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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다시 피어나다 <창경궁>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과 종묘가 90년 만에 다시 연결되었다. 서울시가 2011년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사업’을 시작한 지 11년 만이다. 5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창경궁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창경궁(1986)

01 창경궁의 슬픈 역사

일제강점기, 우리는 많은 아픔을 겪었는데 조선이란 나라와 왕권을 상징하는 ‘궁’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본은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 경운궁 등을 헐어버리고 그 목재를 가져다가 술집 요정을 짓거나 귀족들의 정원을 꾸몄고 그 외 각종 궁궐 전각과 문은 서울 시내 곳곳의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며 조선의 민족성을 격하시키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창덕궁 옆의 ‘창경궁’은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훼손을 당했다. 창경궁(昌慶宮)은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이방원)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으로 처음에는 수강궁으로 불리웠는데 성종 15년(1484)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 수리를 하게 되면서 지금의 창경궁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궁궐이자, 왕비나 왕녀들이 사는 곳이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창경궁은 비운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순종이 거처를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게 됐고 이 일을 계기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1908년 봄부터 창경궁을 훼손하기 시작한다. 창경궁 명정전 주변의 전각을 없애고 대신 박물관을 세웠으며 남쪽 보루각 일대에는 동물원을 세웠다. 창경궁의 훼손은 심각했다. 60여 채의 전각과 담장이 철거되거나 변형됐고 기단, 초석까지 파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연못인 춘당지 주변에는 일본식 건물인 수정궁이 세워졌고 연못을 더욱 넓게 파서 뱃놀이를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창경궁의 뜰에는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 수천 그루가 가득했다.

02 궁()이 아닌 원()으로

1909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참석한 가운데 창경궁은 동·식물원으로 둔갑해 개장식을 열기에 이르고 이름도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으로 격하되기까지 한다. 거기에 일제는 조선 왕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종묘와 창경궁이 이어지는 길마저도 끊어놓게 된다. 종묘와 창경궁은 원래 종묘를 길게 둘러싸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겠다며 1931년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 도로(현 율곡로)를 연장하면서 두 공간을 단절시켜놓았다. 1924년 4월 일본은 밤 벚꽃놀이를 시작했고, 창경궁은 조선왕조의 흔적과 왕실의 존엄성이 사라진 떠들썩한 유원지가 되었다. 광복 후에도 창경원 벚꽃놀이는 계속됐다. 1971년 4월의 경우, 주말 하루 평균 25만 명이 입장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1972년엔 벚꽃놀이 기간 중 창경원에서 발생된 미아의 수만 918명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 창경원(창경궁)상춘객(1972)

  • 창경궁 봄풍경(1974)

그러다가 1983년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 복원 계획을 발표한다. 2년간 창경원의 공개를 중지하고 명칭도 일제가 붙인 '창경원' 대신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결정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옛 모습을 그린 ‘동궐도’를 바탕으로 원래 형태를 복원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이 투입되었다. 시멘트 구조물인 동물사와 매점 등을 모두 철거 정비하고 동물들은 남서울대공원(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동했다. 동물표본 8백 42종, 1,860점은 국립과학관으로 이관되었으며, 벚나무는 여의도 윤중로와 서울대공원으로 대부분 옮겨 심어졌다. 벚나무가 있던 자리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어 궁궐의 위엄을 되찾았다.

아픈 역사를 지워내듯 일제가 세운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지만, 일제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한 대온실만은 보존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도입된 서양 건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유산으로 인정받아 2004년에는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됐다. 1986년 8월 23일 창경궁이 복원정비작업을 마쳤다.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와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건식을 가졌고 중건 경축행사의 하나로 조선시대 임금의 가마 행차를 재현한 ‘어가행렬’이 청덕궁 비원에서 창경궁에 이르는 코스로 4km거리로 펼쳐졌다. 이 행렬에는 모두 1,4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해 행렬의 길이만 1km에 달했다.

  •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 창경궁 문정전 상량(1986)

  • 창경궁 중건기념 경축행사 어가행렬 아악대(1986)

정부는 1997년에 창경궁에서 있었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을 재현하였다. 조선 세조 6년부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국왕이 창경궁 춘당대에 와서 실시했던 춘당대시(春塘臺試)를 재현한 것이었다. 임금이 창경궁으로 출두하는 어가행렬 재현을 시작으로 시험이 실시된 뒤 급제자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리고 급제자가 거리를 행진하는 유가 행진까지 펼쳐졌다. 창경궁이 다시 궁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많은 행사가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03 조선의 모든 역사가 담긴 창경궁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질러 있는 옥천교를 지나 명정문과 회랑을 보게 된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강점기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창경궁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명정전(국보 제226호)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문정전, 장희빈이 죽음을 맞이한 취선당, 조선 세종 때 장영실에 의해 발명된 물시계인 자격루(국보 제229호)를 창경궁 안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04 창경궁과 종묘를 잇다

서울시는 2011년부터 추진한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을 완료하고, 7월 22일부터 복원된 담장·녹지와 새로 조성한 궁궐담장길은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켰던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축구장보다 넓은 녹지(약 8,000㎡)를 만들어 끊어졌던 녹지축을 이었다. 일제가 없애버린 창경궁과 종묘 사이 궁궐담장(503m)과 임금이 비공식적으로 종묘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북신문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궁궐담장의 경우 공사 중 발굴된 옛 종묘 담장의 석재와 기초석을 30% 이상 재사용했다. 복원된 궁궐담장을 따라 조선왕실의 발자취를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 340m, 폭 3m의 ‘궁궐담장길’(돈화문~원남동사거리)도 새로 생겼다. 서울시는 8월 9일부터 창경궁-종묘 보행로 일대를 산책하는 서울도보해설관광 코스를 운영해 시민들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