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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조선시대, 원숭이 사육 권장하기도 했었다.

「조선왕조실록」 - 제주에서 6마리 생포 서식 가능성 관심

얼마 전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도파민 신경이 무뎌지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심리적으로도 젊을수록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이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저 그런 일상이라고 느끼거나, 실제로 그런 날이 많아져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연령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시간의 체감속도가 모두 다르겠지만, 새해도 어느덧 한 달여가 지나고 있다.

새해가 되면 그 해의 띠를 알아보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한 해를 설계하기 마련이어서 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하늘의 이치를 담은 천간(天干)과 땅의 이치를 담은 지지(地支)를 조합하여 연월일시를 표시하여 왔는데, 올해는 병신년(丙申年) 붉은 원숭이의 해이다.

12지는 중국 하왕조(기원전 21~16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12지 중 자(子)는 쥐, 축(丑)은 소, 인(寅)은 호랑이, 묘(卯)는 토끼, 진(辰)은 용, 사(巳)는 뱀, 오(午)는 말, 미(未)는 양, 신(申)은 원숭이, 유(酉)는 닭, 술(戌)은 개, 해(亥)는 돼지를 의미하며, 천간 중 갑(甲)과 을(乙)은 파랑, 병(丙)과 정(丁)은 빨강, 무(戊)와 기(己)는 노랑, 경(庚)과 신(申)은 하양, 임(壬)과 계(癸)는 검정색을 나타낸다. 이를 조합하면 을미년(乙未年)인 지난해는 푸른 양, 병신년(丙申年)인 올해는 붉은 원숭이, 정유년(丁酉年)인 내년은 붉은 닭의 해가 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나라마다 12지지 동물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태국, 베트남, 네팔은 토끼 대신 고양이, 네발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은 각각 용 대신 독수리와 물고기, 심지어는 달팽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각각의 국가에 많이 서식하거나 친근한 동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살지도 않는 원숭이를 까치나 노루처럼 흔한 동물로 바꾸지 않았을까.

혹시 개체 수는 적지만, 자생 원숭이가 있지는 않았을까. 일부는 일본에 서식하는 원숭이를 들어 위도가 비슷한 우리나라에도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기후조건이나 환경이 원숭이가 서식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기록으로만 보면, 자생하는 원숭이가 없었다고 단정 짓기에는 미심쩍은 대목들이 있다.

구석기 유적인 충북 청주시 두루봉과 제천시 점말동굴에서 원숭이 뼈화석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석기시대까지는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신묘 12지신상 중 원숭이상 이미지
김유신묘 12지신상 중 원숭이상

삼국시대에도 원숭이 관련 기록이 많다. 신라 경주의 괘릉과 김유신 묘의 호석(護石)에 12지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원숭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차돈(506~527)의 목을 베자 나무 위 원숭이들이 일제히 울었다”는 내용이 있고, 고려 문인 이인로(1152~1220)는 「파한집」에 “첩첩산중에 원숭이 울음소리뿐이구나”라는 시 구절을, 비슷한 시대의 문인인 이규보 (1168 ~1241) 는 조강부 (祖江賦)라는 시에 “원숭이 울음 구슬픈데 해는 서산에 걸렸네”라는 표현을 남겼다. 호석에 새겨진 것은 주변 국가에서 들여 온 실물이나 그림을 보고 그렸을 수도 있지만, 후자는 관용적인 표현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글픔을 원숭이 울음소리로 표현했던 중국의 한시에서 따온 것은 맞지만, 700여년이나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그렇고, 신라와 고려 문인들의 수준을 보아도 그렇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64권 1434년 4월 11일 다섯 번째 기사이다.
첨지중추원사 김인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여 지금의 목사 이붕에게 인계했는데, 전라도 감사는 굳이 이 원숭이를 육지로 보낼 필요가 없다. 다만 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잘 돌본다는 약속을

받고 육지로 반출해도 된다. 또한 원숭이를 분양받은 사람은 도둑맞지 않도록 주의하고 번식에 힘써라. 이 기사만 보아서는 제주도에 자생하는 것이었는지, 외지에서 들여 온 것인지 판단할 수 없으나, 잡아서 길들였 다는 것으로 보아 야생 원숭이였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육지로 보내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이미 일본 사신들이 귀찮을 만큼 많이 들여와 더 이상 귀한 애완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의 기후조건도 야생화 된 원숭이가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일본과 비슷한 위도인데도 원숭이가 없는 것은 대륙성 기후여서 우리나라의 겨울이 춥고 긴데다, 표범, 호랑이 등 상위 포식자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에 반해 제주도는 아열대에 근접할 만큼 온화한 기후인데다 맹수가 없어, 어떤 경로로 유입되었든, 야생 원숭이가 서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청자 모자원숭이 모양 연적(고려시대, 국보 제270호) 이미지
청자 모자원숭이 모양 연적(고려시대, 국보 제270호)

조선 중기까지는 일본 사신들이 가장 많이 가져오는 물목 중에 하나가 원숭이였다. 태조 3년인 1394년 7월 13일 첫 번째 기사는 일본이 왜구에게 잡혀간 659명을 송환하면서 선물로 원숭이를 바쳤다는 내용이며, 「태종실록」1408년 4월 18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이 태평관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수컷 2마리, 암컷 1마리의 원숭이를 바쳤다는 내용이다.「태종실록」1410년 5월 17일 첫 번째 기사는 일본인들이 잇달아 원숭이를 바쳐 그동안은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는데, 이제부터는 각 진(鎭)에 나누어 준다는 내용이다. 일본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원숭이를 보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세종실록」1436년 6월 16일 두 번째 기사는 제주안무사 최해산이 원숭이와 노루 한 쌍을 바쳐 상림원(上林園, 궁궐에 과일 등을 공급하던 장원서의 전신)에서 기르다가 인천 용유도에 방사했다는 것이다. 제주목사 김인이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로 최해산이 잡은 두 마리를 포함하여 2년여 사이에 8마리의 원숭이가 생포된 것으로 보아 제법 많은 개체가 서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록에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다. 「세종실록」 1447년 6월 26일 첫 번째 기사로 세자가 승정원에 원숭이 값 지불을 지시한 내용이다. 원숭이가 있는 곳에서는 말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오로지 이 때문에 원숭이를 키운다고 하더라. 원숭이가 없으면 그림을 붙여서라도 예방하여야 하는데, 왜인이 가져 온 한 쌍 중 수컷이 죽었다고 돈을 주지 않은 것은 야박한 처사이다. 수컷 몫까지 다 주고, 다음에 올 때 또 가져오도록 은밀하게 나의 뜻을 전하여라.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도쇼구 마구간에는 말의 병을 막기 위해 8마리의 원숭이 조각상이 설치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같은 속설이 사신들을 통해 조선의 세자에게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원숭이를 닮은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단종실록」 1452년 9월 6일 두 번째 기사는 이날 타개한 판돈령부사 최사의에 관한 평으로 자는 범숙이며 …중략… 판돈령부사에 재배되었고, 77세에 졸하였다. 수염이 없고 얼굴이 노파와 같아 세상에서 원숭이 재상이라고 불렀다. 원숭이 형상으로 소개된 또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 세 번째 기사는 통신사 황윤길이 풍신수길 외모를 설명한 내용이다. 지난해 4월에 바다를 건너 …중략…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이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쓰여 졌음을 감안하면,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여러 정난을 주도해 후대의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유자광(1439~1512)은 나무를 잘 타 원숭이와 비교되었다.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 이미지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 속의 원숭이
  (작자미상, 조선 후기)

「세조실록」 1467년 6월 30일 두 번째 기사는 유자광이 한꺼번에 몇 계단을 넘고 큰 기둥을 원숭이처럼 오르자 임금이 겸사복을 돌아보며 “너희들 중에 유자광과 같이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했다는 내용이다.
연산일기 1498년 7월 29일 두 번째 기사는 사헌부가 유자광을 평가한 것으로 성질이 음흉하고 자기보다 나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을 한다고 혹평을 하면서도,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오르고 힘이 센 것만큼은 모두 인정했다.

원숭이 때문에 곤혹을 치룬 임금은 성종이다. 「성종실록」1477년 11월 4일 세 번째 기사는 좌부승지 손비장이 애완동물 사육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어제 사복시에서 원숭이 사육사를 짓고 옷을 입히자고 했는데, 그것으로 백성을 입히면 능히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사관들이 이를 기록으로 남기면 후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에 임금은 내가 애완물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외국에서 바친 것을 얼어 죽게 하는 것은 예가 아니고, 내가 옷을 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슴 가죽을 입히라고 했는데 경이 잘 못 들어 … 궁색한 변명으로 체면을 구겼다. 1478년 8월 10일 첫 번째 기사 중 일부도 원숭이 문제로 임금이 사과한 내용이다. 강론이 끝나고 헌납 최반, 지평 안선 등의 건의에 대해 임금이 입장을 밝히는 과정에서 “지난번 내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았는데, 곧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원숭이를 받은 것은 진실로 잘 못이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성종 이후로는 일본의 원숭이 공물로 논란이 잦았다. 연산일기 1502년 11월 14일 첫 번째 기사는 일본이 바친 원숭이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이다. 구리와 쇠가 필요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공·사무역을 모두 중지했는데 무익한 짐승을 왜 받는가. 돌려주고 받지 않는다고 전해라. 같은 해 12월 14일 두 번째 기사도 일본이 보낸 원숭이 처리를 두고 격론을 벌인 내용이다.

“대전에서 원숭이와 말을 물리치지 않은 것은 잘한 것입니다. 받은 전례도 있어 받지 않았다면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전날 원숭이와 말은 받지 말라는 전교가 있었음을 알면서도 보낸 것은 저들의 탐욕이다.”

이날 토론은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는데, 임금은 쓸데없는 짐승을 체면 때문에 후한 대가를 치르고 받는다면, 이 또한 폐단을 만드는 것이다.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시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원숭이는 간사스럽고 욕심 많은 동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과 유사한 생김새와 흉내를 잘 내는 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유전자의 93%를 인간과 공유하는 동물이어서 온갖 위험한 일에 인간을 대신하여 동원된다. 에이즈와 에볼라 바이러스 연구에 사람을 대신하여 실험체가 되고 있으며, 미국이 1945년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린 우주선에도 원숭이가 탑승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올해는 모든 국민이 붉은 원숭이처럼 지혜롭고 활기차게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