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개혁사상가 허균, 그는 왜 천지간 괴물이 되었나?
「조선왕조실록」 - 같은 하늘 아래 살수 없는 죄인 수레에 매달아…
400년 전인 1618년 10월 12일은 조선의 문장가이자 개혁사상가인 허균이 서쪽 저자거리에서 역모의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된 날이다. ‘교산 허균 400주기 추모 전국대회 추진위원회(상임공동위원장 정인수, 이하 추진위)’는 이날을 기려 지난 3일(음 8. 24, 이하 음력) 허균의 신원회복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청와대 등 관련기관에 제출했다. 조선 500년 동안 역모에 몰려 희생당한 수백 명의 인물 중 끝내 신원(伸寃)을 회복하지 못한 만고역적(萬古逆賊)은 정여립과 허균, 둘뿐이기 때문이다
장정룡 공동위원장 등 추진위 임원과 일반국민 1만1247명의 서명부와 함께 제출된 이 청원서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왕조시대에 평등사상을 설파했고, 호민론을 통해 이민위천(以民爲天) 사상을 일깨운 개혁사상가이자 선각자였으나 역모의 누명을 쓰고 비운의 생애를 마감한지 올해로 400주기를 맞았다”며 “이제라도 허균 선생의 복권을 통해 민본과 민주의 정신을 재조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앞서 추진위는 400주기 추모대회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했는데, 청와대는 서한을 통해 “백성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했던 허균 선생님의 이민위천 사상은 대통령님의 국정철학인 국민이 주인인 정부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러 국정일정으로 비록 참석은 못하지만, 허균 선생님의 개혁정신을 기리며 변함없이 국민만 바라보고 생각하며 일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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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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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허균의 민본의식은 요즘의 가치기준과 견주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당시 기준으로는 불온한 것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조선이 멸망하기까지 300여년을 용서하지 못할 만고역적의 죄였을까.
허균과 함께 끝까지 복권되지 않은 정여립(1546~1589)도 억울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촉발된 기축옥사(1589)는 피해자가 워낙 많아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 평균나이가 30세였는데, 정여립은 비교적 빠른 24세에 급제했다. 이이(1536~1598)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서인의 기대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지만, 그의 관운은 거기까지였다. 1584년 든든한 후원자이던 이이가 정여립의 직설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들어 승진을 반대하자 즉각 서인들을 비난하며, 동인의 영수인 이발(1544~1589)의 수하에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서인이 아닌, 임금(선조)이 당적을 바꾼 그를 비난했다. 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진안 죽도로 낙향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대동계가 호남을 넘어 황해도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황해도관찰사 한준과 인근지역 군수들이 정여립과 대동계 무리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의금부가 주모자 추포에 나서자 정여립은 자결했고 아들인 정옥남은 체포되어 문초 끝에 거짓 자백을 했다. 주모자 길삼봉으로 지목된 당시 호남을 대표하던 유학자 최영경(1529~1590)과 제자 40여명이 옥사했고, 10여명이 처형당했다. 이후 3년간 1천여 명이 희생된 이 사건이 기축옥사이다.
이에 견주어 허균의 역모사건은 희생자가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고, 이 사건의 조작배후로 의심되는 이의첨은 훗날 간신배로 재평가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18년 윤 4월 19일 기사는 기준격의 상소와 관련, 사정기관이 국문을 요구한 내용이다. 허균은 천지사이의 괴물이다. 그의 죄는 수레에 매달아 …중략… 그가 평생 해온 일은 악이란 악은 다 행하였다. 잠시라도 국문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결국 4개월 후 저자거리에서 천지간의 괴물로 생을 마감했고,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이 서자여서 저자인 허균도 서얼로 짐작하기 쉽지만, 그의 아버지 허엽은 대제학과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동인의 영수였고, 두 형도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가 동인을 이끈 엘리트 관료였으며, 누이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난설헌이다. 본인 또한 26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3년 뒤 중시(重試, 당하관 이하 문무관이 보는 과거로 급제성적에 따라 1~4계급까지 특진)에서 장원을 차지한 수재로 당대 최고의 금수저였다.
홍길동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선조실록
선조는 허균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 본 것 같다. 선조실록 1594년 5월 3일 기사는 원접사(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정2품 관원) 윤선각이 종사관을 추천한 내용이다. 비변사가 뛰어난 문장과 재주를 보고 허균을 종사관에 천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너무 연소하고 경험이 없어 적합하지 않으니 신흠으로 명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때는 허균이 과거에 급제한 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인데, 임금은 신흠이 아니어도 종사관 삼을 사람은 많다며 허균을 고수했다.
29세이던 1597년 중시에서 장원을 한데 이어 다음해 10월 13일 병조좌랑에 제수되는데, 이때 이미 자유분방하고 가벼운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날 기사는 병조참의 민몽룡 등 6명에게 관직을 제수한 내용인데, 사관은 유독 허균에게만 인물평을 남겼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모든 서적을 널리 읽어 글을 잘한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망하고 볼 것이 없다. 실록은 이날부터 거의 예외 없이 허균에게는 문장은 견줄 자가 없으나 허황되고 경망하다는 인물평을 수식어처럼 붙여 썼다.
조선 500여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인물이 명멸했지만, 허균만큼 부침이 컷던 인물은 많지 않다. 20여 년 관직생활 동안 여섯 번 파직되고 세 차례 유배되었다. 첫 파직은 1599년 황해도 도사(都事, 종7품) 때이다. 황해도에 부임하지 6개월여 만인 12월 25일 기사가 허균의 파직을 요청한 사헌부 보고서이다. 그는 부임하면서 서울에서 데려 온 기생과 함께 살며 관아를 자신의 집에다 두었고, 중방(中房, 지방수령의 종), 기생 등과 함께 몰려다닌다. 그들은 함부로 청탁을 하고 폐단을 끼쳐 온 도내가 비웃고 경멸하니 파직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한 그는 1600년 12월 22일 왕실 장례식에서 조사를 잘 쓴 공로를 인정받아 1계급 특진한데 이어 1년여 만인 1601년 11월 20일 형조정랑(정5품)으로 승진하는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파직되었지만, 뛰어난 문장력과 외교력 덕분에 복직될 수 있었다. 1606년 8월 중국 사신 주지번을 회문시(回文詩)로 기쁘게 한 공로로 삼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실록 1607년 5월 4일은 사헌부가 허균의 탄핵을 요구한 상소이다. 삼척부사 허균은 유가의 아들이면서도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불경을 외고 부처에 절을 하며, 수령이 되었을 때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제를 올렸다. 심지어는 중국 사신에게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해괴하고 놀랍다. 그러나 선조는 예부터 문장을 좋아하는 자들은 불경을 섭렵하였다. 균도 그래서 그런 것이니 처벌할 수 없다. 사헌부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몸만 조정에 있지 사실상 중이나 다름없다며, 파직은 물론 앞으로는 서용하지 말 것을 연일 상소해 윤허를 받았다.
허균의 파직과 복직은 광해군 대에 들어서도 이어졌다. 광해 즉위년인 1608년 공주목사에 복직했으나 8개월여 만에 암행어사에게 비위가 적발되어 또 다시 파직되었는데, 이 기간이 훗날 계축옥사와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다. 허균은 부임 하자마자 서자인 친구 심우영과 이재연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방수령이 된 덕분에 나는 넉넉하게 살지만, 땟거리를 걱정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며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공주관아의 식객이 된 심우영이 계축옥사의 발단이 된 강변칠우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다.
허균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부류가 기생이었다. 그는 한때 해운판관(海運判官, 전라·충청도 조운업무를 담당하는 종5품)을 지냈는데, 이때 남긴 기록이 「조관기행」이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교류한 부안 기생 매창을 비롯한 광산월, 낙빈, 춘방 등 여러 기생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실록에는 기생에 빠져 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1606년 9월 6일 기사인데, 이날 조정은 동부지중추부사 신중엄 등 17명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사관은 최하위직인 수안군수 허균에게만 인물평을 했다. 균이 강릉에 있을 때 명기(名妓)에 혹하여 어미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분상(奔喪, 부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감)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사고와 온갖 기행으로 젊어서부터 허황되고 불온한 자로 낙인찍혔지만,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문장과 학식으로 험로를 헤쳐 온 그였지만,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대형사고가 났다. 1613년 역모로 비화되는 강변칠우(江邊七友)사건이다. 조선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는 명문가의 서자 7명이 여주 남한강가에 살며 크고 작은 강도짓을 일삼았다. 푼돈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이들은 크게 한 건 하기로 하고, 문경세재를 넘는 은상(銀商)을 습격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사상자가 발생했고, 체포에 나선 포도청에 검거되었다.
단순 강도사건을 계축옥사로 비화시킨 건 대북파의 핵심인물인 이이첨이다. 체제에 불만이 많은 서얼들이라는데 착안한 이이첨이 대북파의 입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이 사건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역모로 조작·확대한 것. 이때 태인에 머물고 있던 허균은 강변칠우의 역모 자백소식을 듣자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직감했다. 서둘러 상경한 그는 대북파의 핵심인물로 동문수학한 이이첨을 찾아가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이첨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고, 당상관인 형조참의(정3품)를 선물했다.
호민론(豪民論, 시대적 변고가 있을 때 자신의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백성)을 통해 천하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백성뿐이라며 성리학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그였지만, 대북파의 신임을 받기 위해 철저하게 변절했다. 이이첨의 천거로 대북파의 행동대장이 된 허균의 첫 임무는 인목대비 폐위였다. 당대에는 따를 자가 없다는 문장력을 발휘해 상소문을 썼고, 그가 이끄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결국 갓 들어 온 신입 당여가 대북파 최대 지분을 가졌지만,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했던 영의정 기자헌을 꺾었다. 이 일격으로 광해군의 큰 신임을 얻었고, 대북파내의 정치적 영향력도 수직상승했다.
허균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대북파 전향 3년만인 1616년 8월 3일 형조판서에 오른데 이어 좌참찬(정2품)으로 승진했다. 허균의 독주를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구세력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617년 12월 24일 허균의 제자이자 당여이던 예조좌랑 기준격이 역모를 상소했다. 허균에게 판정패했던 기자헌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허균의 집을 드나들던 그는 공주목사 때 심우영을 식객으로 불러들인 것부터 여러 사례를 구체적으로 고변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광해와 이이첨의 대응이다. 고변내용이 구체적이었고, 그동안 보여 온 허균의 개혁적 성향으로 보아 한번쯤은 점검이 필요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외면했다.
고변에 대한 허균의 반박상소와 국문을 요구하는 상소가 반복되던 중 1618년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온다.”는 벽서가 붙었다. 곧이어 이 벽서를 허균의 심복인 현응민이 붙인 것으로 밝혀졌고, 허균은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없게 되었다. 허균은 서둘러 자신의 저서와 문집들을 딸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날인 8월 16일 체포되었다. 이때 옮겨 놓은 글의 일부를 외손인 이필진이 편찬한 것이 허균의 명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이다. 그는 끝까지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잘 짜여 진 각본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돼 벽서가 붙은 지 14일 만인 8월 24일 현응민, 우경방, 하인준 등과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이를 두고 위기의식을 느낀 이의첨의 조작설, 광해군의 혁명 묵인설 등 여러 의문이 여전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서출이라고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 나라는 조선뿐이고, 천하에 두려워 할 것은 백성뿐이라는 그의 생각이 당시 질서에는 반했었겠지만, 400년이 지나도 용서받지 못할 만고의 역적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천재 허균이 꿈꾸었던 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되었다. 400주기를 맞아 법적이든, 사회적 합의이든 가능한 방법으로 하루 속히 복권되어 그의 민본사상이 재조명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