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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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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자, 도청으로
  • 님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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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도청으로

5월20일 분노한 시민, 금남로 이제 항쟁의 주체는 학생들에서 광주 시민들로 바뀌었다.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금남로로 쏟아져 나와 계엄군에 맞서 무장하였다. 시민군이 만들어진 것이다.

금남로로 모여든 시민들

5월 18일 ‘피의 일요일'은 광주 전체를 술렁거리게 했다. 19일 날이 밝자 광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사람들이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다. 이제 항쟁의 주체는 학생들에서 광주 시민들로 바뀌었다. 20일, 항쟁 셋째 날이 되자 금남로에 십만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오후 7시 택시, 버스, 트럭 등 수백 대의 차량 시위대는 항쟁을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켰다. 21일 일부 시위대가 금남로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다. 신군부는 오후 1시 일제 사격으로 답했다. 이날 총격으로 항쟁 기간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시체 운반이라고 적혀 있는 차에 무장한 시민군이 타고 있고 주변으로 시민들이 둘러져 있는 사진

시민군, 총을 들다

총격에 분노한 시위대는 계엄군에 맞서 무장하였다. 시민군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민군, 전남 도청을 점령하다.

시민군은 21일 오후 5시경 계엄군 임시본부인 전남 도청을 공격하여 계엄군을 몰아냈다. 시민군이 광주를 지킨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사람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나누어 쓰며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5·18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 구성

항쟁 다섯째 날일 22일, 5·18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연행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계엄 당국과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계엄군은 무조건 무기 반납을 요구했다. 수습 위원회는 투쟁을 끝까지 하자는 쪽과 무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하자는 쪽으로 나뉘었고, 결국 무기를 반납하기로 했다.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만들어지다

25일 수습대책위원회와 달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시민군은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구성했다.

계엄군의 최후통첩

계엄군은 5월 26일 오후 6시까지 무조건 투항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와 시민들의 행렬 사진

계엄군이 도청을 접수하다.

계엄군의 최후통첩 요구에 항쟁 지도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결정했다. 5월 26일 자정 무렵,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입했다. 시민군의 저항은 27일 새벽 5시까지 계속되었다. 도청을 진압한 계엄군은 광주 전역에서 부녀자들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폭도로 몰며 연행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폭력에 맞서 끝까지 싸운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은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불씨가 되었다.

집필자 <경희대학교 사학과, 김종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