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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그날의 기억 그리고 기록 언론 다시보기 동영상 기록물 일반 기록물 5·18 기념재단

그날의 기억 그리고 기록

1980의 꿈 자유 민주주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이후, 독재정권의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1980년을 '서울의 봄', '민주화의 봄'이라 불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이후, 독재정권의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1980년을 ‘서울의 봄', ‘민주화의 봄'이라 불렀다.
회담 사진

1980년 3월 학원민주화 열풍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한다.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월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 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 여 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했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학생과 기층민중의 투쟁에 쐐기를 박은 데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광주, 그리고 계엄군 투입

왜 광주인가
5.17 계엄확대조치가 내려진 뒤에도, 오직 광주에서만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그 시위에 지역사회 시민이 크게 호응했다. 광주는 재야 정치인(김대중)을 통한 ‘민주화' 기대가 큰 곳이기도 했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 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였다.

민주회복,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시위중인 사진

전남대 학생과 공수대원의 첫 충돌

1980년 5월 18일 10시 무렵 전남대 정문 앞에서 200명 남짓한 전남대 학생과 공수대원 사이에 첫 충돌이 있었다.

집필자 <경희대학교 사학과, 김종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