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와 같은 부속기관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각 기관은 해당 지역에 적합하고 생산량이 많은 특산물을 개량·증식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1920년에 개관하여 운영되었던 서선지장은 밭농사 중심의 관서지역에서 농업생산을 증대시켜 수탈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서선지장에서는 전작(田作)에 대한 시험과 연구를 담당하였다.
1930년 10월에는 벼농사의 중심지인 호남지역에 수도작(水稻作)을 연구할 수 있는 남선지장을 개관하였고,같은 해 2월에는 김제간척출장소를 설립하여 간척지에의 수도(水稻) 품종개량과 여염(餘鹽)에 관한 시험 연구를 담당하게 하였다.
1931년 3월에는 함경남도 갑산에 북선지장 개관하여 고지대에서 농업을 경영하고 생산물을 가져가려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북선지장에서는 농작·축산뿐만 아니라 이민자들을 위한 준비사업(이민경영시험)과 북선개척을 위한 자료조사(조사사업)가 함께 진행되었다.
용강면작출장소는 조선의 재래면(在來棉)이 중서부지방에서 주로 재배된다는 점을 착안하여 남쪽의 목포면작지장과 함께 면작(棉作)에 대한 사업을 분담하였다. 다만, 용강면작출장소는 북부지방의 재배성과가 저조하였고, 해당 지역의 면화공판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어 1932년에 폐지되었다.
차련관잠업출장소는 일본의 ‘잠견백만석증수계획(蠶繭百萬石增收計劃)’ 수립에 의한 원잠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1930년 평북 철산군 차련관에 설치되었다.
일제말기인 1944년에는 ‘농업기술기관정리통합안(農業技術機關整理統合案)’에 의거하여 전 농업기술기구를 전면적 총동원체제로 일원화하였다. 모든 시설은 총독부 산하에 8개지장, 17개 분장으로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해방과 함께 모든 시설은 미군청정을 통해 한국으로 이양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도면을 통해, 각 시설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서선지장은 기존의 권업모범장 서선지장의 시설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업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에 작성된 [도판1]을 보면, 기존 시설에 분석실을 추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다만, 실제 경작을 관리하는 현업사무실 부분에 대한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도판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지 내에는 현업사무실, 청사를 비롯하여 관사들이 많이 건립되어 있어, 전쟁에 돌입한 일본의 농업생산에 대한 절박함을 읽을 수 있다.
농사시험장 간척출장소는 간척지에서의 농업을 연구하고자 전라북도 익산에서 개소하였다. 모든 건물들이 1929년에 계획되었다. [도판3]에서는 청사 건물 계획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무실과 숙사(宿舍)가 결합된 전형적인 지방 출장소 사무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농사시험장 잠업시험소의 북부출장소로 개소한 차련관잠업출장소에 대해서는 1929년 이래로의 시설 변화과정을 배치도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1929년의 배치도를 보면([도판4] 참조), 잠실(蠶室) 1개동과 숙사, 퇴비사, 관사, 농구사를 설치하여 초기 개소한 것을 볼 수 있다. 1931년의 [도판5]에서는 건견실(乾絹室)을 비롯한 건물이 추가되었고, 1932년의 [도판6]에서는 하추잠종저장고(夏秋蠶種貯藏庫)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청사를 비롯한 행정시설과 잠실(蠶室) 등의 증축공사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수원 농사시험장 인근 화산(華山)에는 목장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도판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도판>
도판1.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서선지장청사기타전기설비공사설계도/전등기타배선평면,1931년
도판2.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서선지장현업사무소기타신축공사설계도/배치도, 1940년
도판3. 수원모범장간척출장소청사기타신축공사설계도/ 청사상세/ 평면급상세, 1929년
도판4. 잠업시험소북부출장소배치도, 1929년
도판5. 차련관잠업출장소건견실기타배치도, 1931년
도판6. 농사시험장차련관잠업출장소하추잠종저장고신축공사/ 배치도, 1932년
도판7. 수원농사시험장화산목장부속건물전등배선도, 1929~1944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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