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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거센 물결 판결문으로 본다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3·1운동Ⅱ)』 영·호남지역편 발간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자료집 표지사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지난해 중부지역(경기·강원·충청) 판결문 자료집 발간에 이어, 올해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Ⅱ』를 발간했다. 이번에 발간한 자료집은 영남과 호남(제주도 포함)지방 3·1운동 전개양상을 소개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판결문 원문(原文) 50건(286명)과 번역문을 함께 싣고 있다.
판결문 원문은 한문과 일본어로 쓰여 일반인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번 자료집 발간으로 일반인의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남부지역 3·1운동 연구와 향토사학자들의 지역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료집은 총설과 판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에서는 3월 이후 전개된 영남·호남 지역별 만세운동의 생생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판결문에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지역의 독립만세 운동 준비와 전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에 헌신했던 분들의 꿋꿋한 의지와 용기 등 현장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독립만세 시위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외에도 교사와 학생은 물론 유생층까지 동참한 거족적인 운동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선 주인공들은 연령, 종교, 신분, 남녀를 불문하고, 상호 연대하여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까지 만세운동의 행렬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 만세운동의 구체적 사례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 보면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다. 밀양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윤수선과 윤차암, 강덕수, 박소수 등이 주인공인데, 이들은 당시 14~15세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 황정수, 김호용, 박칠성 등도 15~16세의 나이로 독립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어린 학생층 참가를 보여주는 밀양 윤차암·박소수·강덕수 등의 판결문(일부)

어린 학생층 참가를 보여주는 밀양 윤차암·박소수·강덕수 등의 판결문(일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 CJA0001696)

사례1
화살표 아이콘윤차암 외 6인 판결문(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 CJA0001696
태극기아이콘사례 1. 어린 학생들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밀양 윤차암(尹且岩) 등의 판결문(일부)
대정 8년(1919) 4월 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갔을 때 윤수선(尹秀善)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 강덕수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 박소수도 이에 동의하였다. …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武安) 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丁)의 도로를 열어 지어 걸었다.

밀양 표충사 승려(僧侶)였던 이장옥(李章玉, 27세)은 동료들과 함께 약 1,500명의 군중을 독려하여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기독교 장로파 영수(領袖)인 윤영복(尹永福, 26세)은 신도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영일 덕성리 장날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이끌었다. 통영의 기생조합(妓生組合) 기생 정막래(丁莫來, 21세)와 이소선(李小先, 20세)은 금반지와 금비녀 등을 팔아 같은 복장차림으로, 수천 명이 나선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탰다. 식민지 법원은 정막래에게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사례2
화살표 아이콘이찰수 외 4인 판결문(대구복심법원) / CJA0000753
태극기아이콘사례 2. 밀양 표충사 승려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장옥(李章玉) 등의 판결문(일부)
피고 이장옥(李章玉)은 … 약 1,500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세우고 각자 태극기를 본뜬 작은 깃발을 세게 흔들고 나팔을 불고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외치고, 피고 4명으로 하여금 군중과 함께 태룡동 헌병주재소로 쇄도하게 하고 피고, 이찰수, 오학성, 손영식, 김성흠은 피고 이장옥의 지휘, 권유에 응하여 위와 같이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 위 헌병주재소에 쇄도하여 군중을 솔선하여 함께 그 주재소의 사무실 및 숙사(宿舍)를 향해 돌을 던짐으로써 소요의 기세를 도운 것이다.
사례3
화살표 아이콘정막래 외 1인 판결문(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 CJA0002201
태극기아이콘사례 3. 통영 기생단의 독립운동을 이끈 정막래(丁莫來) 등의 판결문(일부)
기생 조합소(組合所)에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 모아 피고들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을 권유하여 그 동의를 얻어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하고, 피고 막래(莫來)는 가지고 있던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장용(喪章用) 핀과 초혜(草鞋)를 사서 이를 다른 기생에게 나누어 주며 같은 복장을 하게 한 후 기생 조합소에서 동일 오후 3시 반경, 통영면 부도정의 시장으로 행렬을 지어 걷기 시작하고 피고 2명은 경찰관의 제지에 응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이 외에도, 청송의 조병국(趙柄國, 37세)은 화목동시장 독립운동에 말을 타고 군중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경북 영해의 서삼진(徐三辰, 29세)은 자전거를 타고, 앞뒤에서 군중의 만세운동을 지휘했다. 남원 덕과면장 이석기(李奭器, 41세)는 식수기념일(4월 3일)에 만세운동 취지서를 관내 면장들에게 보내는 한편, 800여 명이 참여한 시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동 적량면장 박치화(朴致和, 40세)는 면장직을 사직하고, 하동 읍내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사례4
화살표 아이콘조병국 판결문(대구복심법원) / CJA0000747
태극기아이콘사례 4. 말을 타고 시위 군중을 독려한 청송 조병국(趙柄國)의 판결문(일부)
피고 조병국(趙柄國)은 일한병합을 혐오하여 전부터 구한국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던 중 조선 각지에서 조선독립에 관한 시위운동이 개시되고 있음을 기회로 '대한독립만세'라 기재한 구한국 국기를 휴대하고 말에 올라 거주지면 화목동 시장으로 향하여 대정 8년 3월 27일 오후 5시경,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화목동 시냇가에 이르자 연도에 각지에서 피고를 따라온 200~300명의 군중에게 여러 번 한국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위 군중에게 이를 따라 부르게 하였고, 다시 위 군중을 인솔하여 동 시장을 향해 행진하여 치안을 방해한 사실이 있는 자이다.
사례5
화살표 아이콘이석기 외 5인 판결문(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 CJA0001887
태극기아이콘사례 5. 남원 덕과면장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석기(李奭器) 등의 판결문(일부)
피고 이석기(李奭器)는 면장의 명의로 면내 각 구장에게 4월 3일 식수기념일이므로 각 집집마다 반드시 한명씩 내보내 덕과면 신양리 뒷산 도화곡(桃花谷)으로 모이라고 통보하였다. 4월 3일 신양리 뒷산에 모인 조선인 800명에게 식수를 마친 후에 일동이 탁주를 마시고 흥이 오를 때를 살피어 피고들 중에서 솔선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피고 이풍기, 동 이승순은 대중에 솔선하여 이에 가담하여 군중을 선동하며 따라 부르게 하였다. 출장 온 헌병으로부터 제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군중을 교사(敎唆)하여 만세를 외치게 하며 오신(梧新) 헌병주재소 방면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남부지역에서 전개된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했다. 주도자들은 사전에 「독립선언서」, 「격문」, 「경고문」, 「권유문」 등을 인쇄·배포하거나 공공장소에 붙였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만세운동 장소 근처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만세운동 당일, 일반 군중, 학생 등을 대상으로 태극기 배부, 독립 연설로 이어져 독립만세의 의지가 한껏 고조되었고, 깃발을 앞세운 행렬과 나팔을 불거나 징소리를 울려 시위의 분위기가 불타올랐다.

사례6
화살표 아이콘김동훈 외 10인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 / CJA0002050
태극기아이콘사례 6. 국기를 제작하여 해남장날 만세운동을 이끈 김동훈(金東勳) 등의 판결문(일부)
피고 김동훈은 자택에서 구한국 국기를 제작하기 위해 문장(紋章)을 목판으로 한 후 같은 국기 15개를 제작했다. 동월 5일 피고 김동훈은 자택에서 피고 김경두(金璟斗)에게 위와 동일한 계획을 말하여 그 동의를 얻은 후 구한국 국기 400개를 제작했다. 동월 8일 피고 동훈은 피고 김흥봉(金興鳳)에게 오는 11일 해남(海南) 장날을 이용하여 해남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도모했는데 동인은 이에 찬동하고 동월 10일 구한국 국기용으로 당목 3척을 동훈에게 교부했다. … 동월 11일 오전 9시경 동훈은 위와 같이 제작해 둔 당목으로 만든 구한국 국기 6개, 종이로 만든 것 약 800개를 동면 본정(本町) 천병유(千炳有)의 집 뒤뜰로 운반하여 감추어 두고 …
사례7
화살표 아이콘이강석 외 1인 판결문(대구복심법원) / CJA000743
태극기아이콘사례 7. 김해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의 판결문(일부)
피고 이강석, 최현호는 대정 8년(1919) 4월 원심 공동 피고인 김종훤(金鍾烜), 김승태(金升泰)가 조선독립의 희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함께 3월 12일을 기하여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운동을 할 계획에 참여하여 분담하여 위의 주소지 경남 김해군 장유면의 주민에게 위의 시기와 장소에서 시위운동을 결행하니 참가해 달라고 주민을 선동하여 약 2,000명의 찬동을 얻자 위의 피고들은 솔선하여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북을 치며 나팔을 불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무계리 내를 행진하는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국기를 제작하여 해남 장날 만세운동을 이끈 김동훈·이형춘 등의 판결문(일부)

국기를 제작하여 해남 장날 만세운동을 이끈 김동훈·이형춘 등의 판결문(일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 CJA0002050)

이처럼, 독립운동의 기세가 활발했던 것은 다양한 참여층의 굳건한 의지 때문이었다. 교사와 학생은 물론 승려, 목사, 관료, 농민, 노동자, 상인, 수공업자, 기생 등 연령과 신분을 떠나, 모두가 3·1운동 현장의 주인공이었다.

지역별 독립운동의 발화점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이었다. 물론 독립운동 주인공들은 사전에 충분한 논의를 하였고, 지역 장날에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이렇게 시장에서 시작된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일제 지배당국의 상징건물이었던 경찰서, 주재소, 군청, 우체국, 면사무소, 학교 등에 독립의 의지를 당당히 밝혔다.
이 외에, 산상(山上)과 들판, 포구, 역 광장 등에서도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밤늦게까지 계속된 산상(山上)의 독립운동은 거의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시위 군중은 마을 뒷산의 봉화(烽火) 신호에 따라, 횃불을 밝혀 만세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한편, 열차에 탑승한 승객을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은 특이한 사례로 주목된다. 경북 청도의 단산서당(丹山書堂) 학생이었던 이승덕(李承德, 18세), 최갑수(崔甲壽, 20세) 등은 경부선 열차에 승차한 군중들을 대상으로 철길 옆 나무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철도변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청도 이승덕·성삼백·최갑수 등의 판결문(일부)

철도변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청도 이승덕·성삼백·최갑수 등의 판결문(일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 CJA0000745)

사례8
화살표 아이콘이승덕 외 4인 판결문(대구복심법원) / CJA0000745
태극기아이콘사례 8. 철도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 청도 이승덕(李承德) 등의 판결문(일부)
피고 이승덕(李承德)은 조선 각지에서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조선독립의 희망을 달성하고자 대정 8년(1919) 3월 31일 자택 경상북도 청도군 대성면 거연동에서 백지에 태극장을 그리고 그 옆에 '대한독립만세'라고 글자를 쓴 국기 1매를 제작하여 동일 거연동을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 선로 옆 나무에 걸었고 … 4월 20일 밤 거연동 단산서당에서 각자 태극기 1개를 작성하여 위와 동일한 장소의 나무에 걸어 치안을 방해하였다.

이번에 소개한 판결문 외에도, 독립운동 판결문 관련 원문과 번역문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 「독립운동 관련 컬렉션」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인명은 물론 지역별·죄명별로 검색이 가능하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이번 자료집은 "남부지역 3·1운동의 구체적 전개 양상과 다양한 참여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을 담고 있으며, "특히 광복 70년을 맞아, 독립을 향한 강한 민족적 의지와 단결력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