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은 1913년에 발족된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개관하였다. 경주고적보존회는 민간조직과 같은 명칭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행정가와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책과 분리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경주분관의 목표는 경주와 일본 나라시대의 역사문화의 유사점을 찾아 ‘일선동원론(日鮮同源論)’을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경주고적보존회는 1921년 12월에 건축계획을 확정하고 22년 봄에 착공하기로 하였다.
1922년에 개관한 경주분관은 1923년 5월까지 약 2만3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은 경주시의 옛 객사(客舍) 동경관(東京館)을 주 전시관으로 삼고, 1921년에 발굴된 금관총의 유물을 보관하는 금관고(金冠庫)와 석불을 진열하는 집고관(集古館), 그리고 부속시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성에서는 한국인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박물관 건립을 위한 의지와 기금을 모았다. 1931년 11월 1일에 개관한 개성부립박물관은 경주분관과 달리 조선총독부 박물관 분관으로 재편되지 못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영순 초대관장 이래로 한국인이 박물관장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1933년 3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재직한 2대 관장은 ‘조선미술사논총(朝鮮美術史論叢)’을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개성부립박물관은 개성부청 부근에 건립되었고 건평 약 87평에 전면9칸, 측면 4칸으로 지어졌다. 단층 건물이지만 층고를 높게 하여 채광을 위한 고창(高窓)을 만들었고, 지붕은 기와를 덮었다.
전시물은 고려시대 유물이 주류를 구성하였고, 유물의 종류를 도자기류가 주축이 되었다.
[도판1]은 ‘경주박물관정문신축공사설계변경도 / 정문설계변경도’로서, 경주분관의 경우 기록원 소장 도면을 통해서 정문에 대한 내용만을 볼 수 있다. 경주분관의 정문은 정면3칸, 측면 두칸의 삼문(三門)으로 구성되어 조선시대 주요 관아시설의 정문을 연상시킨다. 일자로 계획되었던 양 옆의 담장을 안쪽으로 구부려서 방문객의 유입성을 높였다.
개성부립박물관은 2.1m의 구릉위에 박물관 본관 건물과 사무소 건물로 계획되었다.([도판2],[도판3]참조) 건물은 단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설계하였고 내부는 단일의 큰 전시홀을 구성하였다. 정면에는 3칸의 출입문을 중앙에 배치하고, 지붕을 한 칸 돌출시켜 현관부를 형성하였다.([도판4]참조)
[도판5]는 박물관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외형은 한옥의 모습을 가졌으나, 철근콘크리트구조로 계획되었으며, 전시실은 약4.6m의 천정고를 가지며, 천정 아래에는 높이 약1m의 고창을 두어 실내로의 채광을 유입하였다. 지붕은 사각단면의 목재를 사용하여 트러스로 지붕틀을 형성하였고, 그 위에 기와를 덮어서 한옥의 분위기를 살렸다.
이 외에, 사무실과 숙소가 결합된 평면을 가진 사무소가 인접하고 있었으며,([도판6]참조), 보호각을 건립하여 미륵불을 야외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도판7]참조)
일제강점기의 박물관은 식민지 정책을 홍보하는 문화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경부분관 초대관장이 우리나라 유물의 장물방매 혐의를 받아 관장직을 사임한 것을 보면, 전시품에 대한 허술한 관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개성부립박물관은 한국인의 결의와 자본으로 개관하여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독립된 문화전시장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하겠다.
<참고도판>
도판1. 경주박물관정문신축공사설계변경도 / 정문설계변경도, 1932년
도판2. 개성박물관부지지균공사설계도 / 배치도급기타도, 1931년
도판3. 개성박물관외책기타신축설계도 / 석단정면급각부상세단면배치도, 1931년
도판4. 개성박물관신축공사설계도 / 정면측면급단면병평면소옥복기타, 1931년
도판5. 개성박물관신축공사설계도 / 각부상세도, 1931년
도판6. 개성박물관신축공사설계도 / 사무소상세급기타도, 1931년
도판7. 개성박물관부속미륵사신축설계도 / 정면급평면기타,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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