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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권업모법장 및 농사시험장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시기 건축도면 중에는 권업모범장 및 농사시험장(본원)과 관련한 도면들이 173매 소장되어 있다. 권업모범장 도면이 75매, 권업모범장 수원여자잠업강습소 도면이 4매, 권업모범장 원잠종제조소 도면이 13매, 농사시험장 도면이 45매, 농사시험장 맥류시험실 도면이 34매, 농사시험장 수원여자잠업강습소 도면과 농사시험장 수원잠사시험장이 각 1매이며,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표와 같다.
번호 시설명 도면수
1 권업모범장 75
2 권업모범장 수원여자잠업강습소 4
3 권업모범장 원잠종제조소 13
4 농사시험장 45
5 농사시험장 맥류시험실 34
6 농사시험장 수원여자잠업강습소 1
7 농사시험장 수원잠사시험장 1
총계 173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시험장은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의 농사시험장 제도를 관찰하고 돌아온 최경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1894년 뚝섬에 설립한 농무목축시험장이다. 그리고 1904년에는 농상공의 실업에 관한 학술과 기능을 교육하고자 농상공학교를 서울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1906년에는 일본 통감부에 의해 시험장이 폐지되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농업지배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판단과 일본 식량공급지로서의 소기의 목적 달성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통감부는 같은 해 6월 15일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였다. 수원의 권업모범장은 1907년에는 다시 한국정부의 소속으로 되었지만, 배속된 관리자들은 그대로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수원 권업모범장은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의하여 조선총독부가 관할하는 기구로 개편되었다. 1910년 9월에 발포된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관제’를 보면, 권업모범장은 통감부 시기의 권업모범장을 확대 개편하고, 농립학교를 부속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구·평양·독도(뚝섬)·용산·목포에 5개의 지장을 두어 1본장·5지장·1학교의 체제로 출범하였다.
  ‘모범’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이, 일본은 일본식 농업방법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행해보고 조선인에게 전달하는 강제적 이식(利殖)을 목표로 하였다. 적은비용으로 조선의 수이출품(輸移出品)의 생산을 확대한다는 핵심목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1918년 일본 내의 쌀값 폭등과 1920년의 ‘조선산미증산계획(朝鮮産米增殖計劃)’으로 인하여, 농업에 대한 시험과 연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권업모범장은 1929년 9월 17일에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으로 변경되었다.
농사시험장은 1930년대 초반에 1본장, 4지장, 3출장소를 구축하였다. 본격적으로 조선농업 전반에 대한 시험·조사를 착수함으로써 농업 수탈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는 ‘잠견백만석증수계획(蠶繭百萬石增收計劃)’ 수립 등을 통하여 쌀중심에서 벗어나 밭농사를 포함하는 다각적 농경으로의 방향전환을 추진하였다.
 1937년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본은 식량자원 조달을 위해 농사개량을 통한 식량 생산력 확대를 추진하였다. 논농사 및 밭농사 품종을 폭넓게 연구하고, 비료생산과 알콜원료 생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9년 조선의 대기근은 조선에서의 농업정책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증미계획(朝鮮增米計劃)’을 비롯한 각종 식량자원의 요구는 높아져만 갔으며, 일제말기인 1944년에는 ‘농업기술기관정리통합안(農業技術機關整理統合案)’에 의거하여 전 농업기술기구를 전면적 총동원체제로 일원화하였다. 이때 관련된 모든 시설은 총독부 산하에 8개 지장과 17개 분장으로 체제가 개편되었다.
해방이후, 조선총독부 농업시험장은 미군정청 중앙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되었고, 한국정부에 이양되었다.

  권업모범장 수원본장은 권업모범장과 원잠종제조소 및 여자잠업강습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판1]의 배치도는 청사를 중심으로 권업모범장을 보여주고 있다. 북쪽을 등지고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 넓은 접근로가 놓여있다. 청사의 서쪽으로는 분석실, 육추사(育雛舍), 돈사(豚舍) 등이 새롭게 계획되었다. [도판2]는 권업모범장 남쪽의 시설군들을 보여준다. 제일 북쪽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용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으로는 지방 농잠업 장려기관에 우량잠종을 공급하는 원잠종제조소 건물들이 있으며, 남쪽에는 용산지장에서 이전한 여자잠업강습소 건물들이 군집해 있다. 또한 [도판3]에서는 청사 서쪽에서 운영되었던 격자형의 과수원과 사무실을 배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권업모범장의 중심을 차지하는 청사는 [도판4]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본 건물은 중앙부만 2층으로 구성하였고, 장장실(場長室), 도서실 등이 계획되어 있었다. 뒤쪽에 복도로 연결된 부속건물에는 변소, 탕비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도판5]에서는 원잠종제조소의 청사 설계도를 확인할 수 있다. 원잠종제조소의 청사는 2층 목조건물로, 1층에는 사무실, 소장실 등을 계획하고 2층은 진열실로 계획하여 제조소 내의 사업결과를 홍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목재로는 비늘판벽을 구성하였고, 1층과 2층에 규칙적인 창을 계획하였다. 또한, 누에고치의 안정된 생장환경조성을 위해서 온돌을 갖춘 양잠실을 운영하였다.([도판6] 참조)
 권업모범장에서는 한우의 품종개량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는데, 이를 위해 계획한 우사(牛舍)가 [도판7]에 계획되어 있다. ㄷ자형 건물의 중앙에 유우실(乳牛室)이 있고, 우측에는 우량종을 관리하는 종우실(種‰›室)이 있다. 좌측에는 출산을 위한 산우실(産牛室)와 송아지를 관리하는 자우실(子牛室)이 있다. 2층에는 건초실을 크게 확보하여 사료공급에 만전을 기하였다.

1929년에 농사시험장으로 체제가 개편된 이후에는 기존의 권업모범장 시설을 기반으로 시험 및 연구 기능에 필요한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추가 건립하였다. 농사시험장 청사 동쪽에는 농작물실험실을 비롯한 기존 건물들 사이로 수납사, 저장고 등의 저장시설이 건립되었다.([도판8] 참조) 서호의 아래쪽으로 항미정(杭眉亭)이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도판9]에서 당시 농사시험장의 전체 영역을 볼 수 있는데, 농사시험장 영내에 전반적으로 숙소가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비하여 조직과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농사시험장에서는 식량생산확충을 위해 시설을 다각화하여 운영하였다. 국가기록원 소장 도면 중에서는, 퇴비사([도판11] 참조), 토사([도판12] 참조), 맥류시험실([도판13] 참조) 등에 관련된 도면도 찾아볼 수 있다. 퇴비를 비롯한 비료의 연구는 식량생산 증대를 위한 시급한 연구과제로서 진행되고 있었고, 토사에서는 토끼의 품종을 개량하기 위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또한, 곡물식량자원의 다각화를 위해서 맥류에 대한 연구도 폭넓게 수행되었다.

<참고도판>
도판1. 권업모범장증축공사배치도, 1910~2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2. 경기도수원군일형면병둔리 병잠업시험장부지 정여자잠업강습소부지, 1910~2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3. 수원권업모범장부속과수원현업사무소급조수숙사부지지균공사평면도, 1919년 상세보기
도판4. 수원권업모범장청사수선지도, 1910~192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5. 원잠종제소청사신축설계도, 1910~2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6. 수원권업모범장온돌식양잠실지도, 1910~2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7. 수원권업모범장우사기타신축설계도, 1910~2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8.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온실기타신축공사배치도, 1939년 상세보기
도판9.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맥류시험실기타신축공사배치도, 1929-44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10. (무제), 1929-44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11.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온실기타신축공사설계도/ 퇴비사, 1939년 상세보기
도판12.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종토생산토사기타신축공사설계도/ 토사조리실지부, 1940년 상세보기
도판13.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맥류시험실기타신축공사설계도/ 본장조사실지부, 1929-44년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