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국토의 80%를 황폐화시키고 수십만의 고아와 전쟁 미망인, 1천만 이산가족을
남겼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여성들은 삶의 터전을 일구어내기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만 했다.
해녀, 노점상, 버스 안내양, 외판원, 공장 노동자, 파독 간호사 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지난 시절, 여성들이 보여준 강인함과 희생정신은 전쟁의 비극을 딛고 생계와 경제성장의
최일선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원동력이 되었다.
해녀는 1930년 당시 제주도에 30,000여 명이 넘었으나, 1970년에는 23,000여 명이 활동하였다가 이후 점차 감소하여 현재 약 5,000여 명의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 세고 물결 센 저 바다를 건너가…”
제주 해녀의 노랫말처럼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다에 몸을 맡긴 해녀들은 고통을 참아내다 물위에 떠올라 태왁(해녀들이 사용하는 부표)을 끌어안고 ‘호오이’ 숨비소리(숨 고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해녀들의 거친 숨소리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생계를 꾸려온 여성들의 강인함을 볼 수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속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직업 가운데 하나가 노점상이었다.
직업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노점상에 대한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해방 당시 441개였던 재래시장이 1977년 1,685개로 증가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거리에 펼쳐진 ‘좌판’과 머리 위에 올린 ‘고무대야’는 길 위의 궁핍한 삶을 견디어 낸 여성들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1961년 서울 시내버스의 안내원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체되었다. 버스 안내양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로 상경한 시골 소녀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직업들 중 하나였다.
1961년 12,560명이었던 버스 안내양은 70년 후반 5만여 명까지 이르렀으나, 1982년 시민자율버스 도입과, 1989년 버스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 운수사업법 조항이 삭제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평균 연령 18세, 하루 18~19시간의 노동과 평균 2,400원(1966년 기준, 당시 제조업 노동자 평균임금 8,100원)이라는 저임금의 고된 직업이었던 버스 안내양은 60~70년대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조명 받지 못한 여성 노동의 표상이라 하겠다.
1960년대 공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여성 노동 수요가 폭등하였다.
특히 제조업 부문에서 남성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인 여성의 고용이 확대되면서 여성 노동자의 수는 빠른 속도록 늘어났다.
1961년 41.1%이던 제조업 부분 노동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71년 44.2%,1981년에는 45.6%로 늘어났으며, 특히 1960~70년대 한국의 제조업을 대표했던 섬유산업의 경우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70%를 넘었다.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고된 노동을 묵묵히 이겨낸 여성 노동자들의 땀방울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