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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꿩 대신 닭이라니… 임금님의 닭고기 사랑

「조선왕조실록」 - 정조, 궁궐 식재료 닭 납품 규정화 명령

서울역 앞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제설차량(1969년)

2017년 정유(丁酉)년은 닭띠 해다. 닭은 12지() 중 열 번째 동물로 색은 천간에 의해 정해지는데 갑()∙을()은 청색, 병()∙정()은 적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이므로 정유(丁酉)년인 올해는 붉은 닭띠 해이며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서 7시, 달로는 음력 8월, 방향으로는 서(西)에 해당된다.

특히 올해는 강력한 양의 기운과 열정을 상징하고,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예고하는 서조(瑞鳥, 상서로운 새)인 붉은 닭띠의 해이다. 그러나 정유년이 무색하게도, 지난해 11월 발생한 AI(조류 인플루엔자, Avian Influenza)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체 사육 가금류의 20%에 해당하는 3,000만 마리 이상이 살 처분되는 수난을 겪었다. 새해 들어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해 20일 현재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 AI 사태는 우리나라에 닭이 들어 온 2,000년 이래 최악의 기록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호주 뉴잉글랜드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닭이 가축화되어 인류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5,000여 년 전 동아시아 지역이다. 이 연구팀이 동아시아 고대 유적지에서 수습한 48개의 닭 뼈에서 DNA를 추출해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로, 이때부터 인류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물이나 여러 문헌으로 보아 우리나라에 닭이 들어 온 것은 2,000년 전쯤이다. 오늘날 같은 대규모 사육은 근대 이후여서 지금까지는 이번처럼 집단 감염될 환경이 아니었다.

  • 닭 형상화

「삼국유사」는 신라의 건국신화인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와 김 씨의 시조가 된 김알지의 탄생을 알린 흰 닭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1973년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 천마총에서 서기 400~500년 것으로 보이는 달걀이 출토되었다. 또 고구려 무용총에 투계(鬪鷄)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족히 2,000년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12지() 중 유일하게 날개가 있는 날짐승이어서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였고, 천지개벽이나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태초의 소리였다.

이 같은 인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타난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 21일과 다음 해 1월 6일 기사가 그것이다. 전자는 백성들 사이에 나라가 흰색 닭이나 개를 기르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닌다는 보고이고, 후자는 수원의 기관(記官, 지방 관청에 속해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관리) 능귀(能貴)와 용구(龍駒, 현 경기도 용인시)의 호장(戶長, 고려부터 조선까지 일선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향리) 희진(希進)을 “민간에서 흰 빛깔의 개, 말, 닭, 염소를 키우지 못하게 한다”는 요망한 말을 만들어 퍼뜨린 죄로 체포하여, 모두 참형에 처하고, 이를 여러 도에 알렸다는 내용이다.

유언비어가 참형까지 당해야 하는 중대 범죄였을까. 아쉽게도 요망한 말을 퍼뜨렸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참형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과 연계해 보면 역모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개국 초기여서 고려를 재건하려는 구왕조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로 곳곳에서 저항이 있었다.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태조로서는 새로운 임금의 탄생이나 고려의 부활을 의미하는 상서로운 동물의 출현을 무척 경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흰색 동물을 길조(吉兆) 또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긴 흔적은 고구려 2대 임금 유리왕(琉璃王) 때인 기원전 18년 처음 등장한 이후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수 없이 나오며, 이 같은 인식은 국가가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조선 초기 100년 동안은 2년에 한 번꼴로 흰 동물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마다 중요 사건과 연결된다. 흰색 동물이 출현해 재이(災異)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한 것이다. 이로 보아 오죽 자신이 없으면 흰 동물도 못 키우게 하느냐는 여론을 통해 태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게 하여 결국, 역모를 도모하려 한 것으로 이 사건을 해석한 것 같다.

닭이 액을 쫓고 상서로움을 전하는 귀한 동물이지만, 때로는 동물의 먹잇감으로나 쓰이는 하찮은 존재일 때도 있었다. 「정종실록」 1399년 5월 16일 여섯 번째 기사는 "귀화인인 오랑합(吾郞哈)이 이리를 선물로 바쳐 궁중에서 키웠는데, 한 달에 닭을 60마리나 먹어치운다"는 내용이고, 1407년 8월 24일 첫 번째 기사는 "강계도병마사 김우(金宇)가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지나는 군현(郡縣)의 닭을 모조리 잡아 자신의 매(30여 마리)에게 먹이로 주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보고였다. 그러나 임금(태종)은 “김우는 공신이니 처벌할 수 없다. 앞으로도 오직 김우의 요청만 들어주고, 그 외는 처벌하라”는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

닭이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지내다보니 별일이 다 있었다. 「세종실록」 1431년 5월 15일 일곱 번째 기사는 닭서리하다 참형 당한 이야기이다. 상주에 사는 권중이, 김이동, 박군자 등 3명이 이웃집 닭을 훔치다 발각되어 도망하던 중 쫓아 온 닭 주인을 때려 숨지게 했다. 형조는 모두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은 직접 가격한 권중이만 처형하고 단순 가담자 둘은 감형하라 명했다. 닭을 이용해 살인누명을 벗기도 했다. 1433년 7월 19일 두 번째 기사인데, 살인혐의로 10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던 곡산의 양민 여성 약노(藥奴)를 재조사한 것이다. 이 여인은 주문(呪文)을 외워 살인한 죄로 수감 중이었는데, 정말 주문만으로 살인이 가능한지 사람 대신 닭을 이용해 실험한 것이다. 주문을 열심히 외웠으나 닭이 죽지 않자 약노는 옥살이를 오래하다 보니 귀신이 빠져 나간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형조의 보고를 받은 임금은 “주문 따위의 허망한 것을 믿고 사람을 처형한다면, 억울하게 죽는 백성이 한둘이겠느냐”며 의금부로 돌려보내 다시 조사하도록 했다.

“본래 나는 주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내가 밥을 준 사람이 얼마 후 이유도 없이 죽는 바람에 의심을 받았다. 고문과 매를 견디지 못해 거짓 자복을 했다” “그동안 번복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는가” “또 맞을 것이 뻔한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변함없다. 또 때릴 거면, 더 이상 조사하지 말고 살인죄로 나를 죽여라” 이를 보고 받은 임금은 즉시 석방하고 집에 갈 수 있도록 먹을 밥과 여비를 마련해 주라고 명했다.

닭 사육을 중요 정책으로 삼은 것은 세조 8년인 1462년 6월 5일이다. 이날 실록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이 신숙주, 권남, 한명회 등과 논의한 축양(畜養)계획을 호조에 전지한 것이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때를 놓치지 않고 번식에 힘쓰면 70대()의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니, 서둘러 시행해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축사육을 등한시하여 손님접대와 제사에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부터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관찰사가 책임지고 추진하라. 번식에 성공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경우를 평가하여 상벌(賞罰)하라"

실제로 2년 후 축양성과를 평가해 상벌한 기록이 있다. 1464년 7월 5일 네 번째 기사가 축양성과에 따른 상벌계획을 보고한 것이다. “닭, 돼지 등 가축을 잘 길러 많이 번식시킨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는 자제 또는 조카 중 1명을 1계급 승진, 함길도 함흥갑사 유익명(兪益明)은 본인을 승진시키고, 중추원부사 민발(閔發)은 당상관이면서도 임금의 명을 가벼이 여겨 축양을 게을리 했으니 벌하소서” 이날 호조의 보고를 받은 임금은 그대로 할 것을 명했다.

  • 닭 모습

닭은 문(), 무(), 용(), 인(), 신()의 5덕을 갖추었으며, 입신출세를 상징하지만, 얕잡아 보거나 비하하는데 유난히 많이 쓰인다. 주재료가 없어 그 보다 못한 대체재를 사용할 때 쓰는 ‘꿩 대신 닭’,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도전하는 ‘달걀로 바위치기’, 전혀 관심 없이 멀뚱멀뚱 바라만 볼 때 쓰는 ‘소 닭 보듯’, 얕은 수로 남을 속일 때 하는 ‘닭 잡아먹고 오리발’, 머리 나쁜 사람에게는 ‘닭대가리’, 여성이 똑똑하거나 잘 나설 때 쓰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등이 있다.

물론 적절한 표현도 있지만, 대부분은 억울한 측면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닭대가리’이다. 2009년 이탈리아 파도바대학이 갓 깨어난 병아리를 대상으로 숫자의 많고 적음을 판단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어미닭과 동료들을 뒤 따라다니는 습성을 이용하여 동료가 많은 무리와 적은 무리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 뒤 따르게 했더니 매회 많은 쪽을 선택했다. 즉 숫자의 많고 적음을 판단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닭의 기억력도 실험했다. 닭은 한번 서열을 정하면 더 이상 싸우지 않는데, 100마리의 닭이 치열한 싸움을 벌여 서열을 정하게 했다. 몇 달 뒤 다시 만나게 했는데, 한 마리도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투입된 101번째부터는 한 마리도 예외 없이 서열다툼을 벌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도 마찬가지이다. 2013년 일본 나고야대가 수탉이 왜 새벽에 우는지 연구했다. 날이 밝아오는 것을 알아서 우는 것이 아니라 생체리듬 때문이었다. 하루 24시간과 비슷한 23.7시간이 생체리듬인데, 때마침 큰소리로 우는 시간이 새벽이었다는 것. 즉 암탉 보다 똑똑하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 병아리 모습

닭이 가장 서운해 할 속담 중 하나가 ‘꿩 대신 닭’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설날 음식으로 떡국을 먹었는데, 꿩고기를 넣어 끓였다. 닭 보다 맛은 좋지만, 야생 꿩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비교적 구하기 쉬운 닭을 넣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정조 24년인 1800년 5월 22일부터는 더 이상 “꿩 대신 닭”이 아니다. 임금이 꿩 진상을 금지시키고 닭을 궁중음식에 쓰도록 규정화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닭고기 납품이 법제화 된 날로 실질적으로 닭고기가 주된 식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12년 앞선 1788년이다. 「정조실록」 5월 1일 세 번째 기사는 임금께서 각 전궁(殿宮)에 바치는 생치(生雉, 생꿩고기)가 없을 때는 산 닭을 대신 바치라고 명하여,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는 꿩이 있으면 쓰지만, 대개는 닭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1800년 5월 22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이 주원(廚院, 음식을 담당)은 꿩고기를 살아 있는 닭으로 대신 받아 봉진(封進, 봉인하여 올림)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할 것을 명했다는 것이다. 이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 민간에서는 꿩 대신 닭일 수 있지만, 적어도 궁에서 만큼은 이날부터 닭 대신 꿩이 된 것이다.

새벽을 알리는 우렁찬 닭 울음소리는 한시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서곡이며, 날개를 가졌으면서도 지상에 사는 하늘과 인간세상의 메신저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새벽닭이 울면 밤새 산천을 휘젓고 다니던 온갖 귀신들도 줄행랑을 친다고 믿었다. 붉은 닭띠의 해. 정유년에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우울한 먹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새 희망과 환희의 빛이 활짝 비추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