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소개된 '삼둥이 달력' ⓒ 옥션
최근 KBS-2TV 육아예능프로그램인 「슈퍼맨이 돌아 왔다」가 공중파 방송사들이 사활을 걸고 벌이는 주말 시청률 경쟁에서 연이어 1위를 차지는 하는 등 인기몰이를 이어 가고 있다. 지난 2013년 11월 정규방송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주말 예능의 대세이던 육아 프로그램들이 시들해진 시기에 방송을 시작해 초반에는 부진을 면하지 못했으나 점차 인기를 더해 지금은 주말예능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많다. 물론, 매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 프로그램의 장점 때문이지만, 사회심리적인 측면에서 이유를 찾는 경우도 있다. 심각한 취업난으로 연애·결혼·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한 젊은이들을 ‘삼포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이 이 육아와 쿡방(요리 프로그램을 일컫는 신조어)을 통해 결혼과 출산의 대리만족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랜선맘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TV 육아프로그램 여성시청자들이 자신들을 랜선맘이라고 부르는데, 공중파 TV를 통해 본방송을 보기 보다는 근거리 통신망(LAN : Local Area Network)를 이용한 케이블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반복해 시청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랜선맘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SNS 프로필 사진으로 쓰는 것은 기본이고, 탁상용 달력, 사진첩 등으로 장식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들 모습만 따로 모아 편집한 속칭 엑기스파일을 열어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을 정도이다.
극성 시청자 차원을 넘어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언론은 자신이 실제 엄마인 것처럼 감정이입하는 지나친 몰입, 미래에 태어날 자신의 아기가 저 아이들 보다 예쁘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괜한 걱정, 방송에 비치는 화려한 육아생활과 자신과의 차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등을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꼽았다.
이처럼 신드롬으로 불린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인의 자녀들인데다 한결같이 예쁘고 사랑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그맨 이휘재의 쌍둥이와 영화배우 송일국의 삼둥이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에도 세 쌍둥이는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쌍둥이는 흔한 일이어서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지만, 세 쌍둥이 이상은 임금이 직접 하사품을 내릴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삼국유사 제2권에는 670년 1월 7일 한지부(漢岐部) 일산급천(一山級千)의 종이 네 쌍둥이를 낳아 나라에서 곡물 200석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세 쌍둥이 이상이면 구분 없이 쌀과 콩 10석을 임금이 하사했다. 쌀 10석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10여 만 원으로(20kg 30,000원 기준) 현재 각 지자체가 셋째 이상 자녀 출산 시 지급하는 최저 10만원부터 최고 720만원(강원도 횡성군)과 견주어도 적지 않은 금액이다.
『태종실록』 7권 1404년 5월 5일 네 번째 기사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故 서균형의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인데, 하사품을 내렸다는 내용은 없다. 세종실록 10권 1420년 12월 20일 두 번째 기사는 경상도 언양 이신기의 처가 세 아들을 낳아 쌀을 하사했다는 내용이고, 1236년 6월 2일 두 번째 기사는 쌀과 콩 10석을, 1447년 4월 9일 첫 번째 기사는 쌀과 콩 7석을 하사했다는 기록이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는 지원 금액이 정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53권 1431년 7월 5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과 승지가 세 쌍둥이 지원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다. 경상도 초계군에 사는 사노비 약비가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아이가 죽고 한 아이만 생존했다는 것. 이와 관련, 대언사(代言司, 승정원의 다른 이름)에서는 지금까지는 쌀 열섬을 주었지만, 하나만 살았는데 하사한 예가 없다고 건의했다. 임금은 한태에서 세 아들을 낳으면 현재(賢材)가 많다는 옛 말이 있다. 아이는 죽었지만, 지급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승지 안승선의 반대로 예조에 넘겨져 논의한 결과 5석을 하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쌀 10석으로 규정은 되었으나, 세부사항을 정하고 있지 않아 유권해석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아이 잃은 산모를 위로는 못할지언정,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의 마음씀씀이 치고는 야박했다는 생각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네 쌍둥이 기록도 있는데, 출산지원금은 세 쌍둥이에 준해서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 3권 1546년 2월 8일 두 번째 기사는 원주에 사는 사월이는 아들 셋을, 양산에 사는 명월이는 아들 넷 쌍둥이를 낳았다는 보고이다. 승정원이 지금까지 쌀과 콩 10석을 지급해 왔으니 이번에도 하사해야 마땅하지만, 근래 들어 흉년이 계속되어 비축곡물이 거의 떨어졌으니 감량하여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임금은 그 정도로 국고에 문제가 되겠느냐며 전례대로 할 것을 명했다. 이후에도 네 쌍둥이에 관한 보고는 있지만, 지원 금액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세 쌍둥이와 같이 10석을 지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록에는 세 쌍둥이 출산보고를 모아서 한 경우도 있다. 『광해군일기』 84권 11월 26일 여섯 번째 기사는 함경도에서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보고이다. 함경도 감사가 이를 보고하자 전교하기를 전날 서울에서도 세 쌍둥이를 낳았으니 이 사람과 함께 하사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현종실록』 17권 1669년 12월 27일 여섯 번째 기사는 평안도 박천 김경선의 처가 아들 세 쌍둥이를, 평양 김준일의 처가 2남 1녀를 출산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세 쌍둥이 출산을 한꺼번에 모아서 보고한 사례나 세종이 세 쌍둥이에서 현재(賢材)가 많이 난다는 옛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산 직후뿐만 아니라, 양육 중에도 세 쌍둥이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있으면, 물품을 하사했다. 『인조실록』 42권 1641년 6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경기도 풍덕에 사는 임광의 처가 젖 하나로 세 쌍둥이를 키웠다는 보고를 받고, 전례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도록 해조에 명했다는 내용이다. 여염집 육아문제를 조정에 보고하고 임금이 직접 지원할 것을 지시한 이 대목은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감동적이다.
한 사람이 세 쌍둥이를 두 번이나 출산한 기록도 있다. 『현종실록』 4권 1661년 5월 16일 네 번째 기사를 보면, 충청도 대흥현에 사는 사노비 견옥이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견옥은 갑오년에도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아 잘 키우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보고자는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번 출산도 이변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이날 보고에는 지원내역 등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출산지원금 제도가 완전히 정착해 별도의 기록이 필요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811년 타이에서 남편 창과 부인 엥 사이에서 가슴과 허리 부위가 붙은 아들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 형제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영국 상인에 발견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당시 타이의 명칭이 샴이어서 이때부터 몸의 일부가 붙어서 태어난 쌍둥이를 샴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보다 앞선 1667년 샴 쌍둥이가 태어났다. 『현종실록』 13권 3월 10일 다섯 번째 기사는 통진현에 사는 사노비 사옥이 딸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중 둘이 배가 붙은 채 태어났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쌍둥이는 곧바로 사망했다.
실록에는 숙종 39년인 1713년에 충청도 남포 임세기의 아내 백씨가 아들 네 쌍둥이를 낳았는데, 세 아들과 산모가 사망하고 한 아이만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이후에도 세 쌍둥이 기록이 무수히 많은데, 부모의 이름이나 보상여부에 대해 기록하지 않고 있다. 『영조실록』 68권 1748년 10월 11일 여섯 번째 기사는 함흥에 사는 어떤 여인이 한 번에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지역명과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기록만 남긴 것으로 보아 출산지원제도가 흐지부지 되었거나 재정부족으로 물품을 하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정에 보고되거나 논의된 내용에 기초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통계적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다만 실록에 수록된 내용만 살펴보면, 세 쌍둥이 이상은 여아 보다 남아가 월등히 많다. 이는 태생학적으로 남아의 비율이 높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남아선호가 뚜렷 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딸 쌍둥이들은 관아에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또한 조선시대 세 쌍둥이는 간혹 양민도 있지만, 대부분은 노비나 상민이었다. 쌍둥이를 예사롭지 않은 일로 여겼던 양반들은 신고를 꺼린 반면, 빈곤층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적극 신고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세종 때 종9품의 연봉이 조미(껍질만 도정한 쌀) 8석, 전미(밭벼의 쌀) 1석, 콩 1석 등 이었으니, 쌀과 콩 10석은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세 쌍둥이 출산지원금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조 이후 세 쌍둥이 기록이 현격히 감소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인구가 곧 국력이었다. 인구증가는 국가 총생산과 직결되는 문제로 출산장려가 시급할 수밖에 없었다. 세 쌍둥이 출산지원이 실제로 인구증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절실한 과제였음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로 조선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 순조 7년인 1807년 1,764,504가구 7,561,403명까지 늘었으나, 이를 정점으로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현재 출산율은 1,2명으로 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이다. 출산율이 이대로 계속되면 오는 2030년을 정점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할 전망이다. 낮은 출산율은 인구감소뿐만 아니라 노인인구 비중의 급격한 상승을 동반하기 때문에 생산인구와 소비 감소로 이어져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부동산 폭락 등 국가파산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고 한다.
청년실업난이 지속되면서 자신들을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로 자조하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다. 조선시대 출산장려는 더 많은 세금과 총생산을 위한 것이었지만, 작금의 그것은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한 절박한 문제이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결혼을 미루면, 당연히 출산율이 낮아진다. 가장 확실한 출산장려는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좀 더 많이 만들어 주는 일이다. 청년들이 행복해 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