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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선거

역사속으로,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민중의 항쟁과 419혁명

3·15 선거는 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렸다. 야당은 여당의 부정선거 계획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구체적으로 입수하여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도 선거 보름 전부터 일어났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마침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 유세가 있는 날이었다. 학생들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를 하게 만든 것이 시위의 계기가 되었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주로 경상도지역 지방 도시를 중심으로 중·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점차 확산되어갔다.
마침내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날이 다가왔다. 이 날 선거의 분위기는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명확했다. 3·15 선거 날 충주시 용산리 제1투표소에서는 3인조 선거 때문에 소동이 발생했다. 3인조 투표는 조원 3명이 일시에 기표소에 들어가야 가능한 것으로 자유당 선거운동원들은 투표장의 혼잡을 막기 위해 충주 용산리 1구 주민은 오전에, 용산리 2구 주민은 오후에 투표 하라고 강요했다. 주민들은 황당한 요구에 항의하며 투표소 문을 밀치고 들어갔고, 이를 막는 과정에서 강당 문이 파괴되는 등 소란이 발생했다.
3·15 선거 당일 민주당 중앙당의 지도자들은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대해 항의는 했지만 뚜렷한 대응방침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민주당 지방당부 인사들은 선거 당일 부정선거에 맞서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마산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대거 항의시위에 참여했고, 마침내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4월 11일 김주열(마산상고 1학년)의 시체가 마산 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눈에 미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날 마산에서는 시민들의 봉기가 다시 발생했다.

민중의 항쟁과 419혁명

두 차례 마산에서의 시민봉기를 거치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갔다. 전국 각지에서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다. 마침내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임으로써 대학생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고대생들은 이 날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학교로 돌아가다가 대한반공청년단 신도환, 임화수 등이 동원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일제히 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을 발사했다 이 날 서울에서만 1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전국적으로는 18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무대 앞 발포 사태 후 전국 5대도시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을 탈당하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취소하는 등 위기 국면을 타고 넘기 위해 정치적 수완을 동원했다.

그러나 4월 25일 계엄령 하에서 서울시내 교수단들이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며 대통령 및 책임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했다. 시민과 학생들이 대거 합세하였고, 이 날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불에 탔다.
4월 26일 아침 일찍부터 시위대는 서울 거리를 메웠다. 마침내 12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중 저항에 의해 정권이 바뀌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4월 혁명’이라 불렀다. 3·15 부정선거는 4월 혁명을 촉발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홍석률(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