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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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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광복과 '독도=고유영토' 회복기(1945~)

독도 접안시설 공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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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형상의 세파를 굳건히 견디어 오면서 동해의 푸른파도를 가르며 우뚝 솟아잇는 한반도 최동단의 독도. 절해의 고도에 민족의 웅지를 상징하는 대역사이 경험이 동해의 푸른물결을 타고 만방에 울려퍼지고 있다.

전체면적 5만4천여평, 동서도 두개의 섬과 서른세개의 크고작은 바위와 암초로 구성된 독도의 비경은 조물주의 마지막 예술품인듯 절묘하다. 뭍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세인에게는 지도속에서만 기억이 새로웠던 섬이였으나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국토의 동쪽 끝으로 애착을 심어왔다. 신라 진흥왕 13년에 우산도로 명명된 독도는 조선시대에는 삼봉도, 가지도로 칭하다가 고종18년 현재의 명칭인 독도로 불리어졌고, 오늘 우리는 후손에 물려줄 조반시설 대역사를 마감한 것이다. 6.25동난의 혼란을 틈타 한때는 어군을 탐한 일본인들이 미국기를 달고 일본영역 표지를 설치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나 1953년4월27일 울릉도 청장년 서른세명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삼년간 수비해오다 1956년12월30일 국립경찰에 경비업무를 인계함으로써 오늘도 경계업무에 여념이 없는 젊은 우리 초병들에 투혼과 숭고한 조국애로 승화되어 아직도 식민지 발상을 버리지 못한 바다건너 저들의 망언을 허공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오천만년전 화산분출로 생성되어 절벽과 암초뿐인 절해고도 독도의 바다위에 순수한 우리기술로 오백톤급 선박이 조반할수있는 무량장 길이 80미터 진입통로 100미터 간이조반시설 20미터를 완공했다는 것은 우리국민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시공사인 삼혁개발은 우선 국내기존장비로는 시공이 불가능한 이 난공사를 위해 바다위의 작업장이라 할수있는 자기승각식 부선 셉썬두척과 케이슨 운반및 장비운반용 프로딩 도크 한척을 도입 현지여건과 군사조건에 맞게 부산항에서 수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했다. 독도조반 시설공사야 말로 뭍에서는 상상도 할수없는 악조건의 연속이였다.

천공개 백호우 펌프로시아 그람샐 박한개식과 70톤의 크레인을 탑선할 수 있는 쎕썬은 자체의 무게만도 천이백톤이나 되지만 이 모든것을 프로딩 도크에 싣고 350킬로미터 떨어진 망망대해 건너 독도현장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생사를 초월한 대모험이 장정이였다. 조반시설 공사는 당초 셀브록식이였으나 독도현지의 여건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예측불가한 하랑에 충분히 견딜수 있고 지진이 자주발생하는 일본과 인접한 지리적 이유때문에 내진설계를 적용한 케이슨 용법으로 변경하였다. 독도조반시설은 백년대개로 후손에 물려줄 대역사라는 인식과 해상조건이 나쁜 독도의 공사일정을 최소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설계를 변경하여 공사시행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피해예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케이슨 하부기초부분공사인 기초사석고르기를 시공하기 위하여 암반을 캐내고 준서로 케이슨 가장자리 하부에는 돌망태로 기준틀을 짜고 가운데 구간은 사석투하 후 잠수부가 기초고르기를 하고 그 상부에 케이슨을 거치하여 독도현지에서 해상작업을 최소화하면서 정밀한 시공이 되는 공법으로 시행하였다. 울진군 후포는 독도조반공사에 전진기지로 케이슨 제작은 물론 모든 생필품의 공급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길이 20미터 폭 14미터 높이 6.5미터에 천이백톤에 중량을 가진 케이슨을 후포에서 프로딩 도크에 싣고 망망대해 북도까지 224킬로미터를 예인해야 하는 목숨을 건 항해, 그것도 네번씩이나 반복해야 하는 모험은 감히 어느나라 누구도 상상할수없는 우리역군들만의 용기이며 투철한 나라사랑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악조건의 난공사라 일본언론이나 건설업계에서조차 우리나라 항만시공 능력으로는 해낼수없다고 속단했을 뿐아니라 우리기술진의 공사진행과정을 지켜보고선 정식으로 공사중지요청과 해안보안청 순시선을 동원, 공사진행을 방해하기도 했다. 케이슨이란 쉽게 말해 우리나라 이층집 단독주택 두채를 합친것 같은 크기에 뚜껑없는 콘크리트 상자다. 물을 넣으면 바다에 가라앉고 물을 빼면 물위로 뜰수있는 구조물이다.

드디어 착공 11개월만인 96년10월23일 케이슨 1항의 거치를 완료하고 케이슨 내부의 속채움 공사를 시작했다. 독도조산시설 공사의 어려움은 섬전체가 까가지른 절벽으로 되어 있고 빈터가 없어 공사용 소요자재의 보관장소나 인허의 숙식을 할수없어 투입된 장비자제등이 선박위에 탑재된 상태로 공사가 진행되는 해양공사이기 때문에 종사자들의 피로가 더욱 증가되었고 특히 독도에서만 기생하는 날파리 종류인 해충 깔다구의 극성 때문에 무더위 속에서도 양말과 장갑을 끼고 자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했다.케이슨 3함이 제작완료된 97년은 공사완공을 앞당기기 위해 투입종사원 모두는 피와같은 땀을 흘려야 했다. 97년 4월16일과 25일 2회에 걸쳐 장비가 투입되어 5월11일에는 케이슨3함까지 예인을 완료하고 26일에는 2함 거치완료 6월6일 케이슨 3함 거치완료, 13일 드디어 4함이 거치완료될때까지의 독도작업일수는 2함 거치에서부터 불과 19일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너무도 엄청난 공사를 시공한 장거였다.

케이슨 한개에는 120개의 속채움 부록이 필요하여 480개의 부록이 4개함에 거치완료된것은 97년 6월30일 케이슨 속채움 사슬도 한달 후인 7월30일에 완료됐다. 독도조반시설 공사는 뱃길로 수백리의 먼거리를 쎕선운반에서부터 개당 일천톤이 넘는 4개함의 케이슨은 물론 공사에 소요되는 모든 자재인 모래,자갈,시멘트,철제,콘크리트,사슬용 물과 식료품 심지어는 먹는 물까지도 육지에서 실어날라야 하는 난공사였는가 하면 망망대해 혹한에 위치하여 예측불허하는 현지의 기후또한 공사진행에 가장 최악의 조건으로 연평균 67회의 폭풍은 지면에서 35미터의 자기승강능력을 가진 쎕선을 올려 파도를 피할수 있지만 초속33미터 이상이 강한 태풍내습시에는 투입장비및 전인원이 울릉도로 대피하는 계획도 세워야 했다. 연중 맑은날이 55일밖에 되지 않는 독도의 기상조건 때문에 해상작업일 경우 정상작업가능일수가 365일중 겨우 60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모든공사계획은 치밀해야 했고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관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함으로써 공사는 항상 목표를 초과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상이 양호할 때면 시공사는 물론 책임감리단까지 직접 독도현장의 기술진들과 선박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24시간 작업을 시행함으로써 종사원 전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시의 오차없는 성실시공 품질에 앞장섰다. 국토를 매김하는 대역사에 참여했다는 보람을 가슴 벅차게 느끼며 해상기상여견이 양호할때면 밤낮구분없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들. 그래서 노는 날보다 일할수 있는 맑은 날이 더 기다려졌고 하루종일 보이는 것은 갈매기와 거센파도뿐인 악천후에 시달렸던 종사자들이였다. 또한 예인선 선원들은 전진기지인 후포 앞바다와 목적지인 독도의 해상날씨가 달라 후포에서 출발한 선박이 다시 후포항으로 회항하는 사례가 빈번했는가 하면 예기치 못한 폭풍으로 끌려가던 선박이 전복되어 2천미터의 해저에 자재를 빠뜨려 못쓰게된 사례까지 있었음에도 날씨가 회복될 기미만 보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친동해바다에 목숨을 걸고 항해를 계속함으로써 차질없는 자재공급으로 공사를 추진케한 역군들이였다.

포항에서 217킬로미터의 섬 울릉도. 그 섬에서 동남쪽 92킬로미터에 위치한 독도. 뭍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풍랑이 심하면 어부들의 피난처 외에는 갈매들의 천해에 요람일뿐 지도속에서마저 점하나로 표시되었던 섬. 이 섬에 조반시설을 했다는 것은 건설공사이기 전에 망망대해 악천우 속에 목숨을 운명에 맡긴 역군들이 체온으로 숨을 불어넣고 땀으로 민족혼을 심은 대역사였으니 그 자랑 영원히 역사속에 큰 획으로 남을 것이다. 1995년 12월19일 착공2년만에 순수한 우리 기술만으로 당초공사계획보다 8개월의 공기를 단축하여 완공의 개가를 올린 독도 조반시설. 11월6일 울릉도 약수공원내 독도박물관 광장에서 있었던 준공식은 내외귀빈과 지역주민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생명을 운명에 맡기고 피같은 땀을 흘린 역군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훈후장이 전해졌다. 망망대해 너무 떨어져 있어 외롭고 서러웠던 섬. 그 서러움을 달래기 위해 수비대를 조직 일본인들에 침략을 물리쳤던 용사들. 무인도를 유인도로 만들기 위해 갈매기를 벗삼아 외로운 섬을 지켰던 사람들. 바다밑을 다듬고 혼을 쌓아 거친 파도위에 뭍을 만든 사람들.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독도는 이제 우리모두의 품에 안겼고 오늘 우리는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는 독도에 민족의 웅지를 심었다. 독도는 이제 외롭지 않다. 암담했던 어제의 서러움을 말끔히 씻어내고 살아있는 국토로 변모하여 우리모두의 가슴속에 벅찬 희망을 심어줄 것이다. 완공된 독도 조반시설은 우리민족의 기상을 더 높였으며 과거 어민의 피신처에서 어업전진기지로 탈바꿈되고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 향하는 21세기 한민족 해양강국에 전초기지로써의 역활을 담당할 것이다.

독도의 지형과 자연환경과 우산도-삼봉도,가지도-독도의 명칭 변천사, 6·25동란을 틈타 일본인들이 어군을 탐해 일본영역표지설치 등의 만행과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 1956년 12월 30일 국립경찰에 경비업무 인계 후 조국애로 철통같은 경계업무 수행.1997년 11월 크기 500t급 선박 접안 가능한 물양장으로서 길이 80m, 진입통로 100m, 간이접안시설 20m의 독도 접안시설을 완공함. 울릉도 약수공원내 독도박물관 광장에서 준공식이 열림.

35208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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