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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선거

역사속으로,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3.15부정선거 부정선거의 숨은 공신 정치깡패
정치의하수인이기붕과이정재의만남

자유당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경찰과 청년단체와 같은 강압적 기구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체계적인 조직이었지만, 공식적인 국가기구임으로 선거운동 전면에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유당은 청년단체를 활용하게 된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정치선전과 세력 확보를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방어를 위해 청년단체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권력의 행동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대부분 주먹패를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1952년 국방장관으로 국민방위군사건을 해결하면서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던 이기붕은 자유당 내 제2인자가 되기 이해서는 당내 정치투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수행해줄 행동대장이 필요했다. 이정재가 선택되었고 이정재는 자유당 감찰부장이 되었다. 이정재는 자신의 주먹사단을 비호해줄 정치우산이 필요했고 이기붕은 자신을 위해 앞장서줄 주먹이 필요했다. 이정재는 ‘검은 잠바부대’로 정치 전면에서 이기붕의 정치적 하수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정재는 이천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동대문특별단부 단장으로 동대문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주먹사단’을 만들어갔다. 당대 최고의 세도를 누리던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 정치깡패 유지광도 이천 토박이들이었다. 이정재는 ‘동대문시장상인연합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이기붕, 곽영주라는 권력의 비호와 폭력을 기반으로 불법을 일삼으며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정재는 고향 이천에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대문갑구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이기붕이 당선이 불확실해지자 이천으로 출마지역을 옮기면서 이기붕과 이정재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정치주먹 1세대 교주 이정재는 실각했다. 그 자리를 임화수가 이어받았고 영리한 임화수는 이정재의 주먹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부정선거의 숨은 공신 정치깡패
315부정선거와 정치깡패

자유당은 국가권력을 총동원하여 유래 없는 부정선거를 기획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배후조직으로 대한반공청년단을 결성했다. 자유당의 자금지원으로 1959년 1월 발족한 대한반공청년단은 신도환을 단장으로 총재에는 이승만, 부총재에는 이기붕을 추대했다. 1960년 2월 10일 대한반공청년단은 자유당으로부터 1억 환의 자금을 받아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확대해 나갔다. 명동의 일부 주먹을 제외하고 대부분 서울의 주먹들은 반공청년단에 가입했다.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새로운 전위부대였다. 임화수는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책임자가 되었으며 1959년 3월에는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예술인들을 부정선거를 위한 선전공작대로 활용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야당 후보자와 유권자에게는 물론이고 폭력과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대에 대한 동원된 정치깡패의 테러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1960년 2월 13일 영등포구청 앞에서 장택상의 대통령후보 추천서류를 빼앗아 간 깡패를 취재 중이던 사진기자 수명이 폭행을 당했고, 3월 7일에는 민주당 경남도당부 거제군당 선거사무장 이○○이 20여 명의 반공청년단 소속 깡패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서 각 지방의 반공청년단을 위시한 정치깡패들의 폭력이 난무하였지만 경찰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이들 정치깡패들의 배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책임을 맡고 있던 곽영주 경무관과 이기붕 자유당 부총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5부정선거를 반대하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제1, 2차 마산시위는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서히 서울의 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수천여 명은 ‘3·15 선거 무효’, ‘마산사건 책임자 처단’, ‘기성정치인 거부’ 등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해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도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학생들은 쇠갈고리와 곡괭이 등으로 무장한 100여 명의 정치깡패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 4·18고대생 습격사건은 대한반공청년단 단장 신도환, 종로구단장 임화수, 유지광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동원된 정치깡패들 역시 대한반공청년단과 유지광 휘하 화랑동지회 회원들이었다.
그러나 4·19혁명과 함께 이승만과 자유당이 무너지면서 정치깡패들도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깡패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자유당이었듯이 자유당과 정치깡패들은 공동운명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격하게 이승만정권의 몰락으로 진행되던 4월 22일 고대생 습격사건의 행동대원인 유지광의 부하 7명이 구속되었으며 주범으로 유지광에 대한 긴급체포령이 떨어졌다. 3.15부정선거를 주도했던 최인규, 이강학, 임화수, 이정재, 곽영주 등이 체포되었다. 이강학과 유지광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유석, 성공회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