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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
  • 화려한 휴가
  • 가자, 도청으로
  • 님을 위한 행진곡
  • 살아오는 광주

그날의 기억 그리고 기록 언론 다시보기 동영상 기록물 일반 기록물 5·18 기념재단

살아오는 광주

1997 5.18 국가기념일 항쟁에서 민주화운동으로 1988년 4월 1일, 그동안 '공주사태'로 불려오던 '5 18 광주항쟁'의 의미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종합적인 보상 방안을 발표한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1980년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등장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은 과거 유신정권보다 더욱 엄격한 권위주의 지배 체제를 구축한다.

  • 삼청교육대
  • 상무대 군사재판
  •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월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 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 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묘지 이장중인 사진

망월동 묘지 이장 책동

연고자를 찾을 수 없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 와 망월동에 묻혔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망월동에 묻힌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유족들을 회유하고 협박했다. 이런 회유와 협박으로 1984년 11월까지 모두 26기의 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묘지 이장 책동에 맞서 유족들과 학생, 사회운동단체가 싸웠다. 제3대 유족회장 전계량 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묘지 이장 책동은 전두환 정권의 잔학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망월동 5·18 묘역이 성지로 부각되고 그것이 시민민주운동 결집의 상징이 되는 것에 대한 파괴공작인 것입니다. 그것은 5·18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고, 한 번 죽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행위였습니다. 학살한 시체까지 이용하는 독재 권력의 잔학성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

광주, 청문회가 시작되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4.26 총선 정국을 맞이한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4월 1일, 그동안 ‘광주사태'로 불려오던 ‘5·18 광주항쟁'의 의미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종합적인 보상 방안을 발표한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그 뒤 1988년 국회 광주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발포명령자 및 진상파악을 위한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이다.

묘지 성역화 작업

1990년대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성지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작업이 추진되었다. 1997년 새로운 5·18 묘지가 완성되었다. 망월동 구 묘역에 묻혔던 영령들은 새 묘역으로 옮겨졌다.

죄수복을 입고 앉아있는 사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5·18 책임규명, 처벌 문제 등 학생, 지식인들의 철야농성과 항의 성명이 빗발쳤다. 학살책임자 고소고발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부는 잘못된 과거 청산과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전국민의 요구를 수렴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5·18 국가기념일 제정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5·18시민항쟁에 대한 제도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집필자 <경희대학교 사학과, 김종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