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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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세계를 향해 펼친 국제장터 한마당 “엑스포”

2030 세계박람회 개최지 선정 일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힘차게 응원하며, 이번 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열린 ‘엑스포’의 기록속으로 들어가보자.

엑스포는 박람회를 뜻하는 Exposition를 줄여 Expo라고 한다.
엑스포는 흥미롭고 몰입감 있는 활동을 통해 선택된 주제 안을 여행하도록 함으로써, 인류가 직면한 근본적인 도전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글로벌 행사이다.
국제박람회기구(BIE)가 공인하는 박람회는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제로 하는 ‘등록(월드)박람회’제한적인 특정 주제로 열리는 ‘인정(전문)박람회’로 나누어진다.

등록박람회는 ‘0’과 ‘5’로 끝나는 해에 개최되는데, 주제, 전시 규모에 대한 제한이 없고 기간도 최대 6개월까지 개최 할 수 있으며, 참가국에서 전시 비용을 지불한다.
인정 박람회는 정해진 주제와 관련된 내용으로만 전시 가능하며, 규모 25만㎡이내, 기간 3개월 이내로 개최되는데 개최국에서 전시관을 건축하여 참가국에 제공하게 된다.
1993년 열린 ‘대전엑스포’와 2012년 개최된 ‘여수엑스포’는 ‘인정박람회’이며, 2030 부산세계박람회가 유치되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등록박람회’가 된다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 것은 전 세계에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변방의 어디쯤 있는 지도 잘 모르고, 전쟁 이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한다니!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전세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으며 ‘메이드 인 코리아’의 수출경쟁력과 문화, 국가이미지 등 모든 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정부는 서울올림픽이 끝난 1988년 말부터 또 다른 국제행사인 세계박람회 유치 준비를 시작하였다. 각종 국제행사를 통해 국가의 위상과 품격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박람회기구(BIE)의 공인을 받기 위한 교섭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부터 비관적 의견과 반대론자들의 벽에 부딪쳐야 했다. 우선 신청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비용문제 때문에 국제 여론도 부정적이어서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한국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기 위해 총력전을 기울였다. 이때까지 세계박람회는 선진국 위주의 축제였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이제는 개발도상국의 참여도 이끌어내야 할 때 임을 알리고, 한국은 경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기 위해 교섭을 하고 있다는 부분도 강조해 나갔다. 한국에서의 세계박람회 개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고, 이것이 곧 국제박람회기구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 노태우 대통령 대전엑스포
    기공식 참석 (1991)

  • 정원식 국무총리 대전EXPO 건설된
    전시 모형 관람 (1992)

  • 대전엑스포 ‘93 연예인 자원봉사단
    공연 (1993)

마침내 1989년 12월에 열린 제106차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우리나라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조사단의 보고서를 토대로 1990년 8월 총회에서 대전세계박람회를 공인한다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이로써 대전엑스포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 개최하는 국제박람회가 되었다.

대전엑스포 93(1991)

대전세계박람회 추진상황 점검결과 통보(1992)

대전엑스포는 1993년 8월 7일에서 11월 7일까지 93일간 대전의 대덕연구단지 일대에서 열렸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었고,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었다. 그래서 대전엑스포를 일명 ‘과학엑스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 국가와 33개의 국제기구, 그리고 우리나라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고, 국내외에서 1,450만 명이 관람했다.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열린 대전엑스포는 전세계의 우려와 달리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였음은 물론 과학기술과 경제, 문화, 환경, 지역발전 등 여러 분야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산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대전엑스포는 생산유발액 3조 643억 원, 소득유발액 1조 2,500백억 원, 고용창출효과 21만 2,000여 명 등 경제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고, 수입유발액은 4,455억 원으로 국제수지 개선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왔다. 개최도시인 대전은 새로운 수요창출과 도시기반 정비, 시민의식 향상 등 눈에 보이는 변화와 함께 과학기술 분야의 성장잠재력을 갖춘 도시로 거듭나게 됐다.

1993년 대전에서 개최되는 엑스포 93의 준비과정과 개막식 및 경관(1993)

대전엑스포는 기존에 개최국의 국력을 과시하던 엑스포 방식과 달리 각 국의 창의성에 중점을 두는 형태의 엑스포를 시도해 참가국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엑스포 사상 가장 뛰어난 ‘정보화 엑스포’로 평가받았다. ‘IT강국’ 한국의 위상을 유감없이 발휘해 모든 관리와 운영을 전산시스템으로 처리했다.

여수엑스포는 그로부터 약 19년 뒤인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대전엑스포 이후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치러지는 ‘인정박람회’였다.

대전엑스포가 사상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개최된 것이었다면, 2012년의 여수엑스포는 한국의 도약을 상징하는 국제박람회였다고 할 수 있다. 대전엑스포 이후 19년 동안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전 세계에 보여주는 박람회였다. 첫 유치경쟁에 고배를 마시고 두 번째 신청에서 개최권을 획득한 여수시는 정부의 지원 아래 신항만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도시개조작업에 들어갔다.

여수엑스포의 주제는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으로 정해졌고, 이 때문에 ‘여수해양박람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제관, 국제관, 한국관, 국제기구관 외에 해양생물관을 만들어 바다를 주제로 한 박람회임을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조용하던 남쪽 바닷가의 항구도시가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장소로 변신했다. 몰려드는 관람객들을 위해 고속열차 KTX가 운행되었고, 전 세계에서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K-팝 가수들의 공연이 엑스포 기간 내내 이어졌다. 한국의 세계화와 글로벌화의 한마당이 해안과 해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향기가 함께 어우러져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