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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북한지방 고적에 대한 도면은 고분 유적에 대한 도면을 제외하면 모두 75매이다. 고분 유적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제문에서 다루었다.
이중, 관련 도면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는 ‘북청성 남문(15매)’과 ‘평양 보통문(46매)’에 대해서도 별도 해제문을 작성하였으며, 여기에서는 기타 7개의 시설에 대한 도면을 다루었다. 그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표와 같다.
번호 시설명 지역 도면
1 개성 만월대 경기도 개성시 4
2 동명관 (성천객사) 평안남도 성천군 1
3 용강군 고비 비각 평안남도 용강군 2
4 의주 통군정 평안북도 의주시 1
5 평양 숭령전 평안남도 평양시 1
6 평양 숭인전 평안남도 평양시 2
7 평양 을밀대
평안남도 평양시 3
총계 14

 고려시대의 궁궐 중에 현재까지 그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시설이 ‘개성 만월대(開城 滿月臺)’이다. 만월대는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에 모두 불에 타서 그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고려시대 본궐(本闕)이 있었던 자리인데, 조선시대 이후에 통칭 ‘만월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 시기인 1917년 경 만월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석축과 초석 등에 대한 발굴과 출토 유물에 대한 전시가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서 다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회경전이 있는 중심 건축군을 중심으로 그 남쪽에 입구구획, 서쪽에 내전과 침전이, 동쪽에는 좌춘궁이, 동남쪽에는 동지가 있었다. 입구구획에는 남쪽 궁문인 승평문으로부터 차례로 신봉문, 창합문이 놓여 있었다. 회경전 동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또 길게 건축군이 연결되어 있는데, 회경전 북쪽으로는 장화전, 원덕전 등이 있었다. 회경전, 장화전, 원덕전 등은 모두 높은 축대 위에 회랑을 두른 안뜰에 배치되어 있어 궁전의 중심건축군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도판1][도판2]는 개성 만월대의 발굴 공사를 위한 도면이다. 도면에는 각각 해당 부분이 묵선(墨線)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비고(備考)’란에 그 내용을 기재해 놓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도판1]은 회경전(會慶殿) 일대의 제1기 공사가 끝난 이후에, 제2기 공사 구역인 장화전(長和殿) 구역을 표시하고 있는 도면이며, [도판2]는 이후에 제3기 공사 구역으로 원덕전(元德殿)과 장경전(長慶殿)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도면이다.
 [도판3]은 당시 발굴된 만월대의 전체 모습을 기재하고 있는 배치도이다. 도면에는 ‘대정6년10월 완성(大正六年十月完成)’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도면의 작성년도를 알 수 있다. 남쪽의 도로에서 진입로를 내고, 신봉문(神鳳門)의 동쪽에는 소규모 진열장(陳列場)을 마련해 놓았음을 볼 수 있다. 창합문 안쪽의 궁궐 영역에는 각 지역의 표고가 기록되어 있으며, 초석과 기달의 발굴 위치와 모습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발굴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주요 건물지에는 문헌을 통해 확인된 건물명을 기재해 놓고 있다.

 [도판4]는 ‘동명관외삼문협부속측통석원변경배치도’이다. 동명관(東明館)은 평안남도 성천군에 위치한 성천객사(成川客舍)의 본채이다. 성천객사는 1343년 처음 건립되었으며, 1613년에 불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세우고, 1766년에 또 불탄 것을 1768년에 다시 고쳐 지은 건물이다. 이후, 성천객사는 한국전쟁 당시(1951년 12월) 폭격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성천객사는 통칭 동명관으로 불렸으며, 일제시기 평안남도의 대표적인 명승³ 적 중 하나로 칭해졌다. 하지만, 오랜 기간 수리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갈수록 건물의 노후화가 심해지다가 1939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총독부에서 약간의 국비를 지원하여 일부 건물에 대한 수리를 진행하게 되었는°, [도판4]는 그 당시의 도면으로 추정된다. 도면에 기재된 내용은 동명관 주위의 돌담장(石垣)을 수리하고 변경하는 것이며, 동명관 내의 건물들의 배치가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도판5]는 ‘평양숭령전수선설계도’이다. 숭령전(崇靈殿)은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해 있다.
숭령전은 단군과 동명왕(주몽)을 제사지내던 사당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1429년(세종 11)에 단군사당을 세우고 동명왕과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에는 ‘단군·동명왕사(檀君·東明王祠)’로 부르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건물을 다시 고쳐 세우고 그 이듬해부터 ‘숭령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면에는 숭령전(崇靈殿)과 내삼문(內三門), 삼문(三門), 전관수직방급전하인수직방(殿官守直房及殿下人守直房)의 4개 건물의 평면도가 기재되어 있다. 도면에는 각 건물의 치수 외에는 다른 기호가 표시되어 있지 않고 작성연대도 기재되어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수선하는 공사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각 건물에 대한 구체적인 치수가 기재되어 있어, 당시의 현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도판6]은 ‘평양숭인전수선설계도’이다. 숭인전(崇仁殿)은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해 있다. 숭인전은 1325년(고려 충숙왕 12)에 기자(箕子)를 제사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 기자사(箕子祠)의 본전이다. 평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현재는 본전만 남아 있다. 1430년(세종 12)에 중건된 후에 기자전(箕子殿)이라 불리다가 1612년(광해군 4)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숭인전은 1977년 숭령전 옆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도면에는 당시 숭인전의 배치도가 기재되어 있는데,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정전(正殿)이 차례로 축을 맞추어 늘어서 있고, 내삼문과 정전 사이에는 하방(下房), 전수직방(殿守直房)이 있어, 정전 앞 마당을 구획하고 있으며, 전수직방 너머에는 담으로 구획되어 전관수직방(殿官守直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숭인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었으며, 외삼문은 정면 3칸에 두 열의 기둥열을 가졌다. 또한 내삼문은 정면 3칸에 하나의 기둥열을 가지고 있었음을 도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면에는 각 건물과, 기둥과 기둥 사이의 치수가 기재되어 있어, 당시 건물의 현황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도면에는 작성연대가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평양숭인전의 화재와 도면의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화재 이전의 수선 공사 시에 작성된 도면으로 생각된다.

 [도판7][도판8]은 평양 을밀대의 수선 공사를 위해 작성되었던 도면이다.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乙密臺)는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숙종 40)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며, 그 후로도 여러 차례의 보수가 이루어졌다. 을밀대는 높이 11m의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누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축대는 고구려 당시의 것이며, 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기둥은 밑 부분에 높이 1m 정도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웅장한 자태를 과시한다. 을밀대는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도면 모두 작성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어느 시기에 작성된 도면인지는 알수 없다. [도판7]은 을밀대 축대의 한 쪽 부분이 무너져 하나의 장초석이 유실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재된 평면도와 단면도에 축대가 무너지고 초석이 유실된 당시의 현황을 기재해 놓고 있으며, 이를 수리하기 위한 수선도면도 같이 기재하고 있다. 당시 수리는 붕괴된 부분의 토사를 계단 모양으로 깎아내고, 내부를 콘크리트로 채우고, 바깥쪽을 잡석을 쌓아 마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도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판8]은 을밀대의 평면과 주위에 설치한 흙담(土屛, 토병)의 모습을 담고 있는 도면이다. 도면에는 이 흙담의 상세도 또한 같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을밀대의 보호를 위한 흙담을 어떻게 쌓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참고도판>
도판1. 개성만월대평면도/4, 1917년경 추정 상세보기
도판2. 개성만월대평면도/3, 1917년경 추정 상세보기
도판3. 만월대평면도/1, 1917 상세보기
도판4. 동명관외삼문협부속측통석원변경배치도/10, 1939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5. 평양숭령전수선설계도/1, 1920-3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6. 평양숭인전수선설계도/3, 1920년대 초중반 추정 상세보기
도판7. 평양을밀대석원수선설계도/1, 1920-30년대 추정 상세보기
도판8. 을밀대평면급토병일부상세도/2, 1920-30년대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