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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대 1인 시위부터 선상시위까지 거국적 전개
3·1 만세운동 전국 확산, 지역특성 따라 다양한 전개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헌병대 주재소 1인 시위부터, 철도변 보통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기차를 향한 만세, 도서지방의 선상 횃불시위까지 지역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 거국적 민족운동임이 거듭 확인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행정자치치부 국가기록원이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Ⅱ(경상·전라지역편)를 발간하는 과정에서 사건별 판결문과 그간의 연구결과를 시·군별로 정리하면서 밝혀졌다.
그동안 국가기록원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된 판결문은 한자와 일본어로 작성되어 성명이나 형량 등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일반인들이 형량 주문이유 등 활동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처럼 3·1만세운동은 철도를 따라 전파되기 시작해 3월 중순 이후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독립선언서를 낭독·배포하고 만세를 부르는 방식에서 지역특성과 일제의 탄압방법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단독으로 일본군 헌병분견대에 뛰어 들어가 만세를 불러 헌병을 놀라게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최무길의 판결문

최무길 판결문 : 단독으로 일본군 헌병분견대에 뛰어 들어가 만세를 불러 헌병을 놀라게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최무길의 판결문

지방으로 확산된 3·1만세운동은 장날, 장례식장, 면사무소, 식목 행사장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는데, 4월 5일 경상북도 김천군 조마면 신안동 최무길은 단독으로 김천면 대화정 일본군 헌병분견대 구내로 뛰어 들어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헌병들을 놀라게 했다.
감시가 강화되어 군중집회가 어려워지자 열차 승객을 대상으로 한 만세운동도 많았다. 전라선 오수역 인근에 위치한 오수공립보통학교 1~4학년 학생들이 3월 10일 오전 10시부터 쉬는 시간을 이용해 철도를 향해 도열해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듣고 다시 외치기를 반복했다. 3월 16일 저녁 9시쯤 전라남도 광주 송정면 송정역에서는 주민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때 마침 도착한 목포행 열차 승객들과 만세운동을 벌였다. 3월 26일 익산역에서도 일본군이 보병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인근지역 왕래를 감시하자 목포행 열차승객과 만세운동을 했으며, 3~4월까지 경북 청도에서는 서당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경부선 철도 옆에 태극기를 세워 열차 승객을 대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전북 익산 야산에서 횃불시위를 주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고총권의 판결문

고총권 판결문 : 전북 익산 야산에서 횃불시위를 주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고총권의 판결문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이를 이용한 산상 봉화와 횃불시위가 많았다. 3월 10일 전북 익산에서는 산상 횃불시위를 주도하던 고총권이 거사 전에 체포되었음에도, 시위계획을 전해 들어 알고 있던 주민들이 각자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15일 경북 의성에서는 100여명이 대사동 뒷산에서 저녁 7시부터 시작해 늦은 시간까지 계속하다 해산했으며, 16일 전북 태인읍에서는 10여 일간 계속했고, 20일 순창에서는 200여명이, 24일 경북 고령 개령면 동부동에서는 마을 유지부터 머슴까지 전 주민이 4월 6일까지 4차례 산상 시위를 했으며, 25일 전남 장성에서는 읍내 뒷산 정상에 봉화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각 면이 일제히 봉화를 올려 만세운동을 했으며, 28일 전북 금산에서는 서대산 봉화를 신호로 각 마을에서 일제히 시작했으며, 4월 1부터 여러 마을이 산상에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동시에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2일 경북 성주에서는 서북방쪽 산상에서, 4일 전북 남원에서는 교룡산 봉화를 신호로 각 마을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는 기습적인 야간시위를 계속하여 일본 경찰도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
3월말 이후 도서지역까지 확산되면서 어부들의 선상시위가 크게 일었다. 3월말부터 4월초까지 전남 무안에서는 야간을 이용하여 육지에서는 산상에서, 바다에서는 어선들이 일제히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선상시위를 수차례 펼쳐 일본 경찰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으며, 4월 16일 고흥 금산도에서도 어선들이 태극기를 높이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해상운동을 벌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탄압이 무자비해졌지만,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 대한독립을 외쳤다. 4월 4일 전북 익산에서는 1,000여 명이 집결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날 만선교회 교인이던 문용기는 무력탄압에 나선 일본군에게 두 팔을 잘리고도 독립만세를 외치다 온 몸을 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했다. 같은 날 남원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8명이 순국했는데, 그 중 한명인 방극용의 아내가 소식을 듣고 빨래방망이를 들고 일본군을 공격하다 희생당했다.

경남 통영에서 기생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한 정막래 판결문

정막래 판결문 : 경남 통영에서 기생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한 정막래 판결문

3월 18일 경남 진주에서 학생들을 중심을 악대를 앞세운 만세행렬이 가두행진을 벌이자 군중이 3만 명이나 뒤를 따랐으며, 이날 저녁에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독립단', 걸인들의 '걸인독립단'이 가세했고, 다음날에도 악대가 선두에 서자 5,000천여 명이 봉기했고, '기생독립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벌였다. 대규모 만세운동이 장날 일어나자 일본 경찰의 감시가 장날에 집중되었다. 3월 28일 전북 금산에서는 상인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평소와 다름없이 상점을 열었다가 오후 늦게 철시하는 도중 시위를 벌여 군중의 호응이 컸으며, 4월 6일 경남 동래에서는 농민 500여명이 장꾼으로 위장해 좌천리시장에 집결해 만세운동을 했다.
이밖에 3월 17일 경북 안동 예안읍에서는 일본 군경 3명을 무장해제 시킨 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게 했으며, 4월 13일 전북 진안 구마령시장에서도 일본인 경찰이 손을 든 채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는 진풍경을 보였다. 5월 들어 전북 남원에서는 6명의 면장과 7명의 면서기가 사직원을 제출하는 것으로 시위하는 등 전 민족이 나름의 방식으로 3·1 만세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