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졸업식 교복 찢고 평소엔 복장불량자 많아 골머리
『조선왕조실록』 - 유생들 외출 시 교복·교모 착용 수차례 상소
1958년 고등학교 졸업식 모습

1958년 고등학교 졸업식 모습

2월은 졸업과 입학으로 이어지는 아쉬움과 설렘의 계절이다.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는 봄학기와 봄방학을 없애고 시간을 보다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 1월에 졸업식을 갖는 학교들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은 많은 학교가 2월에 졸업식을 갖는다.

사회 전반의 변화에 따라 졸업풍속도 많이 변하고 있다.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졸업생의 할머니부터 동생들까지 학교주변이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요즘은 교문 앞에서 꽃을 파는 사람들이 없으면 졸업식이 열리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한산하다.
이 같은 현상은 핵가족화와 맞벌이 가정이 많이 늘었고 아이들 문화도 변해 졸업식이 끝나면 참석했던 부모는 직장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끼리끼리 짝을 지어 노래방을 가거나 시내에 놀러 가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변했지만, 여전히 졸업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이다. 한때 과도한 졸업식 뒤풀이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최근 들어 졸업을 좀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치르려는 학교들이 늘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는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뜻으로 담임을 가마에 태워 졸업식장에 입장하고, 1천명 분의 떡을 만들어 졸업생은 물론, 선생님과 학부모, 후배들이 다 함께 나누며 격려와 덕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는 졸업식 날 15년 뒤 만날 것을 약속하며 미래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타임캡슐에 넣어 봉인했으며, 한 초등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과 자신들이 공부했던 교실에서 1박 2일 야영하는 추억여행으로 졸업식을 대신했다고 한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했다. 친구들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스승에 대한 존경을 담아 낸 이처럼 멋진 졸업식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과도한 뒤풀이로 사람이 다치고 경찰이 출동하던 막장 졸업식에 대한 반동이다.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뿌리고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졸업식 뒤풀이는 억압과 통제의 수단으로 여겨졌던 교복에 대한 반감과 그로부터 벗어난다는 해방감을 이해한다하더라도 추태이다.

일부에서는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졸업식 날 청금(靑衿, 유생들의 의복)의 옷깃을 찢던 의식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하는데, 오늘 날의 그것과는 격이 다른 것으로 확대 해석이라는 의견이 많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한양 소재 동, 서, 남, 중부학당), 향교의 졸업시험인 고과를 치룬 뒤 임금이 내린 하사배(下賜盃)에 술을 함께 마시며, 임금에 대한 예와 동문간의 결속을 다지는 공음(共飮) 의식이 있었으며, 이따금 성균관 유생들이 교복인 청금의 소매를 서로 찢는 파금(破襟)의 폐습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종이 복숭아 무늬가 새겨진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한데 이어 호박(琥珀盃), 수정배(水晶盃), 은배(銀盃) 등 그 이후로도 여러 임금이 술잔을 하사한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음의식은 오래 동안 지속된 전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졸업식 파금에 대한 기록은 교복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성종 재위 시에도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요즘도 그런 것처럼 일부 짓궂은 유생들의 소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조차 정해진 졸업식이 없었고 학과시험인 고과, 요즘의 학생부격인 구용지신, 과거시험 성적을 총 합산한 점수로 과거합격여부를 평정하여 통과한 유생만 졸업할 수 있었으며, 계속 불합격한 유생은 자퇴하거나, 학생 자치회의 결정에 따라 강제 퇴교 당했다.
공립 중등교육기관인 사학(四學), 향교, 사립인 서원,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서당도 입학 연령은 정해져 있었지만, 성균관에 진학하거나 과거시험 합격자 먼저 졸업했기 때문에 같은 나이에 입학했어도 졸업은 제각각이었다.
이렇다 보니 동창생들이 같은 날 졸업식을 마치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옷을 찢고 밀가루를 뿌리는 졸업식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졸업식은 오늘 날과 많이 달랐지만, 교복이 주는 억압과 통제에 대한 반항심, 일탈하고 싶은 충동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태종실록』 21권 1411년 6월 12일 세 번째 기사는 "성균관과 오부 유생들이 처음으로 청금(靑襟)을 입었으니 조정의 제도에 따른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성균관 유생들이 이때부터 교복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여러 차례 유생들의 청금 착용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성종 때까지는 상시착용은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실록』 14권 1421년 12월 23일 네 번째 기사는 성균관에서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의 예를 정한 것으로 "전사관이 각기 소속 관원을 데리고 들어와 제구에 제찬을 담는다. 이를 마칠 때 쯤 학생들은 청금복을 입고 섬돌 사이 배례를 지내는 자리로 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실록에는 학생들이 청금복을 입어야 할 자리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처럼 교복을 입어야 할 행사와 시간, 역할 등을 굳이 명시하고 있는 것은 평상시는 착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행사 시 의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지만, 수업시간이나 방과 후 복장에 대해서는 규제하지 않자 유생들이 교복인 청금복을 잘 입지 않은 것 같다. 『성종실록』 85권 1477년 10월 29일 다섯 번째 기사는 임금이 성균관과 서울 4개 학당의 유생들이 길거리로

서당의 모습

나갈 때는 청금단령(靑襟團領, 푸른 소매가 있는 도포)을 착용토록 하라고 예조에 내린 명령이다.
『성종실록』 86권 1477년 11월 1일 첫 번째 기사는 성균관 유생들의 교복과 관련, 임금과 대신들이 난상토론을 벌인 내용이다. 경연(經筵)이 끝난 후 대사간 김자정이 신임 제주경차관의 과거 착복전력 등을 들어 인사 철회를 요청하자 임금은 확인절차도 없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임명하라"고 지시한 뒤 대뜸 유생들의 복식(服飾) 문제를 제기했다.
"윤대(輪對, 고위 관료가 차례대로 정무와 관련 건의하는 제도)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생은 그 복식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들 하시오." 이에 영사 김국광이 "선왕조에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유생들에게만 다른 옷을 입히면, 성균관에 남을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하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자 임금은 "유생이 유복(儒服)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게 말이 되느냐. 뜻이 있는 자는 입을 것이니 좋은 방법을 말해 보라."했다. 이날 토론은 "길거리에서는 일반인들이 쓰는 갓과 청금을 입게 하자."는 지사 이극배의 제안을 채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임금이 친히 명을 내리고 경연에서까지 격론을 벌였지만, 10대들에겐 그다지 지엄하게 들리지 않은 듯하다.『성종실록』 86권 1477년 11월 26일 첫 번째 기사는 유생의 의관에 관한 상소이다. 주계부정 심원이 "유자(儒者) 가 길거리를 다닐 때는 두건과 청금을 입도록 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두건은 각자 알아서 하고 청금은 꼭 입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이에 심원은 "그렇다면 몸은 유자가 되어야 하고 머리는 유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입니까"라며 두건도 착용하게 할 것을 건의했지만, 임금은 유생들의 교모는 자율화했다.
상소를 올린 이날은 임금이 예조를 통해 외출 시 교복을 착용하도록 명한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교복인 청금을 여전히 착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임금과 조정의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 유생들의 태만과 사치가 도를 넘고 학교는 퇴폐해져 갔다. 『연산군일기』 25권 1497년 7월 19일 두 번째 기사는 성균관 지사 어세겸 등이 "유생들은 책을 끼고 다니지 않고, 청금을 입지 않으며, 살 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갓과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왕년에 없던 풍습이다. 이는 사표(師表)가 적격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며 유생들의 태만과 사치, 재덕(才德)이 출중하지 않은 교관 등을 싸잡아 비난한 내용이다.
『중종실록』 19권 1513년 11월 4일 다섯 번째 기사는 임금이 왕자의 입학을 앞두고 퇴폐해진 학교를 걱정하는 내용으로 "퇴폐해진 학교를 바로 세우고 왕자가 모범을 보여 다른 유생들이 본받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왕자가 입학했지만, 유생들과 학습태도와 학교가 크게 게선 되지는 않은 것 같다. 1년여가 지난 12월 16일 첫 번째 기사는 학교진흥에 관한 논의이다. 영사 정광필이 "학교가 피폐해져 이를 진작시킬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임금은 "유생들을 법령으로만 다스릴 수는 없다. 학교에서는 사장(師長)을 선임해 유생들의 학교생활을 지도하고 집에서는 부형이 지도하게 하라."는 내용이다.
이어 임금은 "요즘의 유생들은 청금단령을 입지 않아 길거리를 다닐 때는 서인(庶人)과 다름이 없다. 마땅히 치죄해야 하지만, 유생들을 그럴 수는 없고 부형과 사장을 처벌하라."고 명을 내렸다. 요즘은 학교 밖에서 사복을 입는 것이 적발될 일도 아닌데, 조선시대에는 학부모와 학생부장까지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중대한 교칙위반이었다.

1957년 대학교 졸업식 모습

1957년 대학교 졸업식 모습

요즘은 졸업식에 이어 약 1주일의 짧은 봄 방학이 끝나는 3월 초쯤 각급 학교 입학식이 일제히 열리는데 조선시대에는 정해진 시기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한국교육사이해』에 의하면,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서당의 재학생이 1명에서 많게는 40여명 정도였다. 따라서 입학생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의식을 치룰 수가 없었고, 그때그때 입학희망자가 훈장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이를 수락하면 입학이 이루어 졌다. 비교적 간단한 절차였지만, 처음 서당에 가는 날은 반드시 술과 닭,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준비하는 음식의 차이는 있지만, 스승에 대한 예는 왕세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14권 1421년 12월 23일 네 번째 기사는 왕세자가 스승을 처음 만나는 속수의식에 관한 것이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세자 가 박사가 머무는 학당에 이르러 '아무가(제가) 감히 선생님에게 수업하려고 뵙기를 청하옵니다.' 하고 집사를 통해 전하면 박사는 '아무가(제가) 덕이 없으니 청컨대 저를 욕되게 하지 마소서' 하면 왕세자가 다시 뵙기를 청하고 박사는 '그러시면 감히 뵙겠습니다.' 라고 답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지만, 비록 왕세자일지라도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도록 한 것이다.

생원시나 진사시 합격자가 입학하는 성균관은 입학생 규모가 제법 많기 때문에 대성전 알현, 재학생과의 상견례인 상읍례 등의 의식이 있었는데, 백미는 역시 왕자의 입학식이다. 왕세자의 수업은 궁내에서 하지만, 입학식은 성균관에서 유생들과 신료들이 배석한 가운데 장중하게 거행되었다. 『세종실록』 121권 1448년 8월 28일 첫 번째 기사는 예조가 정한 왕세손의 입학의(入學儀)에 관한 것으로 성균관 입장부터 환궁까지 왕세손의 동선과 대사, 유생과 신료들의 복장, 위치, 소요시간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 모든 장면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화가 잘 보전되어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졸업과 입학은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진학이 결정된 사람은 상급 학교에서,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은 평생을 다녀야 할 인생학교에서 각자 또 다른 시작을 하기 때문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과 사회에 힘찬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 모두에게 희망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