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이달의 기록
땅 속의 문화재, 세상에 빛을 보다!
무령왕릉 발굴일(1971.7.8.)을 맞아 문화재 발굴 관련 기록 공개

하마터면 영원히 흙속에 묻힐 뻔했던 신라, 백제, 가야의 찬란한 유물들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한 문화재 발굴. 1946년 5월 경주 호우총(壺杅塚)을 시작으로 1960년대 들어 본격화 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기록물들이 공개되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백제 무령왕릉 발굴일(1971.7.8.)을 맞아, 7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땅 속의 문화재, 세상에 빛을 보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을 7일부터 누리집(홈페이지, www.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전북 익산군 미륵사지 발굴(1989년)

전북 익산군 미륵사지 발굴(1989년)

이번에 제공된 기록물은 총 28건(동영상 12, 사진 16)으로, 1950~90년대 선사시대를 비롯하여 백제·신라·가야 문화재 발굴 현장과 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 새로 발굴된 국보('59), 무령왕릉 발굴('71), 경주 155호(천마총) 고분('73), 구석기유물(전곡리)발굴조사('79), 황룡사지 발굴('83), 김해 가야고분 발굴('91) 등 동영상 12건
  • 이승만 대통령 송림사 국보 관람('59), 김종필 국무총리 무령왕릉 시찰('71), 안압지 발굴현장('75), 황룡사지터('80), 익산 미륵사지 발굴('89) 등 사진 16건
김종필 국무총리 무령왕릉 시찰(1971년)

김종필 국무총리 무령왕릉 시찰(1971년)

무령왕릉과 그 속에 함께 묻혀있던 부장품은 백제를 대표하는 문화재였다. 공주에서 발굴된 백제 25대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백제 제6호 고분의 배수시설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면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무덤 앞의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성명, 생몰연월일, 행적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은 판석)에는 묻힌 왕과 왕비의 이름이 기록되어, 유일하게 연대와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삼국시대 왕릉이다.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은 학계 뿐이 아니었다.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시민들의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여, 보존처리가 완료되면 다시 공주로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이송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공주 공산성 안에 있는 백제 동성왕 때 축조된 연지(蓮池), 백제 최대(最大) 사찰이자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깃든 미륵사지 발굴은 백제인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경주개발발굴조사단(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발굴 조사활동(1973년)

경주개발발굴조사단(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발굴 조사활동(1973년)

경주 안압지 발굴 현장(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 현장(1975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 문화재 조사·발굴은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에 따라 활발히 추진됐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가 발굴됐다. 1959년 실시된 감은사터 발굴은 우리나라 최초의 절터 발굴조사였다. 절터 내 3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우리 손으로 찾아낸 최초의 신라시대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사리와 이를 봉안하기 위한 용기 및 탑 속에 들어가는 각 종 공양구 일체)이기도 하다.

황남대총(98호 고분) 발굴 작업(1974년)

황남대총(98호 고분) 발굴 작업(1974년)

천마총(155호 고분) 발굴 작업(1973년)

천마총(155호 고분) 발굴 작업(1973년)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에 따라 신라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황남대총(제98호분), 천마총(제155호분), 황룡사터, 안압지 등이 연이어 발굴됐다. 경주에 있는 고분 중 가장 외형이 크며, 쌍둥이무덤처럼 보여 쌍분(雙墳)이라고도 불린 황남대총에서는 신라 금관, 금제 허리띠 등이 출토되었다. 황남대총과 마주보고 있는 제155호분에서는 신라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천마도(天馬圖)가 발견되었고, 이 때문에 고분 이름도 천마총이 되었다.

천마총 입구(1975년)

천마총 입구(1975년)

천마총 공개시설공사 기공식 참석관계자 설명(1975년)

천마총 공개시설공사 기공식 참석관계자 설명(1975년)

8년에 걸친 발굴작업으로 모습을 드러낸 황룡사는 당시 동양 최대(最大)의 사찰이자, 최고(最高)의 9층 목탑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안압지는 준설작업을 위해 연못의 물을 뺐는데, 못 바닥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1만 5천 여 점에 달하는 출토품은 부장품적인 성격이 강한 신라 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황룡사지 발굴 현장(1980년)

황룡사지 발굴 현장(1980년)

황룡사지터(1980년)

황룡사지터(1980년)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가야의 유물 발굴을 통해 가야가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수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91년 금관가야 수장층의 공동묘지로 알려진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파형동기, 청동항아리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1992년 경남 함안군에서 발굴된 대형 가야고분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완전한 형태를 갖춘 말 갑옷이 출토되었다. 이는 북한지역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에서만 전해지는 것인데, 말과 사람이 함께 무장한 개마무사 (鎧馬武士)의 실존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그 외에도 20만 년 전에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음을 보여주는 경기도 전곡리의 전기(前期) 구석기유적 발굴 현장, 충남 공주의 중석기 내지 구석기유 발굴 현장도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전곡리 구석기유적지 발굴 현장(1979년)

전곡리 구석기유적지 발굴 현장(1979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땅 속에 묻혀 있던 문화재의 발굴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을 통해 조상의 뛰어난 예술성과 찬란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