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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체포와 수형,그리고 기록물

우리나라의 사법근대화는 1894년 갑오개혁기의 권설재판소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9년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제도는 일제에 완전히 장악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적 특수성을 갖는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우리민족 대다수가 이를 반대하였다는 점에서 강압적 치안 유지와 일상적 감시체제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경찰과 재판소, 감옥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작동하였다.

압제의 창에 갖히다 - 수형과 그 기록물

가. 감옥제도의 식민지적 특성

우리나라에 일본식 근대 감옥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07년 감옥관제의 제정 이후이다. 이 때 일본인 형무관들이 우리나라에 대거 진출하였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감옥사무가 일제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으며 조선 강점 이후에는 1912년 조선감옥령의 시행과 감옥관제의 제정이 있었다. 또한 1915년에는 사법부 산하 형사과에 속해있던 감옥이 개별적인 감옥과로 승격하여, 재판, 수사업무와는 별개의 부서가 되었다. 이로써 감옥사무의 식민지적 재편은 큰 틀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일제강점기 감옥제도의 특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10년대

1910년대 일제의 통치 주안점은 식민체제 안착을 위한 강압적 치안유지와 일상적 감시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방식은 대다수의 조선인이 식민통치를 반대했다는 측면에서 폭력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보안법, 범죄즉결례, 조선형사령, 조선태형령 등 다수의 식민지 통제법령을 탄생시켰으며, 이를 통한 자의적, 강압적 수사와 태형으로 대표되는 합법적 폭력을 결합하여 엄벌주의에 입각한 처벌체계를 확립하였다. 1910년대 감옥이란 이러한 식민통치의 야만성과 근대적 처벌체계가 각인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감옥 및 수감자의 현황을 살펴보면 1908년 8개(경성, 함흥, 공주, 평양, 해주, 대구, 광주, 부산)의 본감(本監)과 그에 속한 8개의 분감(分監)에 약 2천4백 여명이 수감되어 있던 것이 1910년에는 본감 8개와 분감 13개에 약 7천 여명으로 증가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검거자수가 급증하여 수감자 수가 약 1만5천 여명으로 증가하여 분감 5개를 본감으로 승격시키고 새로 분감 6개를 설치하는 등 감옥을 증설하게 되었다. 또한 대전지역에 본감을 설치하고 장기수와 특수범죄자를 수용하기로 하여 공사에 착수하기도 하였다.

2) 1920년대

1920년대는 수형자에 대한 관리가 한층 고도화된 시기였다. 이것은 3.1운동의 결과 태형을 폐지하고 신체에 대한 형벌이 아닌 자유형 위주로의 전환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당시 범죄수사학의 발달과도 연관성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1923년 감옥은 형무소(刑務所)로, 분감은 지소(支所)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범죄의 진단과 교정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교정의 실체는 본국인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크게 달랐다. 일제강점기 전반을 통해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즉결처분이 벌금형이며 징역형은 한 명도 없는데 반해, 조선에서는 1927년 즉결처분자 9만 여명 가운데 징역형이 약 1천1백 여명이나 되는 등 ‘죄’에 대한 ‘벌’이 무거웠다. 또한 총독부는 조선의 범죄를 분석하면서 그 원인을 ‘조선민족’은 원래 게으르다거나, 재물에 욕심이 많다는 등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게다가 일제시기 조선의 감옥은 수형자의 증가속도에 비해 감옥의 확장속도가 언제나 느린 편이어서 고밀도의 감옥 내에서 효율적으로 수형자들을 관리하는 것에 감옥사무가 집중되었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잠재적 저항성을 우려하여 일제는 보안과 사상 통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으며, 결국 권력에 절대복종하며 강도 높은 노동을 이겨낼 수 있는 식민지적 인간형으로의 재탄생을 교정의 최종목표로 삼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개성에 소년형무소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또한 18세 미만의 여자는 서대문형무소에, 무기와 10년 이상의 남자는 경성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 수용되는 등 수형자의 연령, 성별, 죄질 등에 따른 전문적인 감옥시설이 나타났다. 1929년의 수감자 수는 약 1만3천 여명이었다.

3) 1930년대 이후

1930년대 이후 감옥체제의 특징은 전시총동원 체제로의 편입과 처우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우선 전자는 당시 일제의 대륙침략과 전시총동원체제로의 전환과 관련이 깊다. 당시는 전쟁의 확전과 장기화로 군수공업과 광업부문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팽창했던 반면, 지속적인 해외이주 등으로 유휴 노동력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때문에 일제는 값싸고 관리가 편한 노동력으로 감옥의 수형자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주침략 이후 전시체제의 재편과정에서 조선의 수감자들은 만주국과 관동군의 관용, 군수용 물품을 조달하는 국영공장 노동자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결국 수형자들은 일반인보다 더 값싸고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강요받게 되었고, 급기야 ‘보국대(報國隊)’, ‘작업대(作業隊)’ 등의 이름으로 국내외에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수형자들은 가장 동원이 용이한 예비병력으로 군(軍)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수형자들의 준 군사조직 및 노동 동원은 한때 전체 수형자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두 번째로 이 시기는 처우의 차별화를 통해 수형자의 복종을 유도한 시기였다. 누진처우제수형자의 처우에 단계를 두어 각 단계마다 의무와 보상을 주는 제도와 가석방 규정 등을 통해 일제는 수형자를 1~4급으로 평가하고, 평가 등급에 따라 일정한 혜택을 제공하거나 가혹한 개조훈련을 실시하였다. 평가는 매월 실시되었으며, 평가기준이 모호하여 심사자에게 절대 권력이 부여되었다. 등급에 따라 수형자는 문서, 도서의 열람, 수용장소의 차등, 휴식시간 중 일정한 이동의 자유 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수형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작업보국, 헌금보국, 사상보국 등의 강요였다. 작업보국은 작업대, 보국대 또는 정신대로 차출 동원되는 것이었고 헌금보국은 작업을 통해 벌어들인 댓가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이었다. 사상보국은 전향한 사상범이 일반 대중앞에서 황국신민화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전시체제 말기의 가석방 인원은 대부분 이러한 보국작업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1935년에는 소록도지소(小鹿島支所)에 나환자 수형시설을, 1936년에 인천에 소년형무소를, 1937년 마산지소에 불구노쇠자 형무소를 1938년에는 공주형무소에 심신미약자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전시체제기 인력동원을 위한 수형자 분류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수감자 수는 1933년 1만9천 여명으로 증가한 이래 1940년대까지 큰 폭의 변화없이 약 2만여명 내외에서 유지되었다.

나. 수감절차와 기록물
1) 입감과 수형

「조선감옥령시행규칙」에 의하면 형무소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호송자와 감옥관리 간의 인수인계 절차를 통해 수감되었다. 이 과정에서 감옥관리는 영수서(領受書)를 작성하여 호송자에게 교부하는데, 영수서에는 입감자의 성명, 인수인계한 연월일시, 인계받은 관리의 성명 등을 기입하였다.

영수서를 통한 입감자의 인수인계가 끝나면 감옥의사가 건강을 진단하였다. 진단결과 입감이 어려울 경우 진단서, 인수인에 관한 조사서류 등을 첨부하여 즉시 검사에게 통보하도록 되어 있었다. 건강 진단이 끝나면 입감자는 ‘위생’을 위해 목욕을 실시해야 하며, 목욕 후 번호가 붙여지고 번호표를 상의에 기재하게 된다.

감옥의 최상위 관리인 전옥(典獄)은 재감자가 준수할 사항 및 형기의 기산과 종료일을 입감자에게 고지하고 입감자의 신상에 관한 사정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신상표(身上表)에 기재한다. 필요에 따라 재판소·경찰관서·기타 관청 또는 연고가 있는 자에게 조회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전옥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는 입감자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입감자의 신분장부·재감인인명부 및 만기력부(滿期歷簿)는 수감 후 3일 이내에 정리하여 필요한 사항을 기재하였다. 재감자의 준수사항은 책자로 하여 감방 내에 비치되었는데, 주로 ‘재감 중에 순종, 성실, 청결 등을 으뜸으로 하여, 품행을 신중히 하고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라’ 는 내용이었다. 감방 앞에는 재방자의 번호·성명 및 연령을 기재하였다.

형사피고인은 가능한 독방에 구금하였으며, 일체의 작업행위에서도 제외시키는 등 다른 수형인과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일반범의 경우 9~12시간에 달하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수형인 상호간의 의사 소통은 금지되었으며, 이동시에는 구호와 제식동작을 통해 행동의 제한을 받았다. 집단행동, 준수사항 위반, 기타 감옥관리에 대한 저항행위가 있을 경우 식사량을 줄이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기도 하였으며, 독방구금, 고문 등도 이루어졌다. 또한 사상범에 대한 전향 강요가 매우 심하였다. 즉, ‘황국신민화’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인 사상범들을 굴복시킴으로써 ‘교화’의 효과를 극대화, 이를 통해 수형인들을 일제의 권력에 복종하고 끈기 있게 노동하는 식민지적 인간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였다.

2) 석방과 사망

형기의 종료로 인하여 석방되는 사람은 가능한 석방 전 3일 이내에 독거구금에 붙이고 전옥이 직접 석방 후의 마음가짐 등에 대해 훈계를 하였다. 또한 석방 10일 전까지 석방 후의 보호에 관한 사항을 파악하였다. 이때 전옥이 필요에 따라 석방될 자의 성격 및 품행과 보호에 관한 의견을 본인 거주지의 경찰관서 또는 본인의 보호를 인수할 자에게 통보하도록 하였다. 주로 요시찰로 분류되는 사상범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형기 만료 외에 수형인은 가출옥에 의해 석방될 수도 있었다. 가출옥은 수형인이 행형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거나 기타 가출옥의 사유가 발생했을 때, 형기의 1/3을 채운 상태에서 가능했다. 가출옥을 위해서 전옥은 판결서 및 집행지휘서의 등본과 품행록 및 신상조사 서류를 조선총독에게 보고, 승인받도록 되어 있었다. 가출옥으로 인하여 석방이 결정되면 전옥이 석방을 통보하고 본인에게 증표를 교부하였다.

수형인이 사망할 경우에는 사체를 검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검시결과 병사인 경우, 감옥의는 그 병명, 병력, 사인 및 사망의 연월일시를 사망장에 기재, 서명했다. 자살이나 기타 변사의 경우에는 그 사실을 경찰관서에 통보하고 검시를 받아 검시자 및 입회자의 직위와 이름 및 검시결과를 사망장에 기재하도록 하였다.

사망자의 병명·사인 및 사망의 연월일시는 신속하게 사망자의 가족 또는 친족에게 통보하며 사망자가 형사피고인인 때에는 검사에게 통보해야 했다. 수형자의 사체는 사망 후 24시간을 경과하여 교부를 청하는 자가 없는 경우, 관공립의 병원·학교 등에 해부용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사체를 청구자에게 교부하거나 해부를 위하여 보낸 경우는 그 사실을 사망장에 기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사체를 교부하는 사람도 없고 해부용으로 보내지지도 않은 경우에는 감옥의 묘지에 가매장하고 사망자의 성명 및 사망의 연월일을 기록한 묘표를 세웠으며, 사체 또는 유골을 합장한 때에는 합장자의 성명 및 사망의 연월일을 합장부에 기재하고 합장장소에 묘표를 세웠다.

2) 주요 기록물

수형생활 중에 생산되는 중요한 기록물의 하나로 지문원지(指紋原紙)를 들 수 있다. 지문원지는 1912년에 제정된 「지문취급규정」에 따라 작성되었는데, 수형자의 지문을 채취하여 관리하는 것이다. 지문에 관한 사항은 후에 일본, 대만 등과 협정하여 상호 교환 관리하여 수사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지문에 관한 사항은 1922년의 개정을 통해 재범자는 지문원지 대신 수형추가소표(受刑追加小票)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는 수용자신분장(수용자신분카드, 재소자신분장, 재소자신분카드, 재감인신분장)을 들 수 있다. 이 서류는 수형인에 대한 상세한 신상정보를 수록한 것으로 명적표(名籍表)와 집행지휘서, 판결문, 지문(指紋), 인상 및 신체특징표(그림포함), 작업표와 행장표(行狀表), 신상표(身上表), 건강진단표, 진료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는 개인 신상의 파악과 개인별 교정을 명분으로 이 문서를 작성, 편철하여 보관하였다. 여기에는 범죄와 관련한 사실 외에 가족, 교육, 종교, 경제상황, 음주량, 주벽 등 생활 전반에 관한 세세한 인적사항과 성격, 범죄원인 등을 분석하는 한편, 직업성적과 자세, 신체상태, 감옥에서의 행실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신상표와 작업표, 행장표 등이었는데, 이 표들은 후일 가석방에 관한 심사에서도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었다.

다음으로 가출옥관계서류가 있었다. 이 서류는 가출옥을 허가 받기 위한 보고서류로 가출옥을 허가할 사람의 이름, 나이, 본적, 주소, 죄명, 범죄횟수, 형명, 형기, 형기의 기산 및 종료일, 형기 1/3에 상당하는 날짜, 가출옥을 허가하는 사유, 출옥 후의 보호자의 이름, 직업, 주소, 생활의 상태 및 보호자와의 관계를 기록한다. 또한 여기에는 판결문을 비롯하여, 최근 18개월 간 신분장에 기재된 행장표와 신상표 등 신상조사 서류가 첨부되었다. 가출옥에 대한 승인이 완료되면 가출옥인명부에 이름을 기재하고 석방이 이루어진다.

이 외에도 재감인명부, 입감부, 출감부, 사망장, 만기력부, 등도 수형과 관련한 주요 기록물이었다. 한편 수형과 관련한 서류 외에 감옥에서 관리하는 중요 행정문서로, 상급관청의 훈령, 지령, 통첩, 보고관련 서류, 영구적으로 사용될 여러 규칙관련 서류, 여러 통계관련 표, 재감인의 도주 및 비상사태 관련 보고서류, 감옥연혁지, 관유재산에 관한 장부, 전옥명령 및 훈시에 관한 장부, 기밀서류 등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