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조선판 먹방 ‘도문대작’, 400년 전에도 논란
「조선왕조실록」 - 허균 과거 부정시험 혐의 유배 중 저술 맛 칼럼
정부가 ‘국가 비만관리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폭식조장 미디어와 광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모니터링 체계도 구축한다고 발표하자, 일부 네티즌이 “먹는 방송(이하 먹방)을 규제한다고 비만율이 낮아지냐”며 발끈하면서, 때 아닌 먹방 규제논란이 일었다.
지난달 26일 보건복지부는 국민건강증진정책심의회를 열어 국가 ‘비만관리 종합대책’을 확정·발표했다. 정부가 비만해결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은 비만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34.8%이던 국민 비만율이 오는 2022년 41.5%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어 비만대책이 시급하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비만의 문제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폭식조장 미디어 가이드라인(먹방규제)은 그야말로 대세 콘텐츠인 먹방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나온 발상이라는 것. 시청자들은 BJ(브로드캐스트 쟈키)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거나,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식사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 따라서 폭식의 조장이나 비만과는 관계가 멀다는 주장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정부는 “먹방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어서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다.”며 “다만, 폭식조장 방송으로 국민 개인의 건강을 해치고 비만해질 수 있음을 알려 방송사나 인터넷 업체가 자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일 뿐이었다.”며 진화에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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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잠잠해진 먹방논란이 400여 년 전에도 있었다. 허균(1569~1618)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인데,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던 당시의 사회규범으로는 입에 담는 것조차 민망한 새로운 콘텐츠였다.
도문대작은 고깃집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흉내를 낸다는 뜻으로 이 책의 서문부터 충격적이다. 식욕과 성욕은 본성이다. 더구나 음식은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 선현들이 음식을 천하게 여긴 것은 먹기에만 급급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태도를 탓한 것이었다는 것. 지금이야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지만, 당시에는 너무 경박스러워 거론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은 1611년 저술되었는데, 문제의 서문을 비판한 것은 200여년 후 성리학자 전우(田愚)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철저하게 외면해 온 것이다.
‘도문대작’은 조조의 셋째 아들이자 중국 위나라의 문장가 조식의 글에서 따왔다. 푸줏간 앞을 지나며 크게 입을 벌려 고기 씹는 흉내를 하는 것은 비록 고기는 못 먹지만, 그 순간만큼은 귀하고 즐겁다(過屠門而大嚼 雖不得肉 貴且快意)는 대목이다. 유배지에서 지난날 먹어 본 온갖 산해진미를 떠올리며, 허기와 추위를 달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제목이다.
요즘의 먹방만큼이나 새로운 콘텐츠였던 이 책에는 모두 117가지의 음식이 소개됐는데, 단순한 음식소개나 조리법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의 기원이나 주변 이야기까지를 담아 낸 조선 최초의 음식주제 인문서였다. 그는 우선 음식재료를 산지별로 정리했고, 레시피도 이것저것 나열하지 않고 중요한 요점만 뽑아내 썼다. 소개한 음식도 일품요리에서 간식, 과자류와 음료까지를 총망라했다.
허균은 어떻게 몇 달 밤낮을 꺼내어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은 음식을, 그것도 팔도의 별미를 맛볼 수 있었을까. 이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어려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결혼 이후에는 처가 덕분에 온갖 진귀한 음식을 물리도록 먹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한 팩트체크는 대체로 팩트이다. 아버지 허엽(1517~1580)은 명종 1년인 1546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끝에 대사간에 올랐으며, 당쟁이 본격화된 1575년 동인의 영수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올랐으나, 질병으로 사퇴했고, 상주에서 객사했다. 그의 호가 초당(草堂)인데, 허균의 생모로 두 번째 부인인 강릉김씨의 친정이 순두부로 유명한 강릉 초당인데서 비롯되었다.
실록은 신료가 죽으면 간단한 인물평인 졸기(卒記)를 싣는데, 선조수정실록 1580년 2월 1일 기사가 허엽의 그것이다. 망자에 대해 이럴 수 있나싶을 만큼 혹평 일색인데, 자식들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성, 봉, 균 세 아들과 우성전과 김성립을 사위로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해 조정에 올랐다. 형제들이 서로 논의하고 가르치며 스스로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였다.
그러나 당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 형제의 말로는 실록의 평가와는 다르게 멸문지화에 가깝다. 남인을 이끌었던 맏형 허성(1548~1612)은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신료라고 누구나 졸기를 써주지는 않는데, 그는 차라리 없는 게 좋을 뻔했다. 광해군일기 1612년 8월 9일이다. 지중추부사 허성이 갑자기 죽었다. 법전에 정해진 대로 장사물품을 시행하라. 한 때 이름이 났었으나 성질이 고집스럽고 꽉 막혔으며, 당쟁을 일삼았고 늙으면서 더욱 심해졌다. 둘째인 봉(1551~1588)은 일찍이 창원부사를 지냈으나 당쟁으로 유배를 당했다. 멀지 않아 풀려나기는 했지만, 전국을 떠돌다 37세를 일기로 금강산 금화역에서 객사했다. 셋째인 균은 역적모의를 주도한 혐의로 49세에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허균이 아버지를 여읜 것은 12세이던 1580년이고, 김대섭의 둘째 딸과 결혼한 것은 17세이던 1585년, 피난길에 아내를 잃은 것은 24세이던 1592년이었다. 12세까지는 경상도관찰사 집 막내아들로, 이후 결혼하기까지는 이미 과거에 급제해 출사한 두 형이 있어 여전히 금수저였다. 그의 처가 역시 할아버지가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장인이 의금부도사를 지낸 부유한 집안이었다. 두 번째 부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훗날 두 번째 부인 사이의 딸이 세자 후궁에 간택된 것으로 보아 두 번째 처가도 명문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부모와 처가 덕분에 맛난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맛칼럼리스트이자 먹방의 창시자격인 허균은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였으며, 음식에 대한 취향과 기호가 남달랐다. 그가 함열에 도착한 것은 1611년 1월 15일이었는데, 당시 함열현감의 처세가 흥미롭다. 현감은 유배 오는 죄인을 위해 연어알젓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고, 유배지에 도착한 죄인은 따듯한 밥과 연어알젓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다음날 도착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친구 기윤헌에게 썼는데, 처음부터 음식타령이었다. 새우는 부안 것만 못하고, 게도 벽제 것만 못하여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네. 요즘도 흔하지 않은 음식을, 그것도 유배지에서 타박하는 것을 보면 밉기도 하지만, 얼마나 까다로운 미식가였는지 엿볼 수 있다.
온갖 기행으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는 했지만, 북인의 행동대장으로 임금의 신임이 높았던 허균이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은 1610년 10월 22일 치른 과거 때문이다. 광해군일기 같은 해 11월 3일 기사는 합격자 명단과 부정시험에 대한 보고이다. 선조의 신위를 태묘에 모신 기념으로 치러진 이 별시에서는 문과 19명, 무과 46명을 뽑았다. 합격자 발표에 이어 부정시험에 대해 보고했다. 시험감독인 박승종은 아들 자흥을, 조탁은 동생 길을, 허균은 형의 아들 보와 형의 사위 박홍도를, 이이첨은 사위의 아버지 즉 사돈 이창후와 친구인 정준을 부정하게 합격시켰다는 것.
이날부터 허균의 유배가 결정된 12월 29일까지 조정은 하루도 빠짐없이 허균의 국문을 요청하는 상소와 주청으로 들끓었다. 실록 10월 19일 기사는 이번 별시 독권관(讀券官)으로 좌의정 이항복, 이정귀, 박승종, 대독관(對讀官)으로 조탁, 이이첨, 홍서봉, 허균을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총 7명의 감독 중 이항복, 이정귀, 홍서봉을 제외한 4명이 친인척을 합격시킨 것이다. 그런데, 왜 허균과 그의 조카 보만 처벌을 받았을까.
실록 11월 17일 네 번째 기사는 사간원이 허균의 범죄내용을 보고하고 처벌을 요청한 것이다. 5백여 명의 답안지를 자신이 모두 채점하겠다며 가져가 사전에 공모해 표시해 놓은 답안지를 골라내는 방법으로 합격시켰는데, 그 중에는 다른 대독관이 불합격 판정한 답안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가 얼마나 중대하고 엄숙한 것인가. 이런 죄악을 범한 자는 마땅히 추포하여 국문해야 한다. 또한 이를 묵인한 감독관들도 파직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임금은 허균과 그의 조카만 처벌하고, 나머지 감독관들은 더 이상 죄를 묻지 말라 명했다.
임금이 허균을 아끼기는 했지만, 성리학을 대놓고 비판하는 이단아를 더 이상 보호할 명분이 부족했거나, 나머지 감독관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균이 책임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있다. 형조판서로 감독관 중 좌의정 이항복 다음으로 높은 직위였던 박승종은 사건이 불거지자마자 병을 핑계로 휴가를 냈고, 북인의 실력자로 허균의 뒤를 봐주던 이이첨은 부정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친인척이 응시한 시험에 감독관을 수락한 자신의 잘못이 크다며 파직을 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무슨 그만한 일로 사직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조탁은 가보로 내려오던 「국조보감(선대 왕들의 선정만을 모아 편찬한 사서)」을 뇌물로 써 오히려 표범가죽을 하사받았다. 허균의 동의 또는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목들이다.
허균의 유배가 결정된 1610년 12월 29일 사관은 한 줄도 안 되는 공식기록 뒤에 자신의 견해를 길게 덧붙였다. 허균은 총민함과 문장의 화려함이 현재의 인물 중에는 겨룰 자가 없지만 생각이 망령되고 경박하며, 행실을 스스로 단속하지 못한다. 과장에서 여럿이 부정을 했는데도 허균과 조카만 처벌한 것은 그들만 잘못해서가 아니라, 허균이 명망을 얻지 못했고 가볍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처벌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이첨이 뒤를 봐주는 허균을 대놓고 비난하지 못했던 당시 주류세력들의 속내가 잘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조선판 먹방격인 「도문대작」은 너무 경박해 당시에는 입에도 담기 싫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우리의 전통음식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고, 모든 백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망령된 생각은 실현된 지 오래이다. 제도와 문물, 사람 사는 풍속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변화를 만들고, 기꺼이 수용하는 열린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