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베트남 한류 원조는 400년 전 이수광의 한시(漢詩)
북경에서 안남국 사신으로 온 풍극관과 필담 나누며 한시 전파
베트남 하노이

12월 22일은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수교를 맺은 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라는 베트남전쟁(1960~1975)에 전투병을 파병했던 적대국의 관계를 청산하고 동반자가 된지 23년이 되었다. 1992년 수교 당시 연간 교역규모가 5억 달러에 불과했을 만큼, 소원한 관계에서 이제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미칠 파급효과가 워낙 큰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 밀려 언론에 보도조차 안 되었지만, 한·베트남 FTA 비준 동의안이 지난달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수교 이후 외교안보,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해 온 베트남과의 관계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베트남은 인구 9천만 명의 내수시장과 풍부한 자원, 인구 6억 명의 아세안, 13억 명의 중국, 12억 명의 인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인건비 상승과 각종 규제로 투자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중국의 대체투자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에는 3,300여 개에 이르는 우리 기업이 이미 진출해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 투자기획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투자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372억 달러로 일본을 제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투자한 국가이며,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 투자처이다.

교역규모도 빠르게 증가해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세계 6위, 베트남에게 우리는 3위의 교역국이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은 우리 보다 우리 문화에 더 열광하는 국가로 이번 한·베트남 FTA가 발효되면 외교, 문화, 경제 모든 분야에서 오는 2020년까지 2배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15년 전쟁 중 8년여를 피 흘리며 싸웠던 적성국에서 23년 여만에 가장 중요한 우방이 되게 했을까.

물론, 양국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만, 중국, 일본과 함께 가장 오랜 관계를 맺어 온 역사적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아주 오래전이지만, 직접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은 고려 인종 5년인 1127년이다. 당시는 안남국의 첫 독립국가인 리왕조(1009~1225) 제5대 임금인 신종이 재위하던 때였다.

정선 이(李) 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인 이양흔은 리왕조 제4대 임금인 인종의 셋째 아들로 형과 왕위 다툼을 벌이다 실패해 북송으로 피신했으며, 금나라가 침입하자 이를 피해 고려로 망명했다. 경주를 거쳐 강원도 정선에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산 이 씨도 안남국 왕자의 후손들이다. 리왕조 제6대 영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이용상은 1226년 정난으로 가족이 몰살당하자 측근들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라 지금의 황해도 금산군인 화산에 도착했다. 당초부터 고려를 목적지로 했는지, 조류에 떠밀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자에 능했고 필답결과 폐망한 나라의 왕자임이 밝혀졌다. 이를 딱하게 여긴 고려 고종이 이용상을 화산군(君)에 봉하고 땅까지 하사해 정착할 수 있게 했다. 현재 화산 이씨는 560여 가구 1,8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베트남 정부는 이들이 이주를 희망하면 세금과 사업권 등을 내국인과 동일하게 부여하고 있으며, 리왕조가 개국한 음력 3월 15일에는 종친회를 초청하여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안남국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있는데, 대부분은 중국에 다녀 온 사신이 안남국 사신에게 들은 정세나 중국과의 관계 등을 보고한 내용이다. 『태종실록』 13권 1407년 4월 8일 첫 번째 기사는 편전에서 국방대책을 논의한 내용이다. 최근 황제가 안남국을 정벌했는데, 안남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하의 군사로 소국을 정벌했는데,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공조판서 이래의 답변이 기대에 못 미치자 임금이 정벌배경을 직접 설명하고 대책을 명했다. 안남국왕이 반역세력 진압을 요청해 정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나섰을 것이다. 황제는 본래 큰 것과 나서기를 좋아해 우리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 겉으로는 지성을 다하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임금이 안남국의 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간접적이나마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봉유설(芝峰類說)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수광(李晬光)이 지은 『지봉유설 (芝峰類說)』은 조선시대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를 받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수광 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소재)

이수광 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소재)

1604~1607년 조완벽이 안남국을 세 차례 방문하기 전까지는 양국의 사신들이 북경에서 만나는 것이 교류의 전부였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우리에게는 『지봉유설』로 익숙한 이수광이 당시 안남국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요즘 우리나라 아이돌가수들이 가보지도 않은 나라에서 스타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수광도 평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안남국에서 최고의 인기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조 30년인 1597년 30대 초반의 젊은 관료였던 이수광은 진위사로 북경에 파견되어 50여 일 간 사신단 숙소인 옥하관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역시 안남국 사신으로 온 풍극관을 만났다. 서로가 문재(文才)임을 한눈에 알아 본 두 사람은 통역을 물리고 직접 필담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귀국한 풍극관은 이수광의 한시를 널리 퍼뜨렸고, 멀지 않아 이수광의 시집은 돈 주고도 사지 못할 만큼 인기였고, 유생들이 밑줄처가며 공부하는 문학교과서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다 무역상의 눈에 띠여 1604년부터 세 차례나 안남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조완벽에 의해 국내에 전해졌다. 이수광의 시가 얼마 인기였는지는 조선왕조실록, 이지항의 『표주록』, 안정복의 『목천현지』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상세히 소개되었다.

조완벽은 진주출신의 선비로 세 번째 안남국 방문을 마치고 교토에 있던 중 후 때마침 이곳에 쇄환사로 왔던 여우길 일행을 만나 10여년만인 1607년 귀국할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 온 조완벽이 자신의 경험을 친구 김윤안에게 전했고, 김윤안은 정사신에게, 정사신은 이수광에게 이를 전하여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20권의 책으로 정리한 『지봉유설』 이문(異聞)편에 깨알 같은 자기자랑을 실을 수 있었다.

『인조실록』 19권 1628년 12월 26일 세 번째 기사는 이날 타계한 이수광에 대한 추모 글이다. 수광의 자는 윤경, 호는 지봉인데 약관에 급제하여…중략…그가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안남, 유구(현 오키나와), 섬라(현 태국)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자기 나라에 유포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가 상선을 타고 교지(交趾, 당시 안남국은 2개로 분열되어 내전 중이었는데, 그 중 한 세력)에 갔었는데 교지인들이 그의 시를 내보이며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을 아는가?”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른 나라 사람까지도 존중하였다. 실록에는 더 이상 언급이 없지만, 20살에 일본에 끌려 온 조완벽이 이수광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안남인들이 몹시 실망스러워 했다는 내용이 몇몇 문헌에 전해져 온다.

조선 사신이 이수광이 얼마나 인기스타인지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숙종실록』 23권 1691년 12월 5일 첫 번째 기사는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 온 민암과 강석빈의 보고이다. 임금이 민암에게 물었다. 이번에 안남 사신도 왔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옷을 입었던가. 머리에는 검은 사모를 쓰고…중략…행동거지는 가벼웠으나, 제법 예양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안남 사신에게 이수광의 시를 알고 있느냐 물었는데, 능히 알고 있어 함께 암송까지 했습니다. 풍극관에게 시를 지어준지 94년이 지난해로 이때까지 이수광의 시가 여전히 인기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실록은 전·현직 대신이 사망하면 “판서 ㅇㅇㅇ이 졸하였다.”로 시작되는 고인의 업적과 인물평을 싣는데, 이수광 보다 140여년 앞선 『성종실록』 223권 1488년 12월 24일 세 번째 기사가 달성군 서거정의 그것이다. 서거정의 자는 강중이며…중략…경진년(1458)에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로 북경에 가 통주관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안남국 사신 양곡을 만났다. 양곡은 장원급제 출신으로 서거정과 시를 주고받았는데, 서거정이 먼저 근체시(近體詩, 일정한 격률과 엄격한 규범을 가진 한시의 형식) 한 소절을 지어주자 양곡이 화답했고, 이에 서거정이 즉각 10편을 지어 응수하자 양곡이 “천하의 기재이십니다.”하며 탄복했다. 양곡이 귀국하여 널리 퍼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이때부터 조선의 시가 안남국에 알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조완벽의 세 번째 방문 이후 80여년이 흐른 1687년 또 한명의 조선인이 안남국에 다녀왔다. 『숙종실록』 15권 1689년 2월 13일 첫 번째 기사는 전라도 관찰사 권시경이 제주 사람 김태황의 표류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제주사람 김태황이 정묘년(1687) 9월 목사 이상진이 진상하는 말을 배에 싣고 가다가 추자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31일 만에 안남국 회안(會安, 현 호이안) 도착했다. 안남국왕은 이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하여 주고 돈과 쌀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했는데, 때마침 이곳에 와있던 중국 절강성의 상인들에게 부탁하여 무진년(1688) 7월 제주로 돌아 왔다.

이날 권시경은 이들이 가져 온 안남국 지방수령이 작성한 교역 요청공문과 김태황을 귀국시켜 주는 대가로 쌀 600포를 중국 상인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것에 대한 처리도 함께 보고했다. 임금이 이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목내원과 김덕원이 상당히 의심은 가지만, 쌀을 주기로 약정을 했으면, 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청국의 상인들은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라 바다가 아닌 육로를 통해 귀환시켜야 한다고 보고했고, 임금이 이를 수용했다. 역사에 있어 가정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지만, 이 때 만약 안남국의 교역요청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당시 안남국에는 서구의 상인들도 제법 진출해 있어 이들의 문물을 좀 더 일찍 받아들였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실록에는 이후로도 안남국의 기후특성, 제도와 문화, 주변국과의 관계, 역사 등이 담긴 사신들의 종합보고서부터 안남국 사신이 북경에 왔다가 대한(大寒) 추위에 얼어 죽었다(1796년 1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내용까지 다양한 기록이 있다.

한·베트남 당국은 FTA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20일 현재 연내 발효를 목표로 외교공한 교환 등 막바지 협의가 한창이다. 근현대사만 떼어놓고 보면 다소 소원한 관계였지만, 1천여 년을 교류해 온 오랜 우방이다. 이번 FTA 발효를 계기로 물적 교류의 확대는 물론, 지금까지 함께해 온 것보다 더 오랜 동안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관계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