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중앙집권국가 조선에도 지방관청 서울사무소 성행
『조선왕조실록』 - 부작용 많아 폐지 검토했으나 무산
전국 각지의 세종사무소

올해는 지방자치가 본격 실시된 지 20년째 되는 해이다. 1991년 지방의회가 출범했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1995년 6월 27일 지방선거가 본격적인 지방자치제도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기대에도 불구,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중앙집권적 국가 운영과 사고, 취약한 지방재정, 자치의식 결여 등에 대한 우려가 컸고, 실제로 시행착오도 많았다.
서울특별시와 수도권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자체 재정자립도가 50%를 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농촌 시·군은 공무원 인건비조차 자체조달하지 못하는 등 아직 넘어야 할 산도 있지만, 길지 않은 역사에도 민주주의 발전과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이다.
주민밀착형, 지역특성을 고려한 주민밀착형 자치행정 기반이 조성되면서 지자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크게 늘었다. 예산안이 처리될 때면 정부 부처와 국회 앞에 진을 친 지방공무원들의 긴 행렬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되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권한과 업무가 지자체로 대폭 이관되면서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에 따라 광역시·도는 물론 기초자치단체까지 서울사무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지자체 서울사무소는 중앙부처와 협력관계 유지, 주요 정책정보 수집, 국회의원과 우호적 관계 구축, 기업투자 유치, 지역특산품 홍보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앙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세종사무소까지 개설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서울과 거리가 먼 강원도, 제주도, 광주광역시, 전남도, 경북도 등은 이미 세종사무소를 개설·운영하고 있으며, 부산광역시와 충북도는 교통편의를 고려하여 세종시 관문격인 KTX 오송역 앞에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기초단체로는 충남 당진과 경기 수원이 세종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여러 기초단체가 사무소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지방이 국가경쟁력인 시대를 맞아 지자체들이 지역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서울과 세종에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고도의 중앙집권체제이던 조선시대에는 왜 현(縣)까지 서울사무소를 두었을까.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다.
요즘의 지자체 서울사무소 격인 경저(京邸)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까지 운영되었는데, 현재의 서울사무소와 기능과 역할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현재는 예산확보나 투자유치, 지역특산품 홍보 등이 주요 업무인 반면, 조선시대 경저는 공물(貢物) 납부, 선상노(選上奴, 지방관아에서 뽑아 중앙부처에 보내는 노비) 충원, 연락 등이 주요 임무였다.

『성종실록』 4권 1470년 3월 17일 세 번째 기사는 형조에서 경저관리에 관한 문제를 건의한 것으로 여러 고을의 경저리(京邸吏, 서울에 주재하며 지방관청 업무를 대행하는 말단 실무자)는 공물 납부, 선상노 충원 외에도 업무가 많은데 여러 기관에서 관리를 보내 괴롭히며 독촉하고 심지어는 볼기를 치는 경우도 많아 경저리들이 도망치고 있으니 지방관청 관련 기관 외에는 경저에 관여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경저리는 경주인(京主人)이라고도 불렀는데 신분은 평민으로 벼슬아치가 아닌 지방관청 관리의 보조업무를 담당하는 하급 실무자인 구슬아치였다. 조선 중기부터는 자신이 소속된 지방수령의 인사 청탁이나 공물대납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중앙부처 관리들에게 매를 맞거나 괴롭힘을 당했으며 소속 관아 수령에게 맞아 죽기까지 했다.
『중종실록』 64권 1529년 1월 13일 네 번째 기사는 사관 최연(崔演)의 실수로 발생한 해프닝을 다룬 내용이다. 장성현감 윤규가 경저리가 일을 잘 못 처리했다고 마구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헌부(憲府)가 이 사건을 보고하자 임금이 "고을의 수령이면 소속 아전을 때려 죽여도 무방하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문이 퍼져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곤장을 맞는 그림

졸지에 폭군이 된 임금이 전말을 자세히 밝히도록 지시했는데, 조사 결과 승지가 "고을의 수령이 아전을 꾸짖고 심한 경우는 매를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판결을 "때려 죽여도 무방하다"로 사관에게 전달했고, 사관 최연은 이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경저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지방관아 출장자의 숙식제공으로 경저리들이 출장자와 일정을 함께하다 보니 고을 수령이나 관리들의 비위사건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불려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실록』 78권 1437년 7월 13일 세 번째 기사는 흥덕현감 김상의 착복사건을 다룬 것으로 서울에 살고 있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서둘러 상경하지 않고 관청의 재물을 잔뜩 챙겨 와 집에 감추어 두었다는 소문이 사헌부에까지 전해지자 경저인을 가장 먼저 소환해 수사를 시작했다. 결국 경저인이 범행일체를 진술하는 바람에 김상은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한데 이어 재산몰수와 귀양처벌을 받았다.

경저는 관료들의 숙소뿐만 아니라, 전직 관료나 지역주민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선조실록』 12권 1578년 4월 1일 세 번째 기사는 율곡 이이선생이 한 달이나 경저에 머물렀다는 내용이다. 당시 율곡은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했다가 위훈(僞勳) 삭제에 대한 임금의 의견을 듣고자 상경해 경저에 머물렀으나 결국 만나지 못하고 귀향했다는 내용이다.
『성종실록』 186권 1485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는 신임 수령들이 참알(參謁, 신임 관리가 소속 관청에 인사하는 관행) 시 지참하는 예물을 경저리들에게 마련하게 한 뒤 부임 후 관청 재산으로 갚고 있다는 내용이며, 『연산군일기』 51권 1503년 11월 6일 두 번째 기사는 집 없는 백성들이 비어 있는 경저를 임대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또한 『명종실록』 8권 1548년 8월 6일 다섯 번째 기사는 서소문 근처에서 화상을 입은 채 버려진 아이가 발견되었는데, 가장 가까운 강령 경저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치료하라는 내용이며, 『광해군일기』 145권 1619년 10월 30일 첫 번째 기사는 3개 도 감사의 인사발령이 4개월이나 미뤄지는 바람에 이들을 모시기 위해 경저에 대기 중인 역졸과 말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며, 역마는 이미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인사를 서둘러 달라는 승정원의 건의이다. 이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각 고을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조정에서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

경저리들에게 궂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조실록』 43권 1467년 7월 5일 두 번째 기사는 경저노(京邸奴)의 면천에 관한 내용이다.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세조는 은성 경저노 기금, 경성 경저노 몽총, 경원 경저노 개지 등을 사정전으로 불러 군사와 백성들을 효유(曉諭,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하는 어찰을 자신이 소속된 고을에 전달하도록 했다. 이들 중 함흥 경저노 성언, 이성 경저노 우행이 어찰을 제대로 전파, 난을 진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확인되어 면천의 영예를 얻었다.

고려시대부터 경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공물(貢物)의 보관과 납부였는데, 지방관아 관리가 가져 온 공물을 경저에서 빼돌리거나 경저리가 자기 고을의 공물을 대납한 뒤 2~3배를 받아내는 수법이 성행하여 조정이 골머리를 앓았다.
『세종실록』 128권 1449년 12월 6일 두 번째 기사는 공물횡령과 관련하여 경저를 수색하자는 내용이다. 이날 사헌부는 각 도의 배전차사원(특별한 임무를 위해 관찰사가 차출한 관원)이 면포를 부과한 양 보다 많이 징수해 와 빼돌리고 있어 각 관아의 경저를 수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임금이 풍문만 듣고 국문을 하는 것은 안 된다며 수색을 불허하자 사헌부는 이미 문서를 확인했다며, 수색을 통해 서류상 물량과 대조해 볼 것을 주장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임금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아 무산되었다.
『중종실록』 17권 1512년 11월 4일 첫 번째 기사는 영사 유순정이 경저문제에 관하여 보고한 것이다. 조강이 끝나자 유순정은 각 고을이 경저에서 공물을 봉납하게 한 뒤 백성들에게는 2~3배를 거두어들이고 있어 생활이 날로 궁핍해져 가고 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히 아니라 방납자(防納, 하급 관리들이 세금을 대신 납부하고 추후 백성들에게 받아내는 행위)가 개입해 부당이익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선상노(選上奴)의 경우도 각 고을이 경저에 노비 대신 돈으로 낼 것을 독촉하는 바람에 경저리들이 돈을 빌려 납부한 뒤 노비들에게 (돈으로 납부하여 공역을 면한) 2배 이상의 원리금을 요구해 이를 감당하지 못한 가족들이 도망가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인사철이 되면 각 고을 수령들의 인사활동 근거지로도 이용되었다. 『예종실록』 1권 1466년 10월 19일 세 번째 기사는 분경(奔競, 관료들이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벌이는 인사활동)한 관료를 적발한 내용이다. 이날 의금부는 임금의 지시로 권문세도가들의 사가를 급습하여 고령군 신숙주의 집에서 경상도 관찰사 김경광이 보낸 김미를, 우의정 김질의 집에서는 김경광이 보낸 상주 경저리 주산을, 귀성군 이준의 집에서는 영유 경저노 내은달 등을 체포했다. 이어 임금은 분경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사헌부 지평 최경지를 의금부에 구금토록 했다. 이날 네 번째 기사는 이들을 조사한 내용인데, 경저리들이 분경사실을 부인하여 구체적인 범법행위는 밝혀내지 못했다. 이틀 후인 21일 첫 번째 기사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찾지 못하자 화가 난 임금이 각 도의 관찰사, 절도사, 도사, 평사는 경저리를 거느리지 못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화백 신윤복의 박어을우동 그림

지방관아 소속이다 보니 아무래도 관리감독이 소홀하여 온갖 비위가 잦았다. 조선 최고의 스캔들 어울우동도 경저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실록』 122권 1480년 10월 18일 다섯 번째 기사는 어울우동의 간통행적을 조사한 내용이다. 은장이(銀匠)와 간통이 드러나 남편에게 쫓겨난 어울우동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애정행각에 나서는데, 사헌부 관리 오종년을 시작으로 육촌 시아주버니인 방산수(종친에게 부여하는 명예직) 이난, 팔촌아주버니 수산수 이기 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울우동이 먼저 유혹했는데, 왕실 종친인 수산수 이기는 먼저 유혹한 경우이다. 단옷날 도성 서쪽으로 산책을 나온 이기는 그네뛰기를 구경하고 있던 어울우동에게 한눈에 반해 남양 경저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날 조서에는 불륜장소로 왜 남양 경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어 알 수 없고, 눈치 빠른 경저리가 공연히 왕실 종친의 비위를 거슬러 화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경저를 내어주고 줄행랑을 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도 경저를 둘러 싼 온갖 추문이 많았다. 『단종실록』 3권 1452년 9월 11일 두 번째 기사는 사관 금이영이 국상 중에 기생 홍루월을 고령 경저로 불러

사통하려다 이웃 집 여자에게 적발되어 징계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며, 『세조실록』 25권 1461년 7월 21일 첫 번째 기사는 윤오가 여러 차례 경저에 기생과 투숙하였는데, 이를 처벌하지 않고 평안도 채방별감으로 발령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종실록』 91권 1478년 4월 7일 두 번째 기사는 전국에 흙비가 내려 금주령이 내려졌는데도 일부 경저에서 기생과 광대까지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며, 『중종실록』 60권 1535년 10월 16일 첫 번째 기사는 영주군수가 경저리에게 영주 출신 죄인의 옥바라지를 하게 한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저에서 발생한 수 없이 많은 사건사고와 비위행위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경저가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던 것은 부작용도 많았지만, 그 보다는 순기능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넉넉하지 못한 재정형편 때문에 예산을 쪼개어 어렵게 서울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더 많은 예산확보와 투자유치를 통해 지역발전과 주민복리 증진,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