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조약문(서울시 무형문화재 109호)
지난 6월 6일은 현충일이자 조영수호통상조약 조인 133년이 되는 날이었다. 1882년 이날 제물포(인천)에서는 청나라 마건충의 알선으로 조선 전권대사 조영하, 부관 김홍집이 영국 윌리스(George. R. Willes)와 조영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을 가졌다. 아쉽게도 이날 조약은 영국이 비준을 거부해 다음해 11월 다시 체결되었지만, 이날 이후 지금까지 양국은 오랜 우방으로 관계를 돈독히 해오고 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영향으로 영국하면, 1883년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가 담긴 불평등 조약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1885년 4월 15일부터 약 2년여 간 거문도를 무력으로 점거했던 거문도사건을 먼저 떠올리기 쉬운데, 조선과 영국의 인연은 이보다 67년 전인 18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실록』 38권 1793년 10월 28일 세 번째 기사는 의주부윤 이의직이 헌서재자관(문서 수령 등을 위해 파견하는 연락관)의 보고서를 조정에 아뢰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영길리국(英吉利國, 잉글랜드의 음역)은 광동(廣東)의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 1763년 조공을
바쳤는데, 올해 또 19종의 조공을 가져 왔다는 것으로 19종의 진귀한 물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영국이 처음 소개된 대목이다.
조선과 영국인의 첫 만남은 충청도 마량진 갈곶(葛串)에서 이루어졌다. 『순조실록』 19권 1816년 7월 19일 두 번째 기사는 충청수사 이재홍의 이양선(異樣船) 두 척에 관한 보고이다. 이재홍 수사는 14일 아침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왔다고 보고해 이들을 대동하고 이상한 모양의 배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문도 모르고, 언문도 모른다며 손만 내저을 뿐이고, 그들이 쓴 글도 전서체 같으면서도 전서가 아니고, 언문과 비슷하면서도 아니어서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결국, 필답 시도에 이어 손짓발짓도 포기하고 그들이 쓴 모자의 생김새부터 옷과 신발은 물론, 단추 모양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선원은 8, 90여 명으로 행전(行纏)처럼 좁고 길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가는 하의를 입었다며 생전 처음 보는 서양식 바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사가 끝날 무렵 때마침 서북풍이 불자 돛을 올려 서남쪽 연도 (煙島) 바깥 바다로 빠져 나갔다. 이날 이재홍 수사 일행은 세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중 한권에 영길리국이라는 표기가 있어, 그나마 표류해 왔던 이양선이 영국 배였음을 알았다.
조선이 영국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충남 홍주 고대도 뒷 바다에 정박했던 이양선에 관한 조사였다. 『순조실록』 32권 1832년 7월 21일 네 번째 기사는 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의 보고로 양측의 진지함과 천재성이 번득이는 한·영 외교사에 길이 남을 기록으로 여겨진다.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모를 이상한 범선이 정박 중인데, 영길리국 배라는 말이 있어 홍주목사 이민희와 수군우후 김형수를 보내 조사하려 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으로 보아 1816년과는 달리 중국어 또는 한자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1명 이상 탑승했고, 나름 많은 준비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고서는 조사경위, 영길리국 개요, 배의 구조와 모양, 탑승인원과 용모, 선적물품, 영길리국과 청나라의 관계 및 대외 교역현황, 그간의 이양선 출몰현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길리국 측은 자신들의 국명을 밝힌데 이어 선원들은 난돈(蘭墩, 런던의 음역)과 흔돈사단(欣都斯担,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힌두스탄의 음역 추정) 출신이다. 영길리국(英吉利國, 잉글랜드의 음역). 애란국(愛蘭國, 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 스코트랜드)을 합쳐 한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대영국(大英國)이라고도 하며 왕은 위(威) 씨이다. 누가 랜드(Land)를 난국(蘭國)으로 음역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발음이나 뜻이 그럴듯하다. 영국의 왕을 위 씨라고 밝힌 부분도 흥미롭다. 1832년은 윌리엄 4세(1830~1837년 재위)가 즉위한지 3년째가 되는 해로 아마도 첫 음인 윌과 가장 유사한 한자음을 따 위 씨로 표기한 것 같다. 국토는 산이 많고 물은 적은 편이나 오곡이 잘 자라며, 북경까지 육로는 4만 리, 바닷길로는 7만 리이며, 조선과의 거리도 7만 리인데, 법란치, 아사라, 여송, 지리아를 지나야 도착할 수 있다.
배의 모양과 구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오이를 쪼개놓은 것처럼 선수와 선미가 뾰족하고 재료는 이목(桋木, 멧 추나무)과 삼나무에 쇠못을 박았으며, 상층과 중층으로 구성되었고, 염소, 닭, 돼지 등을 키우는 우리, 좌우에 매달린 급수선 4척, 전·중·후 돛대 등을 갖추고 있으며, 무장으로 칼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 8좌를 싣고 있다.
탑승자 명단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주 4품(品) 자작 호하미(胡夏米), 6품 거인(擧人, 관료 등용시험 합격자)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 등 총 67명의 직책과 이름인데, 심손(心遜, 심슨)과 약한(若翰, 요한)처럼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는 이름도 있지만, 노도고, 미사필도로, 행림이, 가파지처럼 가늠조차 어려운 이름이 대부분이다. 한글로 옮겼다면, 거의 원음에 가까웠을 텐데 한자음을 차용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임홍파, 오장만 같은 정체불명의 이름을 남겼다.
용모와 복장에 대한 기술도 표현력이 돋보인다. 더러는 분을 발라놓은 것처럼 희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은데, 머리는 박박 깍은 자도 있고 정수리까지는 깎고 정상은 머리를 땋아서 늘어트린 자도 있다. 상의는 두루마기처럼 생긴 것을 입기도하고, 소매가 좁은 옷에 붉은 띠를 두르기도 했는데 작위가 있는 자일수록 무늬가 선명하다. 이밖에 신발이나 단추 등에 대한 기술과 함께 선장 호아미의 복장에 대해서는 더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유리그릇) 5백개, 초(硝, 유리나 화약제조에 쓰이는 화학원료) 1천담, 화포(花布) 50필 등 은화로 환산하면 8만 냥 상당이다.
이 보고서는 영국의 풍속 및 국가 규모와 관련, 국민들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 예수교)를 믿으며, 중국과는 2백 년 전부터 교역하고 있는데, 국가 규모와 권세가 청나라와 비등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며, 북경에 가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교역국으로 우라파국, 법란서국, 아임민랍국, 자이마미국, 파이도사국, 아비라기국 등 조선 관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국가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 아프리카) 극남단, 태평양 남쪽 바다에 있는 허다한 땅, 아서아(亞西亞, 아시아) 끝자락에도 섬들이 많은데 모두 속국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832년 7월 21일 공충감사 홍희근의 보고서는 6월 25일에 있었던 이양선과 함께 같은 해 2월 20일과 7월 21일에 있었던 이양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2월 20일 이양선에 대한 기술에는 입항한 포구와 배의 국적 등을 별도로 표기하지 않았는데,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왔다는 내용으로 보아 피항의 성격이 큰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자신들이 가져 온 양포(良布), 대니(大呢), 우모초(羽毛綃), 유리기(玻璃器), 시진표(時辰表) 등과 금, 은, 동과 대황 등의 약재를 교환하자며, 교역이 성사되면 조정에는 별도로 대니 4필, 우모 5필, 양포 14필 천리경 2개를 내겠다고 제안했다는 내용이다.
7월 12일에는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서산 간월도를 지나 태안 주사창리 포구에 들어와 이 마을 백성들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책자 4권을 던진 뒤 배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에 고대도 문정관(問情官)이 그들 배에 가서 물으니 자신들이 책을 놓고 온 것이 맞다며 식량, 반찬, 채소, 닭, 돼지 등을 요청하여, 소 2두, 돼지 4구, 닭 80척, 절인 물고기 4담, 채소, 생강, 파뿌리, 술, 담배 등을 주었다는 것이다.
요청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물품을 공급 받은 이들은 주문(奏文, 임금에 아뢰는 글) 1통과 예물 3봉을 주며 조정에 올려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거절하자, 이를 던지고 책자 3권과 예물목록 2건을 더 주었다. 때마침 이곳에 내려와 있던 별정역관(別定譯官) 오계순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보고서에 의하면 예물을 돌려주려 했으나 거절하여 며칠이나 실랑이를 벌이다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갑자기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남겨 놓고 간 예물은 목록과 함께 잘 보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궁벽한 어촌에서 요청한 것보다도 더 많은 물품을 선뜻 내어준 조선 관료들이나, 굳이 안 받겠다는 예물을 억지로 던져놓고 도망치듯 떠나간 영길리국 교역선의 깊은 속내는 알 수 없으나, 요즘의 잣대로 보면 선 듯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날 보고서는 홍주목사 이민희와 공충수사 이재형, 우후 김형수의 파직을 요청하는데, 사유는 문정을 지연시키고 잘못된 처리로 일을 그릇 친 혐의로 임금은 이들의 파직을 윤허했다.
같은 해 11월에도 영길리국 배가 해안가를 순찰했으나 수사(水師)들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순조실록』 33권 1833년 4월 2일 첫 번째 기사는 전년도에 출현했던 이양선에 관한 보고이다. 동지사서장관 김정집이 지난해 11월 10일 개주에 영길리국 배가 나타나 순찰을 하고 돌아갔으나 수사들이 이를 즉시 쫓아 내지 못해 좌령 서사빈 등 5명을 파직하고 다른 고을에서도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
헌종 6년인 1840년 12월에도 제주도 대정현 모슬포에 영길리국 배 2척이 들어와 포를 쏘고 소를 빼앗는 난동을 부렸으나 이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1832년 6월과 7월에 서해안에 정박했던 영길리국 배처럼 적극적으로 통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와 영국은 올해 6월 5일 한·영 재무장관이 만나 회의를 갖고 2020년까지 교역규모를 2배로 늘리자는데 합의했다. 한때 불평등 조약과 무력점거의 불편한 관계도 있었지만, 손짓발짓으로 인연을 맺은 지 180여 년이 지나면서 한해 교역규모가 130만 달러를 넘는 파트너가 되었다. 이 같은 규모는 유럽 내 2위의 교역국이며, 우리나라는 영국이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국가이다.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