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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최근 포항서 가스 분출, 572년 전에도 이 일대 탐사

「조선왕조실록」 - 1445년 세종 “깊이 파서 살펴보라”감사에 지시

포항시 남구 대잠동 폐철도부지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천연가스 화재

난달 8일 포항시 남구 대잠동 폐철도부지에서 천연가스로 추정되는 가스가 분출되어, 지금까지(4월 20일 기준) 불타고 있다. 수천 톤이 넘는 가스가 분출되고 있는 이곳은 공원조성 공사현장으로 지하수 개발을 위해 관정을 200m 파내려 간 오후 2시 53분쯤 지하에서 분출된 가스에 불이 붙었다.

이날 포항남부소방서는 소방차 10대, 소방대원 30명을 긴급 출동시켜 진화에 나섰으나 가스 분출량이 많아 적극적인 진화보다는 안전조치를 취하며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화재로 작업 중이던 인부 2명이 얼굴 등을 다쳤으나, 다행히 가벼운 화상이어서 치료 후 귀가했다.

포항시의 의뢰로 현장을 방문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관계자는 “정확한 것은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열분해성 가스가 아니라, 유기물이 섞인 생물성 가스일 가능성이 높아 경제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비교적 낮은 지점인 지하 200m에서 이 정도의 가스가 분출된 만큼, 포항시와 협의해 정밀 조사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포항시 남구 대잠동 폐철도부지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천연가스 화재

포항과 인근지역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유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75년 포항시 남구 상대동 주택가 땅속에서 한 드럼(1,000리터) 가량의 석유가 발견되었고, 1988년에는 포항시 흥해읍 성곡리 주택 마당 한가운데서 천연가스가 나와 이를 연료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가스분출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평왕 31년인 609년 지금의 어느 지역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경주 모지악(毛只岳)에서 정월 쯤 땅에 불이 나(地燒) 같은 해 10월 15일에서야 꺼졌는데, 불이 붙은 면적이 가로 4보(, 약 60cm), 세로 8보, 깊이 5자(, 약 30cm)였다.
태종 4년인 657년 7월에도 경주 토함산 동쪽 땅에서 불이 났는데(地燃), 무려 3년이나 탔다.

이번에 가스가 분출된 포항과 인접한 경주와 영해부(경상북도 영덕, 영양군 일대)에서는 이후로 지진기록은 수 없이 많으나, 땅에서 불이나 짧게는 몇 일부터 몇 년까지 꺼지지 않는 지화(地火) 또는 지소(地燒), 지연(地燃)현상은 800여 년간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부쩍 늘었다.

  • 경주 토함산 일대

    경주 토함산 일대

세종 27년인 1445년에는 이 일대에 대한 탐사도 있었다. 같은 해 실록 4월 12일 두 번째 기사이다. 경상도 감사가 보고했다.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남쪽 산록(山麓)에서 병진년(1436년) 2월부터 땅에 불이 나 임술년(1442) 3월에서야 꺼져, 반경 2백70척(약 8m) 이내에는 풀과 나무가 나지 않았는데, 올해 2월 6일 이곳에 또 다시 지소(地燒)가 발생하여 지금까지 타고 있다. 불이 타고 있는 면적은 길이 8척(, 약 240cm), 넓이 4척으로 낮에는 푸른 연기가 나고 밤에는 불꽃이 인다. 냄새는 석유황(石硫黃, 일명 유황)과 같고, 비가 와도 꺼지지 않는다. 이에 임금은 “땅이 타는 곳에 석유황이 난다고 하니 경이 깊이 파서 잘 살펴보고 아뢰라.”라고 명했다.

  • 석유황 (출처 : 한약재감별도감)

    석유황 (출처 : 한약재감별도감)

이후 별다른 보고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석유황은 물론, 기타 유용한 광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석유황은 훗날 화약제조에 쓰였으며, 당시에는 각종 피부질환과 해독, 양기를 돋우는 중요 약재였는데, 유독 세종이 큰 관심을 보였다. 실록 1419년 11월 25일 기사는 일본국 우무위원공원신(右武衛原公元臣)과 농주태수 평종수가 석유황 1천60근(, 약 636kg)과 환도 2자루를 진상하여, 명주 40필과 면포 170필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1427년 3월 27일에는 대마도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왕관인이라는 자가 귀국의 변경을 자주 침범하여 이를 도주에게 보고하고 3명을 참했으며, 백랍(白鑞) 60근, 연() 50근, 석유황 1천근을 바치니 어로 허가구역을 현재의 내이포와 부산포에서 고성 앞바다까지 확대해 달라는 내용이다.

세종은 또 1445년 1월 22일 함길도 경성에서도 땅에 불이 났다는 보고를 받고 조사할 것을 명했다. 경성절제사와 병마사로 6년여를 지낸 최윤덕이 자신의 경험을 더해 보고했다. “소신이 근무할 때도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 불이 수년씩 계속되었으며, 5진에서도 여러 차례 땅에 불이 났었습니다. 경상도 민간에서는 땅에 불이 나는 곳에서 석유황이 난다하옵고, 동해의 목양산(牧羊山)에서 나는 것을 최고로 칩니다. 양기를 돋우고, 통류(通流)와 해독에 효험이 높아 약품 중에 장군으로 칩니다.” 이에 임금은 구슬아치와 관노 10여명을 보내 깊이 파내어 시험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석유황 채취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 상금까지 내걸고 석유황 확보에 나섰으나, 충분히 구하지 못하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채취와 가공에 성공했다. 성종실록 1477년 2월 3일 세 번째 기사가 그것이다. 사섬부정(司贍副正, 종3품) 윤사하와 선공첨정(繕工僉正, 종4품) 임중을 공주의 집을 건축하는데 사용할 목재채취를 위해 충청도에 파견했는데, 임중이 청풍군(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서 석유황을 채취하여 올려 보냈다는 것. 두 달여가 지난 4월 2일에는 화약제조에도 성공했다. 이날 임금은 모화관에 나와 열무(閱武, 임금이 친히 열병함)한 뒤 무사들의 무예시범과 방포를 보았다. 방포에 쓰인 화약은 청풍군에서 채취한 석유황으로 제조했는데, 예전의 화약과 차이가 없었다.

약재와 화약제조에 쓰이던 석유황이 18세기 들어 생활용품으로 발전하는데, 요즘도 사용하는 성냥이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각 가정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었지만, 석유황 → 석뉴황 → 석뉴왕 → 셕냥의 음운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성냥이 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종 27년 가스분출로 추정되는 지소(地燒)가 있었던 영해부에서 38년여가 지난 1483년 또 발생했다. 성종실록 같은 해 4월 29일 세 번째 기사는 경상도 관찰사 김자정의 보고이다. 영해부에서 길이 7척(), 넓이 27척 남짓한 땅에서 불이 나 낮에는 연기가 오르고 밤이면 화광(火光)이 있어 땅을 파 보았더니 화기가 솟아오르고 사석(沙石)이 붉게 달아 있었다. 임금은 “천화(天火)가 내려 와 불 지른 것이라면 진실로 큰 재이(災異)이다. 인군(人君)이 정치를 잘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니 탄망(誕妄)한 일이다. 백성들이 놀라기에 충분하니 사람을 보내어 살펴야 한다. 만일 보고가 사실이 아니라면, 수령을 벌하여 백성들의 의심을 풀게 하라. 이에 승정원은 내관 이효지와 겸사복(정3품~정9품 친위병) 황형을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다.

이후 영해부에서는 현종 15년인 1674년 또 한 번의 지화(地火)가 발생했는데, 가로가 8척, 세로가 1척 남짓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영해부 외에 함길도와 황해도에서도 지화가 자주 발생했는데, 세종과 성종조의 처리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중종 26년인 1531년 6월 11일 첫 번째 기사는 한 달여 전인 5월 13일 황해도 연안부에서 발생한 지화에 대한 논의이다. 이날 임금은 “성종 조 때도 영해부에서 지화가 있어 내관과 겸사복을 보내 살펴보게 했었다. 그때 80여세 된 현지 노인이 ‘세종 조 신묘년에도 이곳에서 지화가 나 3년여 만에 꺼졌다.’고 했는데, 이 말의 진위를 알 수가 없다. 반드시 국사(國史)에 실렸을 것이니, 조사하여 아뢰라.”라고 명했다.

승정원이 조사에 착수하여 성종 조 때 기록은 찾았으나, 세종 조의 일은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실록에도 지화가 발생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중종이 궁금해 했던 노인의 진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 노인은 신묘년(1471년)에 지화가 있었다고 했으나, 세종 조 때 지화가 있었던 해는 병진년(1436년)과 을묘년(1445년)으로 최소 26년이나 시차가 있어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으로만 보면, 가장 오래 동안 계속된 가스분출은 세종 조 때인 1436년 2월 발생하여 6년 1개월만인 1442년 3월에 꺼진 경상도 영해부의 그것이고, 규모가 가장 큰 것은 1530년 황해도 연안부 다정리에서 발생한 화이다. 중종실록 1531년 5월 13일 첫 번째 기사는 황해감사의 지화발생 보고이다. 지난해 11월부터 땅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넓이가 1백여 척(), 길이가 2백여 보()나 된다. 그 마을에 사는 고로(古老)의 말에 의하면 “이 땅은 이손구 소유로 해마다 물에 잠겨 있는데, 임신년(1512년) 9월에도 불꽃이 물속에서 솟아올라 다음해 5월에 꺼진 일이 있었다.” 요즘의 계량단위로 환산해 보면, 무려 3,600㎡(30m×120m) 규모의 논에서 불이 타오른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표현할 때 늘 따라 다니던 수식어가 “한강의 기적”과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였다. 둘 다 역경을 딛고 일어섰음을 강조한 것이지만, 후자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 국토에 대한 원망이 조금은 섞여있다. 10여 년 전 모기업이 “생각이 에너지다”라는 슬로건으로 관심을 모았었다. 4차산업 시대에 접어든 요즘도 탄소에너지가 여전히 유용하긴 하지만, 축적된 기록과 창의적 생각이 더 유용한 너지가 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