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기록하다
- 하늘을 관측하다
- 천문학의 토대를 마련하다
- 25일간의 기록, 핼리혜성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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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학자 김부식이 1145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 책에는 천문이나 기상 등 삼국시대의 자연현상에 대한 내용이 1,000여 건 기록되어 있다.
① (신라) 파사 니사금 6년(85) 4월 客星入紫微 (해석: 자미별자리에 객성이 나타났다)
② (고구려) 차대왕 8년(153) 12월 客星犯月 (해석: 객성이 달에 근접하였다)
③ (백제) 기루왕 9년 (85) 4월 客星入紫微 (해석: 자미별자리에 객성이 나타났다)
*자미(紫微):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있는 별로서 자궁(紫宮)이라고도 하였다.
<객성(客星)에 관한 기록>
* ‘객성(客星)’ 이란 동아시아 천문학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밝은 별을 의미하며 주로 신성, 초신성, 혜성 혹은 변광성과 같은 천문 현상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는 ‘객성’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다양한 천문 관측 기록이 남아 있다.
① (신라) 파사 니사금 6년(85) 4월 客星入紫微 (해석: 자미별자리에 객성이 나타났다)
② (고구려) 차대왕 8년(153) 12월 客星犯月 (해석: 객성이 달에 근접하였다)
③ (백제) 기루왕 9년 (85) 4월 客星入紫微 (해석: 자미별자리에 객성이 나타났다)
*자미(紫微):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있는 별로서 자궁(紫宮)이라고도 하였다.
<객성(客星)에 관한 기록>
* ‘객성(客星)’ 이란 동아시아 천문학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밝은 별을 의미하며 주로 신성, 초신성, 혜성 혹은 변광성과 같은 천문 현상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는 ‘객성’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다양한 천문 관측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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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고려사는 조선 초기 고려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물 등에 관한 내용이 정리된 책이다. 고려사의 구성은 세가, 지, 표, 열전, 논찬으로 나뉘며 이 가운데 지(志)는 천문지, 역지, 오행지 등으로 나뉘어 있다. 천문지에는 관측된 천문 및 기상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① 문종 27년(1073) 8월 客星見于東壁星南 (해석: 객성이 동벽 성남쪽에 나타났다)
② 문종 28년(1074) 7월 客星見于東壁星南大如木瓜 (해석: 객성이 동벽 성남쪽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모과만 하였다)
① 문종 27년(1073) 8월 客星見于東壁星南 (해석: 객성이 동벽 성남쪽에 나타났다)
② 문종 28년(1074) 7월 客星見于東壁星南大如木瓜 (해석: 객성이 동벽 성남쪽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모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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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명종 원년(1171) 10월 日有黑子, 大如桃 (해석: 해에 검은 점(흑점)이 있었는데 크기가 복숭아만 하였다)
기록에서는 흑점의 크기를 묘사할 때 계란, 자두, 복숭아 등 일상적인 물건에 비유하였다. 이 밖에도 「고려사」에는 다양한 천문 현상 관찰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서는 흑점의 크기를 묘사할 때 계란, 자두, 복숭아 등 일상적인 물건에 비유하였다. 이 밖에도 「고려사」에는 다양한 천문 현상 관찰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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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첨성대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건립된 천문관측대로 당시의 높은 과학수준을 보여준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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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첨성대(개성)
고려의 옛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 서문 밖에 있던 관측시설로, 길이가 약 3미터인 정방형 화강석 돌기둥 다섯 개 위에 길이 3m인 돌판을 깔고 관측 기구를 올려놓을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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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 관천대(서울)
서울 관상감 관천대는 1434년(세종16)에 설치된 서운관의 관측대로서,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물시계와 관련한 일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서운관은 1466년(세조12)에 관상감으로 1894년(고종31)에 관상소, 1907년에 측후소로 바뀌어 현대식 시설을 갖추기 시작할 때까지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관천대는 직사각형의 돌로 난간을 둘러 놓았고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조성되었다. 관천대 돌 위에 천체관측 기기인 간의를 설치하였고,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하던 정위표의 흔적만 남아 있다.
관천대는 직사각형의 돌로 난간을 둘러 놓았고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조성되었다. 관천대 돌 위에 천체관측 기기인 간의를 설치하였고,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하던 정위표의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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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1416~1464년(세조10)
조선 전기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등을 저술하였으며, 세종대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한 천문학자이다.
이순지와 더불어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칠정산외편』 등 많은 천문 역서를 교정하고 편찬하였다.
이순지와 더불어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칠정산외편』 등 많은 천문 역서를 교정하고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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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 : 1406~1465년(세조11)
조선 전기 승정원 좌부승지,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천문학자이다.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였고,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하고 제작하였으며, 1457년에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을 완성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였고,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하고 제작하였으며, 1457년에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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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미상)
조선 전기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 활동하며 천문 관측 기계인 혼천의,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등을 제작한 학자이다.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고,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의 관측기계를 완성하였다. 1437년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앙부일귀(仰釜日晷)* 등을 만들었고, 1434년에는 자격루(自擊漏)*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및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로 만든 것이었다.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고,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의 관측기계를 완성하였다. 1437년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앙부일귀(仰釜日晷)* 등을 만들었고, 1434년에는 자격루(自擊漏)*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및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로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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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천문대직제(안)
1974년 9월 13일 「대통령령 제7248호」로 제정되어 국립천문대의 설치, 하부조직, 공무원정원 등을 규정하였다. 국립천문대는 이후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이어지면서 천문학 분야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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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철
이원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로 대한민국 교육과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한 과학자이다. 1926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28년에는 대학 구내에 한국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설치해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미군정하에서 일제의 기상대를 인수해 관상대장으로 부임하였고 이를 국립중앙관상대로 발전시켰다. 1948년 초대 중앙관상대장으로 임명되어 1961년까지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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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철
이원철은 박사 논문을 통해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 변광성임을 증명하여 세계 천문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삼천리』는 ‘원철성(星)’을 발견한 과학자로 이원철을 소개하였다. -삼천리 3호(1929년 2월),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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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발령 통지에 관한 건(이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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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천문대 설치사업일지
1967년 5월 30일 국립천문대설치위원회(가칭)를 처음으로 개최하였고, 1967년 6월 1일 천문대 설치 5개년 계획안 작성을 시작했다. 그 밖에 천문대 설치위원회 규정, 대외기술 원조요구 계획 내용, 천문대 후보지 선정안과 이들 후보지에 대한 현지 조사 날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국립천문대 설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기록물이다.
국립천문대 설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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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 외자구매요청 기안 및 수의계약 사유서
이 문서는 『망원경구매』 문서철 중 포함되어 있는 기록물로 24인치 반사망원경 22개의 제작 실적을 근거로 수의계약의 필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후 조달청에 외자 구매 요청을 하여 1972년 12월 26일 천문대 1호 망원경의 구매계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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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인치 망원경 상세 스펙 기재 문서
24인치 망원경 상세 스펙이 담긴 문서로 망원경 외자구매요청 기안문의 첨부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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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61cm 망원경
1974년 12월 소백산 연화봉에 61cm 망원경(미국 Boller & Chivens사)이 설치되었다. 이 망원경을 통해 1975년 12월 27일 처음으로 오리온 대성운을 관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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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천체관측소
1978년 9월 29일 국립천문대 소백산 천체관측소 준공식이 개최되었다. 이 관측소는 61cm반사망원경 등을 갖추고 본격적인 천체 관측연구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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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변측후단자
성변측후단자는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천변(天變)이나 성변(星變)을 관측해서 기록한 자료이다. 성변측후단자에는 1759년 관측된 핼리혜성의 위치, 꼬리에서의 거리는 물론 길이, 밝기, 이동 경로 등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의 높은 천문학 수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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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변측후단자
“지금 3월 7일 정해일 밤 5경의 파루 후에, 구름이 짙게 끼고 비가 뿌리며 새벽까지 개지 않아서, 허수의 도수 안에 보이던 별을 관측할 수 없다”
관상감 관측자명
핼리혜성 관측기록: 길이, 모양, 크기, 위치 등을 그림으로 기록
관상감 관측자명
핼리혜성 관측기록: 길이, 모양, 크기, 위치 등을 그림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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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변측후단자
“지금 3월 14일 갑오일 밤 5경의 파루 후에, 혜성이 허수의 도수 안, 이유성의 서쪽에 보인다. 북극거리는 118도이다. 별의 형제와 별의 빛깔은 어제보다 더 희미하다. 꼬리의 자취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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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실록 65책 93권
관상감의 기록은 승정원일기와 실록에도 남겨져 있다. 성변측후단자 속 핼리혜성에 대한 기록은 같은 날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조대왕실록』 65책 93권 10장 B면/ 실록 1759.3.10. (양력 4월 6일)
“혜성이 이유성(離楡星) 아래 나타났다.”
“구름이 끼어서 혜성이 보이지 않았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고 혜성이 나타났다”
『영조대왕실록』 65책 93권 10장 B면/ 실록 1759.3.10. (양력 4월 6일)
“혜성이 이유성(離楡星) 아래 나타났다.”
“구름이 끼어서 혜성이 보이지 않았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고 혜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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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실록 65책 93권 11장 A면
“혜성이 다시 나타나고 우박이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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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1759.3.11.(양력 4월 7일)
“5경의 파루 후에 (핼리)혜성이 허수의 도수 안, 이유성의 위에 보였는데, 별의 형체는 하고대성*과 같고, 빛깔은 푸르스름했으며, 꼬리의 길이는 1자 5치 가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