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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대통령의 집에서 국민과 소통하는 집으로 <청와대>

최근 청와대 이전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청와대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즘 뜨거운 이슈인 청와대의 역사를 알아본다.

01 매우 길한 배산임수의 지형에 세워진 곳

1990년 2월 20일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신축 공사를 위해 대지를 조성하던 중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뒤에서 커다란 바위가 발견되었다. 가로 2m, 세로 1.3m 크기의 바위로 전면이 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이 바위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 때문이었다. 이 바위에는 해서체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글씨와 함께 낙관 자리에는 ‘연릉 오거(延陵 吳据)’라는 이름이 새겨 있었다. 이것을 감정해 본 결과 이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약 300-400년 전 조선 중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런 유물이 하나의 예가 되듯이 청와대 일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에 속했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 낙산(駱山),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었다. 명당의 좋은 기운을 막고자 일제는 경복궁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설하고, 일본인 총독 관저는 오늘날의 청와대 자리에 세웠다. 일제는 청와대가 속한 옛 조선의 궁궐 자리가 명당이기에 그 기운을 꺾으려고 풍수적 침략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 이승만 대통령 경무대 초청
    어린이 훈시(1955)

  • 초등학생
    경무대 관람(1955)

  • 초등학생
    경무대 관람(1955)

02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청와대의 현주소이다.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집무 및 생활공간이지만 오늘날에는 대통령의 국정수행부서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중심인 청와대의 상징은 푸른 청기와다. 북악산(北岳山)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청와대 본관은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 지붕에 청기와가 올라가 있다. 청기와는 약 30만장이 사용되었는데, 이 기와들은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청와대 일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離宮)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경복궁의 후원으로 사용되었다. 후원에는 각종 누각과 함께 연무장, 과거시험장이 만들어졌으며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경복궁과 이곳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그런 상태로 270년간 방치되었다가 고종 때 중건되었다. 이때 고종은 현재 청와대 지역인 신무문 밖 후원을 북원(北苑)이라 이름 짓고 중일각(中日閣), 오운각(五雲閣),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춘안당(春安堂) 등을 세웠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강점 후 일제에 의해 헐리고 이곳에 조선총독의 관저가 건립되었다. 광복 후에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사용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무대’라는 이름을 되찾아 대통령 관저명으로 사용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1층은 집무실로, 2층은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경무대가 워낙 낡았기 때문에 낡은 건물을 보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가 심해지면서 경무대는 점점 국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1960년 8월 윤보선 대통령 때 경무대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 경무대 호칭개정에 관한 통보의 건(1961)

윤보선 대통령이 개명에 동의하자 당시 서울시사(史) 편찬위원이었던 김영상이 화령대(和寧臺)와 청와대 두 이름을 제시하게 되었다. 화령이라는 이름은 태조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조선과 화령이라는 이름 두 개를 가지고 고민하던 것 중의 하나였다. 당시 태조는 명나라에 이 이름들 중에 더 좋은 것을 골라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또 하나 제시된 이름은 청와대로, 관저의 기와가 평화를 상징하는 푸른 빛깔이라는 데 착안해 내놓은 이름이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청기와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재인 만큼 고유한 전통을 지닌 집이라는 뜻에서 청와대로 이름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며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재임 직후 또 다시 이름을 고치자는 요청이 있었다. 청와대의 청(靑)보다는 황(黃)이 존귀함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황와대"(黃瓦臺)라고 고치자는 것이었다. 옛날 황제가 황색 옷을 입었고 왕궁은 황기와라고 했기에 그렇게 고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일축해 지금까지 ‘청와대’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 청와대 외부 전경(1966)

  • 청와대 내부 전경(1966)

  • 청와대 내부 전경(1966)

03 국민과 소통하는 집으로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이다. 일반 국민들이 쉽게 접근하기 곤란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청와대 개방은 국민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55년에 경무대 경내를 일부 공개한 것이 청와대 개방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68년까지 매년 4월과 5월에는 청와대 경내 일부가 개방되었으나, 1968년 1월 21일 북한군에 의해 청와대가 습격당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일어나면서 청와대 개방이 중단되었다. 1·21사태는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청와대 뒤편에 있는 북악산 일대까지도 일반 국민의 접근이 통제되었다. 1·21사태 이후 5공화국 말까지 청와대와 인근지역은 전면 통제되었다. 그렇게 닫혀있던 청와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점차 개방이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기인 1988년부터 청와대 경내가 개방되었고, 문민정부 들어서는 인왕산 등산로와 청와대 주변도로가 열렸으며, 궁정동 ‘안가’가 헐리고 그 자리에 무궁화동산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청와대 경내 관람은 극히 일부에게만 허용되었다.

  • 청와대 개방
    (1988)

  • 청와대 앞 상춘객
    (1993)

  •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청와대 경비대(1997)

이후 국민의 정부부터는 청와대 경내 방문에 제한 대상도 없어졌고 조선조 후궁들의 위패가 있는 ‘칠궁’도 개방되었다. 참여정부는 2003년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 경내 관람코스를 본관 앞까지 확대했고, 2007년에는 북악산 일원도 전면 개방되었다. 이제 청와대 인근 지역은 국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