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태국, 700여년 교류 임진왜란 때는 연합군 참전 자청
「조선왕조실록」 - 명, 우리나라-태국-유구국 연합 일본정벌 수차례 요구
한국-태국 수교 50주년 기념우표
(출처: 한국우표포털서비스, http://stamp.epost.go.kr)
최근 국내 주요 매체에는 양국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2건의 기사가 있었다. 지난달 8일 전투기 수출기사와 지난 2일 태국 대학입시 관련 보도이다. 전자는 국내기술로 독자 개발한 초음속 전투기 2대를 우리나라 조종사가 태국까지 6,600km를 직접 몰고 간다는 내용이고, 후자는 27일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 채택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대학입시에 총 5,504명이 응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어, 불어, 팔리어에 이어 네 번째였으며, K-팝과 드라마 등 한류영향도 크지만, 교역과 투자가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와 태국의 관계는 700여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실록 1393년 6월 16일 기사에는 태국의 옛 명칭인 샴(Siam)의 한자음 표기인 섬라곡국(暹羅斛國, 이하는 조선 중기 이후 표기인 섬라)이 등장한다. 내(乃, 섬라의 관직) 장사도(張思道)가 20명을 이끌고 대궐을 방문해 소목(蘇木, 약재) 1천근, 속향(束香) 1천근과 토인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대궐문을 지키게 했다. 이때는 개국 초기여서 조선의 정체성과 권위가 절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조정은 왜 빨라도 반년은 걸렸을 남만국의 대규모 사신단을 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마도 오래전부터 교역이 있어 떠들썩하게 홍보를 할 형편이 아니었거나, 적어도 낯설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 개성의 관문인 예성강 입구 벽란도에는 멀리 아라비아부터 여러 남만국, 송나라 상인까지 수천 명의 외국인들이 북적였는데, 이들 중에는 태국인 즉, 섬라인들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사도 일행의 방문에 대한 답례로 우리도 사신을 파견했으나, 왜구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다음해인 1394년 7월 5일 실록은 섬라국 사신이 왜구의 공격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회례사(回禮使, 답방으로 파견하는 사신) 배후(裵厚)와 일본에 이르렀으나, 도적에게 겁탈되어 예물과 행장을 다 빼앗겼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려 주시면 겨울을 기다렸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어 장사도는 가지고 있던 칼과 갑옷, 토인 두 사람을 마저 바쳤다. 출항을 기다리는 동안 장사도는 예빈경(禮賓卿, 종3품), 또 다른 섬라국 사신 진언상(陣彦祥)은 서운부정(書雲副正, 종4품)의 벼슬을 받았다.
섬라 방문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사신단이 또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실록 1396년 7월 11일은 사신 이자영이 살아 돌아온 내용이다. 1394년 겨울 출항했던 섬라 회례사 일행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던 중 전라도 나주 앞 바다에서 왜구의 공격으로 모두 죽고 자신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이제야 오게 되었다는 것. 이때 모두 죽은 줄 알았던 6명이 9개월여가 지나 도망쳐 왔다. 다음해 4월 23일인데, 당시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섬라국 사신 임득장 등 6명도 왜구들에게 끌려갔다가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회례사 배후가 없는 것으로 보아 끝내 희생당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1397년 4월 26일에는 섬라인이 조정의 조회에 참석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금이 근정전에 나가 조회를 받는 자리에 항왜(降倭, 항복한 왜구) 나가온은 조반(朝班, 조회 때 관원이 늘어서는 위치) 동8품 자리에, 섬라인은 서8품 자리에 서열 하였다. 또한 12년여가 지난 1409년 11월 14일 실록은 사간원이 왜국(倭國)인의 거주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그 위엄이 인근 국가에까지 알려져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현 일대에 위치했던 옛 왕국)·섬라·왜국(倭國, 일본)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고 있는데,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는 섬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때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섬라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다. 세조실록 1462년 2월 28일은 유구국 사신의 선위사(宣慰使, 외국 사신의 접대를 담당한 관원) 이계손이 사신과 나눈 문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이계손이 사신에게 물었다. “내가 전에 들었는데, 중국 조정에 여국(女國) 사람이 입조했다던데…” “나는 처음 듣소. 내가 알기로는 몇 년 전 섬라국의 여관(女官)이 중국에 입조한 적이 있는데, 이 일이 잘못 전해진 것 같소. 그 여인의 외모는 절묘했고 향기로웠다는 말은 들었소.” 실록 1539년 4월 12일과 1540년 10월 13일에도 섬라에 대한 짤막한 기술이 있다. 전자는 임금과 중국 사신이 경회루에서 나눈 이야기인데, 사신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구와 섬라가 책봉을 청해 오면 사신을 보내고 있으며, 안남(현 베트남)은 내란 중이라고 소개했다. 후자는 임금이 사정전에서 국정 전반에 대해 보고받는 자리였는데, 섬라·안남·유구가 자제들을 적서를 따지지 않는 중국에 유학시키고 있다. 우리도 서얼 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 유학을 보내자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섬라에 대한 기술이 더 있으나 대부분이 사신이 보거나 들은 내용이다.
사신이 오가고, 조정의 조회에 참석할 만큼 활발했던 양국 관계가 왜 이처럼 소원해졌을까. 명나라 해금정책(海禁政策)에 왜구의 발호까지 더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금나라 건국과정에서 강남 해양세력과 고전을 치렀던 농민 출신의 주원장으로서는 이들의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었다. 게다가 왜구가 내륙 깊숙이까지 침략해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명나라 조정은 해안을 봉쇄해야 했다. 이에 따라 중국 광동을 들러 남중국해를 지나 서해안에 이르던 섬라와 조선의 바닷길은 막힐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세기가 넘도록 서로에게 잊혀진 존재였던 양국이 연합군 편성을 논의하는 역사적 대반전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중국이 서둘러 지원군을 파병했으나, 승산이 없자 다급해진 중국 조정이 섬라·유구·조선군으로 연합군을 만들어 일본을 정벌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조선과 명 실록에는 섬라에 사신을 보내고, 조선이 이에 응할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 수없이 등장한다.
중국 닝보대학 정제시는 최근 한 학술세미나에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현상금을 걸고 조선 지원전략을 공모했는데, 정붕기라는 인물이 섬라군 동원을 제안해 채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명나라 신종실록은 섬라 사신이 직접 참전을 건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593년 1월인데, 마침 명에 와 있던 사신이 일본과의 전쟁에 자국의 해군을 참전시켜 일본을 토벌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 병부가 이를 받아들였고, 곧 실행계획에 착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후자는 다른 문헌들과 상당한 시간차를 보이고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섬라의 임진왜란 참전이 여러 차례 거론된다. 선조실록 1592년 9월 2일은 명 황제의 칙서이다. “만국이 편하고 사해가 안정되어 있는데, 저 미련한 소추들이 횡행하고 있다. 짐이 유구·섬라에 명하여 군사 수십만을 모집하여 일본을 정벌하고 본거지에 쳐들어가 적괴의 머리를 베어 풍파가 가라앉도록 하겠노라.” 1593년 4월 3일은 송 경락이 진병하자는 우리의 요청을 거부했다는 영의정 최홍원의 보고이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소만, 기밀사항이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그리고 황상께서 섬라와 유구의 20만 수군이 일본을 치게 할 것이오. 이미 이를 알고 있는 왜적들이 진심으로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조공을 잘 바친다면 내가…” 이날 회의는 명의 허세와 고의적인 방해로 성과 없이 끝났다.
이후로도 진정성 없어 보이는 중국의 주장이 몇 차례 더 있지만, 조선 조정은 이상해 보일 만큼, 섬라 참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을 신뢰할 수도 없었지만, 이미 점령당한 국토의 수복이 먼저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선·명·섬라·유구 4국의 연합군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 내부 문제였다. 인접해 있어 섬라가 군사강국임을 잘 알고 있는 광동과 광서 총독이 섬라군이 일본을 점령한 뒤 명나라로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나라 군대에는 본지(2013년 10월호)에서도 소개했던 일명 해귀로 불렸던 포르투갈 흑인용사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국적의 용사들이 있었다. 1593년 4월 10일 기사는 병조판서 이항복이 명나라 부총병 유정(劉綎)을 만난 내용이다. “유정은 신 등에게 각종 무기를 꺼내어 보여준데 이어, 섬라, 도만(都灣), 소서천축(小西天竺, 인도), 육번득능국묘자(六番得楞國苗子), 서번삼색(西番三塞, 티벳), 면국(緬國, 미얀마), 파주(播州), 당파(鎲鈀) 사람들을 좌우로 정렬하게 한 뒤 각각 자신의 묘기를 자랑하도록 해 종일 구경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종전을 몇 달 앞둔 1598년 5월 26일 해귀가 또 등장한다. 임금이 명나라 유격장 팽신고를 위로하기 위해 처소를 방문했는데, 해귀를 신병이라 소개했으며, 이틀 후에는 팽신고가 출병인사 차 임금을 방문한 자리에서 해귀 3명의 검술시범을 보여 각각 1냥씩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이들 다국적 용사들은 5년 이상 주둔하다 철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소수였겠지만, 참전국가로만 보면 멀리 인도에서까지 출병한 세계대전이었던 셈이다.
중국의 기술추격이 가속화 되고, 사드문제 장기화로 한·중 관계가 불확실해지면서 투자의 다각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와 기업은 세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세안 국가 진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와 기업투자 서밋연설에서 사람 중심의 미래공동체 건설을 제시하며, 경제 분야는 물론, 안보 분야까지 4대 강국 수준으로 확대해 나갈 것을 천명했다. 7백여 년 우방인 태국이 우리나라와 아세안의 튼튼한 가교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