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600년의 비밀, 그들은 왜 대장경판을 옮겼을까?
「조선왕조실록」 - 1398년 5월 10일 용산포~서울 지천사 군사 2천여 명 동원 의장대 행사
숭례문(2008년)에 이어 화엄사(2012년)에 대한 방화사건이
발생하자 서둘러 폐쇄했던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이하 대장경)이 4년여 만에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물론, 공개라고 해도 창살 사이로 방향을 바꾸며 이리저리 살펴보는 정도이지만, 대장경판(板)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619년 전인 1398년 5월 10일(음력)이다.
가치를 산정할 수 없어 보험조차 가입하지 못하는 이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32호로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16년 동안 연인원 125만 명을 동원하여, 제작한 인류공동의 유산이다.
800년이 넘도록 단 한 장의 훼손이나 손실 없이 보존되고 있는 지금의 대장경판은 1232년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당시 고려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연인원 125만 명을 동원하여,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의지를 담아 한자 한자 새겨낸 것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출처 : 문화재청)
목판 수가 총 8만1350장이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데, 목판 한 장의 평균 무게가 3.5kg이므로 전체 무게가 285톤에 달한다. 이는 조선시대 우마차에 실으면 약 400대, 요즘의 5톤 트럭에 실으면 57대 분량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큰 위험과 비용을 무릅쓰고, 대장경판을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겼을까?
태조 7년인 1398년 5월 10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옮긴 것은 확실한데, 어떤 경로와 방법으로 옮겼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렇다보니 추론과 주장은 많지만, 기록에 근거한 정설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주목을 받은 연구 중에는 외침을 피하기 위해 옮겼다는 주장과 조선의 정통성을 알리기 위한 기획성 행사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자에 대한 근거로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각했는데, 실제로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해 선원사를 비롯한 두 곳의 사찰과 민가를 약탈했으며, 이때 무려 300여명의 승려와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고려 때부터 무역선과 조운선을 운영해 왔기 때문에 뱃길과 대형선박 운용에 익숙해 이 정도 물동량이면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운(移運)경로는 강화도 또는 서울 용산을 출발해, 만리포, 진도 울돌목, 완도, 거제도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지금의 경남 고령군 개진면 개포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인사 대적광전 외벽에는 ‘대장경 이운(移運)벽화’가 있는데, 개포에서 해인사로 이운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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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벽면에 걸린 ‘대장경 이운벽화’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긴 했지만, 강화도가 남해안 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위험했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렇게 위험 했다면, 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를 강화도에 두었겠느냐는 것. 또한 목판은 물에 취약해 대형 해난사고가 아니더라도 변형 등의 훼손이 우려되는데,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수로를 선택했겠느냐는 주장이다.
후자는 조정이 기획한 이벤트설이다. 집권 7년차를 맞아 자신감을 얻은 태조가 자신이 불교신자임을 확실히 하고, 조선이 고려 불교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나라임을 보여 주기 위해 이 같은 대형 행사를 열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실록에는 태조가 불교신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많다. 1392년 12월 4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의 종교를 두고 신하와 논쟁을 벌인 내용이다. 임금이 첨서중추원사(종2품) 정총에게 대장경 발간 인사말을 쓰라고 명하자, 정총이 직격탄을 날렸다. “전하께서 어찌 불사에 정성을 쏟으십니까. 청하옵건대, 이제는 믿지 마시옵소서.” “이색은 유학(儒學)의 종사(宗師,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스승)인데도 불교를 믿는다.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 같은 학자가 믿겠느냐.” “이색이 학식이 높은 학자임에도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색이 불교를 믿어 너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말라.” 이날의 논쟁은 임금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억지로 끝났는데, 이후로도 많은 신하들과 격론을 벌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태조 7년인 1398년 5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강화의 선원사에서 운반한 대장경 목판이 용산에 도착하여 임금이 이를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는 내용이고, 이틀 뒤인 12일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사는 이운(移運)행사에 대한 설명이다.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2천명으로 하여금 대장경 목판을 지천사(지금의 서울 프라자호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로 운반하게 했는데, 검교참찬문하부사(정2품) 유광우가 향로(香爐)를 잡고, 의장대(儀仗隊)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뒤를 따랐으며, 오교(五敎, 대승불교 종파인 열반·계율·법성·화엄·법상종을 이름)와 양종(兩宗, 조계·천태종)의 승려들이 불경을 외우며, 이운대열을 인도하였다.
조정이 기획한 국가적 행사였다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실록에 나오는 관련기록의 전부로 기획이벤트설의 주요 근거이다. 용산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구간에서 주요 종파의 승려들과 2,000여명의 군사, 의장대가 퍼레이드를 펼쳤다면, 대장경판이 수레 400대 분량이어서 많은 인원이 동원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하더라도, 단순히 이운만을 위한 행렬은 아니었다는 해석이다. 만약 외침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대장경 이운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최소한의 인력을 동원하여 가급적이면 조용히 이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합천 해인사를 목적지로 하는 이들 행렬이 육로이든, 수로이든 최단거리나 편리한 길을 두고, 서울 한복판까지 돌아서 갔겠냐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민심 수습용에 무게가 실리긴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학계에서는 행사에 동원된 경판은 배를 이용해 한강하구를 거쳐 남해로 향했고, 나머지는 강화도에서 직접 개포로 향했을 것으로 보는 측과 한강을 거슬러 올라 충주까지는 뱃길로, 그 이후는 육로를 이용해 문경, 구미를 거쳐 개포에 이르렀다는 견해가 있다.
외적의 침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있었고, 민심수습용이었다면, 왜 단 한 번의 행사에 그쳤을까.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천하제일의 길지를 찾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동안 해인사에 있었던 7차례의 대형화재, 여러 번의 전쟁, 일본에 넘겨주려 했던 임금까지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단 한 장의 손실이나 훼손 없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을 보면 그렇다.
팔만대장경 이운 추정경로
일찍부터 대장경의 가치를 알아 본 일본은 조선개국 초인 태조 3년 진서절도사 원요준을 보내 대장경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조정이 진저리를 낼 만큼, 대장경에 집착했다. 정종 즉위년인 1399년 7월 10일에는 일본의 요구에 넘어가 하마터면, 인쇄본이 아닌 경판을 넘겨 줄 뻔했다. 이날 여섯 번째 기사인데, 구주(九州)를 차지한 좌경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이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본관과 성씨를 내려 달라고 요청한 것. 자신은 백제의 후손인데, 일본인들이 본관과 성을 모르니 써달라고 청했다. 이에 임금은 백제 시조인 온조(溫祚) 고(高)씨와 토전(土田) 300결을 주기로 했다. 좌산기상시(정3품) 박석명이 즉시 상소를 올려 토전은 주지 말고 대장경판을 주자고 제안했다. 우여곡절 끝에 본관과 성씨를 내려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하마터면 큰 원망을 살 뻔했다.
태종도 큰 실수를 했다. 1414년 7월 11일이었다. 일본 사신 규주(圭籌)에게 대장경과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준 뒤 신하들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구하니 경판을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나라에는 경판이 적지 않으니 보내주어도 해로울 게 있겠습니까.” “그럼 경판의 숫자를 헤아려서 아뢰어라.”
이 때 대장경판을 지킨 일등공신은 청성군 정탁인데, 가치를 알아서가 아니라,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일본 사신이 자주 오는 것은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경판을 주면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사신은 올 때마다 적게는 몇 명부터 많게는 수백 명씩 피랍되었던 우리 백성을 데려 오거나, 온갖 진상품을 가져왔다.
이후부터 일본은 인쇄된 대장경이 아니라, 아예 경판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세종 4년인 1422년 12월 16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이
인정전에서 일본 사신을 접견한 내용이다. “신들이 대장경의 동판(銅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와 요청했으나, 귀국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 같은 내용을 회서(回書)에도 써 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보아 일본에서는 이때까지도 대장경판이 목판이 아닌 동판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423년 12월 25일. 세종은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길 뻔했다. 135명에 이르는 사절단과 일본 왕이 여러 섬에 피로(披擄)되었던 우리 백성을 찾아내어 돌려보내자,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대장경판이 쓸모없는 물건이니 일본에 보내자며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이 크게 반대했는데, 이번 역시 가치를 알아서가 아니라, 한번 응해 주면 계속 귀찮게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대장경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집요했다. 이미 여러 차례 대장경을
얻어갔던 규주와 범령이 1424년 1월 2일 또 방문해 경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여기에 올 때 임금에게 만일 경판을 가져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아뢰었는데, 이제 빈손으로 돌아가면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차라리 여기서 굶어 죽겠다.”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단식은 함께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무리의 범행모의와 비교하면 앙탈수준이었다. 같은 달 20일 왜통사(倭通事) 윤인보
등 일본인 5명이 체포되었다. 조사결과, 이들은 일단 사신을 먼저
보내 경판을 요청하되 거절당하면 대마도에 대기 중이던 병선 수천
척을 보내 약탈하기로 했다는 것. 이 같은 사실은 함께 온 왜승(倭僧) 가하(加賀)가 외부에 누설하는 바람에 드러났다.
1437년 4월 28일에는 대장경판을 서울 근교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불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계속 억지를 부리면 줄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경판은 국보여서 줄 수 없다고 하자 순순히 물러선 일이 있었다. 도성 근방에 있는 회암사나 개경사로 옮기면, 귀히 여긴다고 생각해 더 이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엄청난 비용 때문에 흐지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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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야바라밀다심경 판본(팔만대장경 판본)
대장경판은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한자 한자 마음으로 새겨 낸 것이다. 선조들은 이 과정을 통해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인류의 유산을 만들기도 했지만,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웠다. 새 정부 들어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그동안 깊어졌던 세대와 지역, 계층 간의 갈등과 반목이 온 국민이 하나 되어 든든한 경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주춧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