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유향소, 홍길동 은닉·역란(逆亂) 가담 불구 조선말까지 유지
『조선왕조실록』 - 자치기구 『유향소』 폐지 부활 반복, 폐단 많아

7월은 지방자치법 제정 66년, 지방자치 부활 20년이 되는 의미 있는 달이다. 우리나라는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었지만, 6.25전쟁과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되었다. 1991년 지방의회 개원에 이어, 1995년 단체장 선거가 부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로고

각 지방자치단체의 로고

지방자치 20주년을 맞아 행정자치부가 지방행정연구원에 의뢰한 대국민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지방자치가 필요하다는 답변이었고, 20년의 성과에 대해서도 73.5%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지방재정의 건전성, 지방의원 의정활동 만족도 등에서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과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는 대체로 기여했다는 평가였다.

제헌의회에서 제정된 지방자치법이 46년이 지난 뒤에야 본격 시행될 수 있었던 것처럼 고려 말, 조선 초 지방의회격인 유향소(留鄕所)도 여러 차례 폐지와 부활을 거듭한 끝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고도 중앙집권국가였던 고려와 조선에서 조차 지방자치가 필요했던 것은 조정이 임명한 관료만으로는 효율적 통치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부(府)·군(郡)·현(縣) 단위로 설치되었던 유향소(향소, 향청, 이아)는 요즘의 지방의원격인 임원(任員)으로 향정 (鄕正), 감관(監官)을 두었는데, 성종 이후에는 좌수와 별감으로 직명이 바뀌었다. 임명권자가 지방수령인 것은 오늘날과 다르지만, 신분이 민간인이며 미풍양속 선도와 집행부 감시를 주요 기능으로 한다는 측면에서는 지방의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려 말 도입된 유향소는 조선에도 승계되었으나 폐단이 많아 태종 6년 폐지되었다. 『태종실록』 11권 1406년 6월 9일 세 번째 기사는 대사헌 허응이 올린 시무(時務) 7조(條)에 관한 것이다. 허응의 7조 중 네 번째는 향원 (鄕愿, 악질적인 토호세력)이 유향소를 설치하여 무리지어 다니며 수령을 헐뜯고 백성들을 침핍(侵逼)하는 것이 활리(猾吏, 교활한 관리) 보다 심하다며 폐지할 것을 건의하자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는 내용이다.

수령 다음가는 관아라는 의미로 이아(貳衙)라고도 불렸던 유향소는 폐지 22년만인 세종 10년인 1428년 복설되지만, 세조 13년인 1467년 이시애의 난에 호응한 죄로 다시 폐지되었다. 『세조실록』 42권 1467년 5월 24일 일곱 번째 기사는 안변 향리(鄕吏) 김수남의 이시애의 난에 관한 보고이다. 함흥을 다녀 온 종사관 김순명은 고을의 상황을 향리인 김수남이 직접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시애가 함흥유향소에 이문(移文, 기관 간 주고받는 공문)을 보내 신임 관찰사 신면은 신숙주의 아들로 간당(姦黨)이니 죽여야 한다고 전하자 지방 관료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여럿이 이에 동조하여 신면과 정평부사 이효석을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이시애는 유향소 이문을 적절히 이용했다. 같은 해 5월 28일 두 번째 기사는 절도사 허종의 보고로 이시애가 여러 읍 유향소에 공문을 보내 자신이 진짜 절도사로 허종은 가짜라고 하는 바람에 지역주민들이 모두 자신을 외면한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또 여러 읍의 유향소가 이시애가 이문을 통해 간당이라고 하면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수령들을 죽이거나 가두고 있다. 이에 경유하는 유향소마다 품관들에게 "너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모두 이시애의 잘못이다."는 말로 회유하고 있는데 자신의 말을 진실로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5월 29일 세 번째 기사는 관원들이 이시애의 유향소 이문 때문에 얼마나 고전하는지를 보고한 것이다. 김기는 함흥지역 동향보고를 통해 "민심이 아직도 반역죄인지 모르고 이시애의 말만 믿어 오히려 도총사 이준과 허종을 죄인으로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충북 괴산군 연풍향청

충북 괴산군 연풍향청 ⓒ 문화재청

『세조실록』 43권 같은 해 8월 12일 두 번째 기사는 도총사 이준이 이시애와 이시합을 문초한 내용이다. 해가 저물 무렵 잡혀 온 이들을 여러 장수가 합동으로 심문했다.

  "강효문이 모반하여 이를 제압하기 위해 네가 먼저 발병(發兵)했다면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다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알바 아니다."
"네가 여러 진 유향소에 이문하여 그들을 죽이도록 했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
"어찌하여 스스로를 절도사라 자칭하였는가?"
"인심을 모으려고 한 것뿐이다."


절도사를 자칭하면서 공문을 관아가 아닌 유향소로 보냈다. 이날 문초에서는 이에 대한 심문이 없어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조정에서 임명받은 수령에게는 가짜 절도사가 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거나, 함경도 백성들이 조정에 대한 불만 또는 향반(鄕班)으로 구성된 유향소의 영향력을 이용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실록』에는 더 이상 유향소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성종실록』에는 이시애의 난이 유향소 폐지의 직접적인 이유였음이 여러 차례 거론된다. 『성종실록』 137권 1482년 1월 21일 두 번째 기사는 유향소 복립에 관한 논의이다. 경연이 끝난 뒤 자연스럽게 이어진 현안논의에서 헌납(獻納) 김대는 백성을 괴롭히기는 향리 보다 더한 자들이 없다. 교활한 관리가 지나가면 닭과 개들도 편하지 못하다는데 사람이야 오죽하겠느냐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좋은 제도였으니 폐지된 유향소를 다시 세우자고 건의했다. 임금은 영돈령 이상과 논의할 것을 명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쳤다.

임금의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다음 날인 21일 최고위급 회의가 열렸다. 이날 세 번째 기사는 유향소 복립에 관한 논의인데, 첫 회의부터 난항을 겪었다. 영의정 정창손, 우의정 홍응, 선성부원군 노사신은 간사한 아전을 견제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이 수령의 기본 임부인데, 이를 유향소에 위임하면 수령들은 할 일이 없지 않겠느냐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좌의정 윤필상, 청송부원군 심회, 파천부원군 윤사은, 영돈녕 윤호 등은 폐지 이후 시골 풍속이 날로 악화되었고 앞으로 더 심각해질 조짐이어서 유향소를 다시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맞섰다.

같은 해 2월 2일 여섯 번째 기사는 유향소 설립규정을 윤허했다는 내용이다. 이조는 그 동안 설립여부를 논의한 결과, 다시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작폐가 클 것이라는 의견도 여전한 만큼, 관찰사와 경재소(京在所, 지방관아의 서울사무소)의 감찰기능을 강화하고 부(府) 이상은 4인, 군(郡) 이하는 3인 이내의 정원을 두도록 건의했고, 임금이 이를 윤허했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으나, 임금이 태도를 돌변하여 강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성종실록』 149권 1482년 12월 16일 두 번째 기사는 지평 조위가 유향소 설립을 건의하자 임금이 "선왕조가 이미 폐한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하였다는 내용이다. 이후 찬반논란은 6년 여를 끌었다.

지루한 공방의 종지부를 찍는, 요즘 표현으로 치면 끝장토론이 1488년 5월 12일 있었다. 이날 토론에서 윤필상·이경동·김극유·권정·윤해 등은 예상되는 폐단은 제도적 보완을 통해 예방하면 된다며 찬성, 홍응·윤홍·허종·신승선·어유소·이극중 등은 개국 초부터 있었지만 폐단이 끊이지 않았고 유향품관들이 공연히 유세나 떨 것이 틀림없다며 반대를, 유지·권중린 등은 더 논의 후에 결정하자며 유보, 이칙은 결정권을 임금에 위임하자는 의견을 냈다.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사헌부가 유향소 설립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여 6월 28일 보고했다. 5월 있었던 토론에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홍응은 이날 유향소 정원을 2~3명으로 줄이고 실행하기 어려운 자질구레한 규정은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냈으나, 임금이 사헌부 안을 따르도록 명했다.

부활 2년여 만인 1490년 제기된 폐지주장은 중앙집권체제에서 지방자치가 가야할 지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월 17일 첫 번째 기사는 유향소 폐단 등에 관한 보고이다. 공조판서 성건은 풍속을 바로 잡으려고 설치했는데, 서로 헐뜯고 고발하는 것도 부족해 수령과 힘겨루기까지 하여 폐단이 크다며 폐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윤필상과 어세경이 설립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폐지하느냐며 만류하여 더 이상 폐지요구가 확산되지는 않았다.

『연산군일기』 31권 1498년 8월 10일 두 번째 기사는 폐단이 거듭되어 백성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윤필상과 유자광은 각 고을의 생원·진사들이 사마소(司馬所)를 만들어 이곳에서 어긋난 논의를 하고 술을 마시며 서리나 백성들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매질을 한다. 그러나 유향소의 품관들은 대부분이 늙고 열등하여 백성들과 아전들이 멸시하고 있다는 것. 즉 법적 기구 보다 사조직의 영향력이 더 강해져 조정의 강력한 단속이 필요하다는 보고였다.

1500년에는 홍길동을 고발하지 않은 죄로 유향소 품관들이 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29일 첫 번째 기사는 의금부 위관 한치형의 보고이다. 강도 홍길동이 옥정자(玉頂子, 갓에 쓰는 장식품)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대낮에 관부(官府)를 드나들었는데,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 품관들이 몰랐겠느냐며 체포하거나 고발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해 받아 들여 졌다.
유향소 품관들의 직무소홀이나 수령들과의 결탁, 개인축재 등 폐단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중종실록』 71권 1531년 10월 5일 첫 번째 기사는 해주 유향소 품관이 관기를 첩으로 삼았다가 적발된 것이며, 1538년 11월 1일 첫 번째 기사는 성주사고(星州史庫) 화재 방화범으로 유향소를 지목한 것이며, 『명종실록』 4권 1546년 12월 9일 일곱 번째 기사는 전주의 품관들이 고을의 변고는 외면하고 서로 도와 악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이며, 1554년 5월 11일 첫 번째 기사는 일부 수령들의 착취에 유향소가 나서고 있다는 것 등이다.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향소 품관들이 중앙에 저항하거나 역란(逆亂)에 가담한 사례도 눈에 뜨인다.『인조실록』 28권 1633년 7월 27일 첫 번째 기사는 7개 지역 수령이 품관들의 말만 듣고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였는데, 이는 유향소 품관들이 서로 연락하여 결정한 것에 따른 것이다. 이를 막지 못한 감사 이경여와 7명의 수령은 파직하고, 이번 일을 선동한 품관은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보내자는 내용이다. 『영조실록』 18권 1728년 6월 29일 두 번째 기사는 호서(湖西)의 역란(逆亂) 시 목천 유향소가 군사를 징벌하여 역적들에게 화응(和應, 화답하여 응함)하였다. 이 일로 품관들은 처벌을 받았으나 직산으로 피신했던 목천 현감은 처벌받지 않았는데 이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품관들의 악행과 폐단이 끊이지 않았고, 역란에 화응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결국 기본 기능인 미풍양속의 장려와 관료들에 대한 견제를 다하지 못하면서 사조직인 사마소와 향약만큼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자치기구로 전락했다.

고려 말에 도입된 유향소가 거듭된 폐지와 부활, 조정 대신들의 수 없이 많은 상소에도 불구, 500여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도의 중앙집권체제인 왕조시대마저도 지방자치가 필요했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방자치 20주년이다.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지만, 많은 성과를 거두어 왔다. 이제는 지방이 국가경쟁력인 시대이다. 더욱 성숙한 자치의 정착과 삶의 질 향상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