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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의 기적 산림녹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등산객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전국 어딜 가나 주말은 물론 심지어 평일에도 멀리 또는 가까이에 있는 산들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거의 등산의 생활화다. 그만큼 주거지 주변에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크고 작은 산이 많기도 하다.

대도시 중심에서 바로 눈앞에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나라, 조금만 걸어도 금방 산에 오를 수 있는 나라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몇 나라 되지 않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산들은 사시사철 푸르고 한 발짝만 들어가도 숲이 우거져 등산로 외에는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우리나라는 국토의 65%가 울창한 산림으로 형성되어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강산이고 광고카피처럼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다.

그렇다면 한국의 산들이 예전부터 이렇게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지고 푸르렀을까. 결코 그렇지도 않았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산이란 산은 온통 벌거숭이 민둥산들이었다. 높고 낮은 산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시뻘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비만 오면 홍수가 나고 토사(土砂)가 흘러내려 곳곳에서 일어나는 산사태는 그야말로 연중행사였고 예사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산이란 산은 모조리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도저히 가망이 없는 절망의 땅이었다.

우리나라 산의 사막화는 그 연유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돌이라는 특수한 난방을 채택한 가옥구조에서는 무엇보다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가 일제가 목재를 수탈할 목적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들을 마구 베어가면서 사실상 절정에 다다랐다. 또 6.25전쟁이 터져 산림의 황폐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마땅히 해먹고 살 일이 없으니까 화전(火田)과 도벌(盜伐), 나무장수가 성행했다.

그래서 1950년대에 이미 전국 산림의 절반은 헐벗은 민둥산으로 변했고, 풀 한포기 없이 완전황폐화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6.25전쟁 직후 이른바 ‘사방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원조 밀가루를 지급해가며 식목에 나섰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여전히 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있는 현실에서는 나무를 심는 식목이 나무를 베어내는 벌목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사방사업 실시에 관한 건 썸네일 이미지
사방사업 실시에 관한 건(1959)

그러다가 1960년대 초부터 ‘산림녹화운동’이란 말이 나왔고, 당시 도벌과 밀수, 마약과 깡패를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철퇴를 내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기만 하면 누구든 엄벌에 처한다는 방침을 실행에 옮겼다. 1961년에는 「산림보호법」을 공포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순전히 땔감을 위한 연료림을 조성하는 한편 탄광을 개발해 석탄을 캐냈다.

사방공사 썸네일 이미지
사방공사(1959)
제1회 사방의 날 썸네일 이미지
제1회 사방의 날(1960)
전국산림대회 썸네일 이미지
전국산림대회(1963)

때마침 정선선과 태백선 등의 철도가 개통되어 1,200백만 톤의 석탄을 강원도 일대에서 실어 나르기가 쉬워졌다. 주택과 부엌 아궁이 개량작업에 박차를 가해 난방과 취사문제를 연탄 중심으로 해결해 나갔다. 연료림 조성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낳은 유명한 임학자 현신규 박사가 등장했다. 일본 소나무를 개량해 병충해에 강하고 보다 크게 자라는 신품종을 개발해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에까지 공급했다. 그리고 필생의 야심작 ‘은(銀)수원 사시나무’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 나무는 나중에 그의 성을 딴 ‘현(玄)사시나무’로 불리게도 되었고, 멀리 뉴질랜드로 수출돼 지금도 무성한 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그는 철저한 산림부흥론자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거국적인 식목사업에 그를 동참시켰다.

1964년 서독 방문에서 박대통령은 유럽의 우거진 숲을 보고는 우리나라 산들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농지도 좋고 공업도 좋지만 산이야말로 우리 국토의 지붕이란 생각으로 본격적인 식목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여나갔다. 정부차원에서 ‘치산(治山)7개년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산림해충방제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고, 대통령비서실을 중심으로 산림복구종합계획을 수립해 해당부처로 내려 보냈다.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 썸네일 이미지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1961)

이 과정에서 1967년 산림청이 발족돼 식목과 조림 등 모든 치산녹화사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산림청을 경찰력과 강력한 말단행정 조직력을 갖춘 내무부 산하로 이관시키고, 산림청장에게 헬리콥터까지 제공하는 등 그 어떤 조직의 수장 못지않은 힘을 실어주었다. 여기서 국민들의 동참을 빼 놓을 수 없었다. 나무를 심고 사방공사를 하는데 있어 해당지역 국민들의 노력 또한 눈물겨운 것이었다.

가령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맨 먼저 만나는 영일만 일대는 완전 벌거숭이산들로 나무를 심을 수 없는 토질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나무를 심어 산림을 녹화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혈투와 다름없었다. 부녀자와 어린이까지 동원되어 5년 동안 밤낮 없이 물동이를 이고 지고 전투를 벌였다. 그 비탈진 모래땅을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바위 부스러기로 된 토양을 바꾸고 몇 번이고 다시 또 다시 나무를 심고 가꿨다.

1971년 드디어 우리는 ‘국립공원’을 도입하고 도시 근처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그린벨트를 지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40여 년이 흐른 뒤에 무려 109조 원이라는 산림의 공익적 가치를 얻게 만들었다.

그리고 1972년 새마을운동의 시작과 함께 내무부의 모든 조직이 산림녹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조랑말을 타고 산림순찰에 나서는 등 산림청의 위상은 계속 강화되었다.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무렵부터는 식목은 물론 식목 후 사후관리에 더욱 철저를 기하게 되었다. 1974년도 현재 심은 나무는 약 3억 1천만 그루로 철저한 현지 확인을 통한 이른바 검목(檢木)과 책임 관리에 추호도 소홀함이 없었다.

동시에 나무의 묘목을 키우는 양묘(養苗)사업도 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나 깨나 논·밭농사에 매달려 있던 농촌에서 양묘사업을 벌여 묘목도 공급하고 농가수익도 올리게 되었다. 산림녹화사업이 농업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셈이다.

산림조성과 보호에 국민의 참여 촉구 썸네일 이미지
산림조성과 보호에 국민의 참여 촉구(1973)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는 온 국민이 온갖 정성과 애정으로 이뤄낸 그야말로 맨손과 맨발의 역사이며 인간승리인 동시에, 천년미래를 내다보며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낸 기적의 역작으로 전 세계가 놀라고 있다. 국민의 에너지와 리더십과 조직력의 결집이 성취한 금세기 최고의 성공사례인 것이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국가기록원, 「민둥산에서 푸른 숲으로, 산림녹화」(http://theme.archives.go.kr/next/forest/viewMain.do)
  • 이만열, 『한국사연표』, 역민사, 1985.
  • KBS, 「KBS-TV 다큐멘터리,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산림녹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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