것들도 있었다. 한편, 1970년대 초 남한과 북한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평화 통일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였던 바, 이러한 모습은 문화영화 <남과 북의 대화>(1972) 등의 작품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당대의 안보 분위기에 따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영화로 채워졌다. 둘째, 정치 지도자의 동정 기록. 1970년대 한국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특수성은 1972년에 도입되어 1979년까지 지속된 이른바 ‘유신체제’로부터 기인한다.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되고 이렇게 뽑힌 대통령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던 이러한 체제 속에서, 당시의 국책 문화영화는 대통령의 영웅적 면모와 그의 지도력을 드러내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한 가장 일반적인 경우가 대통령의 동정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 기록영화 성격의 문화영화였는데, 여기에는 1970년대뿐 아니라 1960년대의 활동상이 담긴 작품들도 포함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975년부터 지속성을 띠며 다수 제작된 <겨레의 지도자> 시리즈를 들 만하다. 동시기의 활동상을 다룸에 있어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장례식, 외국 국가 원수의 방한 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김종필 국무총리 월남 방문>(1971)이나 <김종필 국무총리 사또 장례식에>(1976) 등과 같이 국무총리의 동정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 경제 개발의 성과 제시. 1970년대에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2~1976)을 거치면서 중화학공업 육성과 건설 산업 등의 해외 진출을 추진하였고, 경부ㆍ호남ㆍ남해 고속도로를 개통하는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였으며, 1차 산업인 농업ㆍ어업ㆍ축산업의 선진화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1970년대 한국은 ‘석유 파동’으로 대표되는 외부적인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경제 지표 상으로 지속적인 성장세를 나타내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경제 각 부문의 비약적인 발전상이 문화영화 속에 투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넷째, 국민의 생활상 조명. 197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근면·자조·협동의 기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범국가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국가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진행된 운동”41) 으로 정의되는 새마을운동은, 농어촌 및 도시를 망라한 지역 사회의 개발과 더불어 전 국민의 생활 수준 개선과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였다. 새마을운동이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 근대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그 전개 양상 및 이를 통한 생활 방식의 변화상은 영화 속으로도 들어왔다. 그러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기관사, 교사, 집배원 등의 모습을 담은 <숨은 일꾼들>(1971) 시리즈나 ‘유신 시대’의 모범적 가정의 전형을 다룬 <새마을 가족>(1975) 시리즈와 같은 계몽적 성격의 국책 문화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다섯째, 민족 문화의 우수성 소개. 집권 기간 동안 당시 정부가 제시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는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키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도록 하여 남북 간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명제 하에, 국내적으로는 사회 여론을 결집시키고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에도 문화영화가 이용되었는데, 1970년대에는 특히 해외 홍보용 영화 42) 와 국제 영화제 수상작43) 등의 형태로 문학, 미술, 음악 등의 한국의 전통 문화 및 한국 사회의 특징 등에 관한 문화영화가 본격적으로 기획ㆍ제작ㆍ배포ㆍ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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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영상자료원 편, 『지워진 한국영화사: 문화영화의 안과 밖』, 현실문화연구, 2014, 104쪽 참조. 2) 위의 책, 105쪽. 3) 오진곤, 「유신체제기 영화와 방송의 정책적 양상에 관한 연구 : 유신체제의 법제적 장치에 따른 영화와 방송의 법제적 조치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8권1호,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2011, 254~255쪽 참조. 4) 한국영상자료원 편,앞의 책, 108쪽. 5) 위의 책, 108쪽~110쪽 참조. 6) 「천지ㆍ세일극장 1일 동안 정업」, 『경향신문』 1973.9.3, 7면 참조. 7) 「문화영화 교체 상영 서울시서 지시」, 『매일경제』 1971.5.27, 7면 참조. 8) 「영화사 정비 문공부 실태조사서 부실 드러나」, 『매일경제』 1972.1.6, 7면 참조. 9) 영화진흥공사, 『한국영화자료편람』, 대양문화사, 1977, 52쪽. 10) 실제로 추천 및 검열을 받은 문화영화의 편수는 이보다도 다소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진흥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외국 문화영화 수입추천 편수는 1970년 10편, 1971년 5편, 1972년 17편, 1973년 9편, 1974년 1편, 1975년 10편, 1976년 7편 등이었고, 검열 편수의 경우 1970년 8편, 1971년 3편, 1972년 4편, 1973년 9편, 1974년 2편, 1975년 4편, 1976년 7편 등이었다.위의 책, 80쪽 참조. 11) 「한국영화 120편 외화수입 40편」, 『동아일보』 1976.2.14, 1면. 12) 김동호 외, 앞의 책, 235쪽 참조. 13) 1974년을 예로 들면, 극영화 34편에 3억 9,140만 원이 대출 지원된 데 비해 문화영화는 18편에 1,114만 원이 대출 지원되었다. 「57편 4억 7천만 원 대출」, 『경향신문』 1975.1.6, 8면 참조. / 1976년의 경우 극영화 3편과 문화영화 2편을 대상으로 한 ‘첫 제작자금 대출’ 시 극영화 3편에 대해서는 1,300만 원(1편) 및 1,500만 원(2편)을 6개월간 대출해 준 데 반해 문화영화에 대해서는 각각 30만 원을 3개월 간 대출해 주었다. 「중계탑」, 『경향신문』 1976.1.29, 8면 참조. 14) 1978년에는 “녹음시설 등에 많은 자금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제작비 대출 한도액을 극영화는 3,8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문화광고영화의 경우 160만 원에서 80만 원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영화 제작 대부 한도 줄어」, 『경향신문』 1978.2.16, 8면. 15) 「외화 개별 수입 지양 영진공으로 일원화」, 『매일경제』 1976.9.1, 5면. 16) 이충직, 「한국의 문화영화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1985, 44쪽 참조. 17) 「문화영화 등 시간제한 휴게시간까지 총 42분 못 넘겨」, 『경향신문』 1976.12.16, 8면. 18) 함충범ㆍ정대훈, 「박정희 정권기 국립영화제작소에 대한 연구: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시대적 특수성 및 역사적 함의와 더불어」, 『오토피아』 2권2호,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2013, 190쪽 참조. 19) 「올해 모두 백31편 제작 국립영화제작소, 64개국에 홍보」, 『경향신문』 1973.12.25, 5면 참조. 20) 김동호 외, 앞의 책, 251쪽 <표 4-15> 참조. 21) 박선영, 「국가의 프레임으로 구획된 베트남전쟁: 국립영화제작소와 국군영화제작소의 베트남전쟁 영화를 중심으로」, 『사림』 53호, 수선사학회, 2015, 79~80쪽 참조. 22) 이충직, 앞의 학위논문, 61~62쪽. 23) 영화진흥공사, 앞의 책, 51쪽 참조. 24) 「추방 시급한 저질 문화영화」, 『경향신문』 1976.2.9, 8면 참조. 25) 위의 기사. 26) 「청사진 ’71 영화…주동진 씨」, 『경향신문』 1971.1.30, 7면 참조. 27) 「「문화영화협」 창립」, 『동아일보』 1976.12.8, 5면 참조. 28) 「제1회 문화영화 대회 1월 15, 23일 이틀간」, 『경향신문』 1970.12.28, 5면 참조. 29) 「문화영화 감상회 각계 저명인사 초청코」, 『매일경제』 1970.11.5, 7면 참조. 30) 영화진흥공사, 앞의 책, 288쪽. 31) 위의 책, 52쪽 참조. 32) 「발로 뛰는 72년 (완) 해외 홍보」, 『경향신문』 1972.1.13, 5면. 33) 「올해 모두 131편 제작 국립영화제자소, 64개국에 홍보」, 『경향신문』 1973.12.25, 5면. 34) 「문화영화 시나리오 문공부서 현상공모」, 『매일경제』 1974.4.18, 8면. 35) 「해외용 문화영화 각 공관 배포」, 『경향신문』 1976.7.23, 1면. 36) 「스케치 문화민족의 긍지 살린 「한국인의 일생」」, 『동아일보』 1978.7.15, 5면 참조. 37) 「영화 진흥 5년」, 『동아일보』 1974.2.20, 5면 참조. 38) 이효인 외, 『한국영화사공부: 1960-1979』, 한국영상자료원, 2004, 250~252쪽. 39) 영화진흥공사, 앞의 책, 156쪽 및 이영일, 『한국영화주조사』, 영화진흥공사, 1988, 451~452쪽 참조. 40) 그 영향으로, 1973년 8월 1일 현재 교양 프로그램의 비중은 KBS 40.1%, TBC 33%, MBC 32%였다. 김정기, 『방송사 사료집』, 방송위원회, 2000, 342쪽 참조. 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encykorea.aks.ac.kr) 참조. (검색일: 2019.9.27) 42) 대표적인 경우로 1977년에 만들어진 ‘한국 소개 시리즈’를 들 수 있다. “해외 홍보를 강화, 외국인의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취지 하에 총 15편으로 기획ㆍ제작된 이들 문화영화는 암사동 유적, 고려자기, 신윤복의 그림, 신라 고분, 한국의 고건축과 민속잔치 등에 관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문화영화 「한국 소개 시리즈」 문공부, 올해 15편을 제작키로」, 『동아일보』 1977.4.9, 7면. 43) 관련 작품으로 1974년 6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어린이교육 부문 특별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12월 이란에서 개최된 교육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한국의 어린이들>(1973)과, 1977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문화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은 <고려자기>(1977) 등이 있다. 「문화영화 「한국의 어린이」 이란의 교육영화제서 1등」, 『동아일보』 1975.1.11, 5면 및 「영화 「고려자기」에 우수상」, 『동아일보』 1977.11.11, 5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