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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민둥산을 푸르른 산으로 만들다 < 산림녹화 >

봄을 알리는 철쭉, 진달래가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하면서 산에는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지금 우리나라의 산은 울창한 숲으로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4월호에는 식목일을 맞아 산림녹화 기록물들을 통해 우리나라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과정을 살펴본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등산객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전국 어딜 가나 주말은 물론 심지어 평일에도 멀리 또는 가까이에 있는 산들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등산이 생활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주거지 주변에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크고 작은 산이 많기도 하다.

대도시 중심에서 바로 눈앞에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나라, 조금만 걸어도 금방 산에 오를 수 있는 나라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몇 나라 되지 않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산들은 사시사철 푸르고 한 발짝만 들어가도 숲이 우거져 등산로 외에는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우리나라는 국토의 65%가 울창한 산림으로 형성되어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강산이고 광고카피처럼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다.

그렇다면 한국의 산들이 예전부터 이렇게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지고 푸르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산이란 산은 온통 벌거숭이 민둥산들이었다. 높고 낮은 산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시뻘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비만 오면 홍수가 나고 토사(土砂)가 흘러내려 곳곳에서 일어나는 산사태는 그야말로 연중행사였고 예사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산이란 산은 모조리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도저히 가망이 없는 절망의 땅이었다.

우리나라의 산이 사막화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돌로 난방을 하다 보니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 일제가 목재를 수탈할 목적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들을 마구 베었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산림은 더욱 황폐해졌다. 전쟁 후 마땅히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다 보니 화전(火田)과 도벌(盜伐), 나무장수가 성행했다.

그러다보니 1950년대에 이미 전국 산림의 절반은 헐벗은 민둥산으로 변했고, 풀 한 포기 없이 완전 황폐화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에 정부는 6.25전쟁 직후 이른바 ‘사방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원조 밀가루를 지급해가며 식목에 나섰지만 크게 효과가 없었다. 여전히 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있는 현실에서는 나무를 심는 식목이 나무를 베어내는 벌목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사방사업 실시에 관한 건(1959) >

결국 1960년대 초부터 정부는 ‘산림녹화운동’을 시작하고 당시 도벌을 밀수, 마약, 깡패와 같이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철퇴를 내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기만 하면 누구든 엄벌에 처한다는 방침을 실행했다. 1961년에는 「산림보호법」을 공포하고 시행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순전히 땔감을 위한 연료림을 조성하는 한편 탄광을 개발해 석탄을 캐냈다.

  • 사방공사(1959)

  • 제1회 사방의 날(1960)

  • 전국산림대회(1963)

때마침 정선선과 태백선 등의 철도가 개통되어 1,200백 만 톤의 석탄을 강원도 일대에서 실어 나르기가 쉬워졌다. 이를 이용해 온돌 주택과 부엌 아궁이를 연탄을 쓰는 구조로 개량해 난방과 취사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연료림 조성과정에서는 임학자 현신규 박사의 공이 컸다. 일본 소나무를 개량해 병충해에 강하고 보다 크게 자라는 신품종을 개발해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에까지 공급했다. 그리고 필생의 야심작 ‘은(銀)수원 사시나무’ 개발에 성공했다. 이 나무는 나중에 그의 성을 딴 ‘현(玄)사시나무’로 불리게도 되었고, 멀리 뉴질랜드로 수출돼 지금도 무성한 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그는 철저한 산림부흥론자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거국적인 식목사업에 그를 동참시켰다.

1964년 서독 방문에서 박대통령은 유럽의 우거진 숲을 보고는 우리나라 산들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농지도 좋고 공업도 좋지만 산이야말로 우리 국토의 지붕이란 생각으로 본격적인 식목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여나갔다. 정부차원에서 ‘치산(治山)7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산림해충방제 범국민운동을 전개했으며, 대통령비서실을 중심으로 산림복구종합계획을 수립해 해당 부처로 내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1967년 산림청을 발족하고 식목과 조림 등 모든 치산녹화사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 썸네일 이미지

<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1961) >

또한 국민들의 노력도 빠질 수 없다. 나무를 심고 사방공사를 하는데 있어 해당 지역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가령 영일만 일대는 완전 벌거숭이산들로 나무를 심을 수 없는 토질이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 나무를 심기 위해 부녀자뿐만 아니라 어린이까지 동원되어 5년 동안 밤낮없이 물동이를 이고 지고 날랐다.

정부는 1971년에 ‘국립공원’을 도입하고, 도시 근처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그린벨트를 지정해 무분별한 개발을 막았다. 1972년부터 새마을운동의 시작과 함께 내무부에서 산림녹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이 무렵부터는 식목은 물론 식목 후 사후관리에 더욱 신경쓰기 시작했다.

식목과 동시에 나무의 묘목을 키우는 양묘(養苗)사업도 벌였다. 그 당시만 해도 논·밭농사 외에 수입이 없던 농촌에서 양묘사업을 통해 묘목도 공급하고 농가는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산림조성과 보호에 국민의 참여 촉구 썸네일 이미지

< 산림조성과 보호에 국민의 참여 촉구(1973) >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는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기적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는 아름다운 산들이 원래부터 있었던 당연한 것이 아닌 수 십 년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 산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