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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가을의 불청객 <태풍>

여느 해 보다 이른 추석을 앞두고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에 상륙했다. 태풍은 9월 6일 새벽 4시 50분쯤 거제시에 상륙한 뒤 오전 7시 10분쯤 울산 앞바다로 빠져 나갔다. 짧은 시간동안 빠른 속도로 지나갔지만 힌남노는 세력 ‘강’을 유지해 남부지방에 큰 피해를 입혔다. 경북, 울산, 경남에는 약 400mm의 물폭탄이 쏟아졌고, 전국적으로 사망 11명, 실종 1명 등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대규모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시와 경주시, 울산 울주군, 경남 통영시, 경남 거제시 5개 지역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불청객 태풍에 대한 기록을 통해 한반도에 큰 피해를 입혔던 태풍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알아본다.

금년 9월 우리나라를 휩쓸은 태풍 「사라」호로 인한 피해는 참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심한 재해였으므로 본인은 지난 9월 30일자로써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과 모든 공무원에게 이재민의 구호와 재해복구를 위하여 동족상애의 거룩한 정신을 발양하여 서로 협조하고 서로 분발하실 것을 격문한 바 있었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동족애와 전국사회단체, 언론기관 및 각급 행정기관의 열성적인 협조로써 짧은 시일안에 예상이상의 성과를 거둔 데에 대하여는 참으로 고마운 일로서 이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여 맞이 않는 바입니다...(하략)

-1959년 태풍 이재민 구호에 관한 담화문(안) 중에서(내무부에서 보고한 국무회의 안건 중)

태풍 이재민 구호에 관한 담화문(1959)

01 한반도와 태풍

해마다 여름과 가을 사이 한반도에는 태풍이 상륙한다. 크든 작든 태풍이 지나가지 않는 해가 없으니 한반도는 언제나 태풍과 함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풍은 중심 최대풍속이 17m/s 이상이며 폭풍우를 동반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가리키는 것으로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동부로 불어온다. 태풍과 같은 열대성 저기압은 그 진원지에 따라 대서양에서는 허리케인, 인도양에서는 사이클론이라고 불리는데 우리나라 쪽으로 불어오는 이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颱風]이라는 이름으로 문자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1634년에 중국에서 편집된 『복건통지(福建通志』이다. 그 이전에 영국이나 프랑스 배에서 이 열대성 저기압을 중국 광동식 발음을 따 타이푼[typhoon]이라고 부른 것을 볼 때 오래전부터 이미 태풍으로 불렸던 것 같다.

태풍은 주로 7월에서부터 9월 상순 사이에 서너 차례 한반도에 상륙하는데 강한 바람과 함께 많은 비를 뿌려서 각종 재해를 일으킨다. 태풍은 한반도 여름의 통과의례와도 같아 대개 사람들은 여름이면 태풍예보를 통해 태풍의 규모와 방향을 주시한다. 그만큼 태풍이 지나간 자리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태풍이 먼 바다에서 그 위세를 다한 다음 약화되어 상륙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상륙해 큰 재해를 일으킨 경우도 왕왕 있었다. 1959년 태풍 ‘사라’와 2002년 태풍 ‘루사’가 대표적이다.

02 잊지 못할 태풍 ‘사라’와 ‘루사’

1959년에 한반도를 덮친 ‘사라’는 정부수립 이후 최다 인명피해를 낸 태풍이었고 2002년의 ‘루사’는 최대의 재산 피해를 가져온 태풍이었다.

‘사라’의 경우는 특히나 현재 60대 이상의 노년층에게는 뚜렷이 기억에 남아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그 피해 규모가 남다른 태풍이었다. ‘사라’는 1959년 9월 17일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에 한반도에 상륙했는데 엄청난 바람과 비를 뿌려 당시 기상관측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태풍으로 기록되었다. 이 태풍 ‘사라’로 인해 사망·실종 849명, 부상자 2,533명, 이재민 373,459명이 발생하였고 선박 파손이 11,704척에 이르는 등 1992년 화폐 기준으로 하여 1,900억 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당시는 6.25전쟁이 끝난 지 6년 밖에 되지 않아 전후 복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태풍의 피해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정부차원의 구제책도 요즘처럼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아 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남해안을 타고 올라온 ‘사라’가 주로 휩쓸고 간 지역은 통영·대구·영천·영덕·청송·안동·경산·청도·달성 등 특히 경상남·북도 지역이었는데, 해안 지역에서는 강력한 해일이 일어나고 강이 역류해 남부지방 전역의 가옥과 농경지가 물에 잠겼다. 교량과 도로 같은 공공자산 또한 파손되어 그 피해 규모가 1950년대 말 우리나라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엄청난 것이었다.

  • 태풍 사라로 파괴된 가옥과 수재민(1959)

  • 수해피해를 복구하는 수재민 모습(1959)

03 국민의연금과 수해극복의 변천사

흔히 이런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국민들이 의연금을 내는 일이 많았다. 정부의 주도로 방송국이나 언론사에서 국민들에게 재해 상황을 호소하면, 십시일반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보내는 의연금을 내곤 했던 것이다. 요즘은 웬만한 재난에는 의연금을 거두지 않아도 될 만큼 정부가 미리 예방책을 세우고 위기극복능력도 향상 시켰지만, 정부수립 초기부터 불과 몇 십년 전까지는 이런 국민 의연금을 재난 극복기금의 기본으로 삼는 일이 많았다.

특히 1959년의 태풍 ‘사라’ 때는 대부분의 구호자금을 국민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했는데, 그만큼 정부의 재정상황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태풍이 지나간 지 6일 후인 9월 23일 정부는 국민의연금의 액수를 정하고 각지에서 의연금을 거둘 방법을 마련하였다. 당시는 변변한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국민 한명 한명이 내는 의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1950년대 당시 자금동원력이 있는 사업체로 극장이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제일 처음으로 재원을 마련할 방법으로 극장에서 입장객 1인당 100환을 받는 방법을 채택했고 그 다음에 학생의연금이나 공무원의연금, 가두의연금 등이 거론되었다.(이는 당시 극장관람객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경제사정에서 극장 정도가 큰 기업체로 분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표금액은 10억환이었는데 공무원의연금이 할당 목표를 초과하였고, 극장주는 도달하지 못한 목표액을 스스로 충당하였다. 또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구호금을 보내기도 하고 해외교포 개인의연금도 많았다. 이 전국적인 모금은 10월 한 달간 지속되었는데 그 결과 모금액이 목표액을 넘어섰다.

사라 태풍 피해의 연금모집에 관한 건(1959)

한편 2002년 태풍 ‘루사’ 때는 재해가 난지 이틀 뒤에 바로 국무회의를 열어 재해 상황을 초동조사, 재해대책 예비비 1,500억원을 사용하고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등 정부 주도로 피해상황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였다. 국민의연금을 모집하기는 했지만 부수적인 사항일 뿐 대부분은 정부가 해결하였다. 이는 1959년 태풍 ‘사라’로 부터 2002년 태풍 ‘루사’ 사이에 우리나라가 얼마만큼 발전하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제15호 태풍 『루사』 피해상황 및 복구대책(2002)

‘루사’ 이후 「자연재해대책법」이 개정되어 제62조 2항의 '특별재해지역'이 신설되었다. '특별재해지역'은 재해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수습과 복구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대통령이 선포하는 지역을 말한다. 이전에는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재해극심지역'을 지정했는데, 홍수나 호우에만 해당되어서 여타 다른 재해에 대한 대책이 애매한 상황이었다.
한편, 태풍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은 1953년부터인데, 1978년까지는 여성의 이름을 붙였다가 그 이후부터 남자와 여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였다. 1999년까지는 미국 태풍합동경보센터에서 정한 이름을 붙였지만 태풍에 대한 아시아 각국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하여, 2000년부터는 서양식 태풍 이름 대신 아시아 14개국 각국의 고유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각 국가별로 10개씩 제출한 총 140개를 5개씩 28조로 편성하여 순차적으로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개미, 나리, 장미, 수달, 노루, 제비, 너구리, 고니, 메기, 나비 10개의 이름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