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한동안 문화영화에 관련된 법적 규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1949년 「대한영화사 관리규정」 1조에는 국책에 순응한 영화의 제작을 공보처가 관리한다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때 ‘국책에 순응한 영화’의 범주 안에는 관제 문화영화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영화사는 일제 말기 친일 군국주의 영화를 제작했던 조선영화주식회사를 1949년 총리령으로 국가에 귀속시키면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이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영화사는 국책에 순응한 관제영화를 만드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하였다.
공보처는 영화 검열을 비롯하여 영화와 관련된 제반 업무를 전담한 주무부처였는데, 1955년 공보처가 대통령 직속의 공보실로 재편되면서 영화에 관한 사무는 문교부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공보실에는 영화과가 존속하였고 산하에 대한영화사를 두고 관리를 도맡았으며, <대한뉴스>와 문화영화 제작을 전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대한영화사를 산하에 두고 있던 주무기관인 공보처를 대통령 직속으로 재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이전에 정부 기관이나 군·경찰 조직 등에서 산발적으로 관여하던 문화영화 제작을 일원화하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문화영화를 보다 효율적으로 제작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수립 후 문화영화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8년 문교부 고시 53호로 발표된 「국산영화 제작장려 및 영화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특혜조치」였다. 이는 우수 국산영화 제작자 및 수출업자, 문화영화 및 뉴스영화 수입자, 우수 외국영화 수입자, 국제영화제 수상업자 등에게 외화 수입 쿼터라는 특혜를 주는 조치였다. 이 조치는 “문화영화란 교육, 과학, 문화, 산업, 시사, 체육, 음악 등을 내용으로 하여 실사 기록을 위주로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 단 순수하게 학생의 교육을 위하여 제작된 교재영화는 문화영화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4천 피트 이상의 문화영화 3편 이상을 수입하여 국내 극장에 상영한 자는 극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 조치의 수혜를 받는 대상은 국산 문화영화 제작자들이 아니라 국산 극영화 제작자들과 외국 문화영화 및 뉴스영화 수입업자였다. 외화수입쿼터가 보상책이 되었던 이유는 당시 극장가에서 외화는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어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외화 수입을 허락한다는 것은 경제적 이권을 부여하는 ‘특혜’로 인식되었다. 흥행 확률이 떨어지는 국산영화를 안정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흥행이 보장되는 외화를 수입하는 것이 당시 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리스크 관리 방안이었다.
그렇다면 국산 문화영화 제작자들은 이 보상 조치에서 왜 제외되었을까? 그 이유는 당시 문화영화는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과 공보실이 관리하는 대한영화사, 정부 기관, 군과 경찰 등 공적 기관에 의해 생산되었고 민간에서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화영화는 독립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라 극영화와 함께 곁들여 상영되는 보조 프로그램으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문화영화 제작은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1959년 문교부 고시 제417호로 「외국영화 수입허가 시책」이 발표되었는데, 이 시책에는 외국영화 상영 시에는 문화영화 1편과 뉴스영화를, 국산영화 상영 시에는 뉴스영화를 의무적으로 동시 상영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화영화의 의무 상영 조치가 부활되면서 문화영화 제작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문화영화의 중요성을 가장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활용한 것은 1960년대의 군사정부였다.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에 따르면 국립영화제작소는 “공공기관의 영화 제작 사업 또는 민간영화 제작을 조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사실 대한영화사는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직영이었지만 사단법인의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직속 기관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화영화 제작 기관을 명실공히 ‘국립’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국가가 문화영화와 뉴스영화의 직접적 공급자임을 명확히 선언한 것이다. 1961년 8월, 군사정부는 「공보 목표, 정책, 지침 및 공보 활동의 방침과 구체적 방안」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국립영화제작소 설립의 취지를 짐작하게 하는 문구가 있다. “혁명과업 완성에 전 국민의 자율적이며 적극적인 참가를 도모하여 공보 매개체인 신문 잡지를 비롯한 모든 간행물, 방송, 연극, 영화, 사진, 시가, 음악, 미술, 조각, 연설, 포스터, 삐라 등 각종 전파 수단의 광범한 보급을 통하여 국민과 정부와의 접촉 기회를 최대한도로 확대시켜 상호이해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의 정책 방향에 발맞춰 모든 문화예술, 미디어가 공보 매체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공보 매체 중에서 가장 핵심으로 인식된 것이 바로 영화였다.
1962년 1월에 제정된 「영화법」에서는 기존에 정부 고시 형태로 존재했던 문화영화의 의무 상영을 법률로 규정하였다. 이 법안에 따르면 문화영화는 “사회, 경제, 문화의 제 현상 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 풍습 등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사실 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로 정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문화영화가 ‘극영화가 아닌 것’으로 명시되었고, 1950년대에는 ‘실사 기록을 위주로 제작한 영화’로 되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사실 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라는 대목은 1950년대 정의와 유사하다. 이는 법률적 정의상 문화영화에 극적인 요소가 포함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 문화영화에는 극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도 존재하였고, 1960년대 문화영화에는 실제로 극영화 및 장편 애니메이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화영화는 당시 상업적 극영화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기술적 실험이나 새로운 기법을 시도할 수 있게 하는 안전한 장치가 되어 주었다. 「영화법」은 관행이나 고시 등에 의한 영화 관련 규정을 일부 계승하고 법제화한 측면, 영화에 대한 군사정부의 시각과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측면, 그리고 영화계의 요구나 사회의 문화적 수요 등에 부응하는 측면이 혼재되어 있는 법안이었다.
「영화법」은 수차례 개정을 거듭하였다. 1963년 1차 개정 「영화법」에서는 문화영화와 함께 뉴스영화의 의무상영이 규정되었다. 문화영화의 상영이 의무화되자 민간에서도 문화영화 제작사들이 생겨났다. 이에 1차 개정 「영화법」에서는 국산 문화영화 제작업자들에 대해 등록 조항이 생겨났다. 개정 시행령 제1조에서는 국산 문화영화 제작업자의 등록 기준으로 최소 35mm 이상의 촬영기 1대와 총 성능 50KW 이상의 조명기가 요구되었다. 극영화 제작업자의 등록조건이 35mm 이상의 촬영기 3대 이상, 총 성능 200KW 이상의 조명기를 비롯하여 스튜디오와 감독, 촬영감독, 전속 배우, 동시녹음기 및 녹음기사 등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완화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2차 개정 「영화법」에서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정치적 선전이 되는 문화영화 또는 뉴스영화는 상영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국립영화제작소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남한의 근대화 발전상을 선전함으로써 박정희 후보에게 유리한 선거홍보용 영화 <팔도강산>(1967, 배석인)을 제작하고 상영하였다. 2차 개정 「영화법」 시행령에는 문화영화, 뉴스영화, 텔레비젼 영화, 광고영화 및 영화 예고편의 검열에 대한 규정이 신설되었다. 이전에도 검열은 있어 왔지만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이 법제화된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시행령 제11조에서는 외화수입 쿼터를 문화영화에까지 확대하였다. 국제영화제 출품작, 국제영화제 수상작, 우수 국산영화 수상작, 일정 금액 이상 수출되어 유료 상영된 영화라는 외화수입쿼터 보상 기준이 극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영화에까지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1968년부터는 민간 영화사들의 문화영화 제작이 활발해졌다. 또한 신필름이나 세기상사 같은 극영화 제작사들도 문화영화 제작에 뛰어들어 장편 문화영화의 제작과 수입이 활성화되었다. 문화영화로 분류되었던 색다른 영화들, 곧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한 장편 극영화인 <팔도강산>이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 <흥부와 놀부>(1967), <손오공>(1968) 등의 흥행 성공은 문화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문화영화 제작과 수입이 활발해지고 수익성이 높아지자 과학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외국의 SF영화나 성을 다룬 영화들이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대거 수입되었다. 이처럼 명백한 극영화를 문화영화라는 라벨을 붙여 수입하는 세태가 논란이 되자, 1968년 문화공보부 영화위원회는 문화영화 진흥책의 일환으로 문화영화의 개념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려는 방침을 밝힌다. '문화영화를 협의와 광의로 해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해석의 차이를 허용함에 따른 혼란을 피하고 법을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1970년 3차 개정 「영화법」 에서는 문화영화 제작에 대한 규율을 강화한다. 한국영화 제작사와 수입사를 통합하였던 1963년 1차 개정 「영화법」 의 방침을 수정하여, 한국영화 제작에 대한 인센티브로 외화 수입권을 배정하는 방식을 일시적으로 폐지하고 문화영화 제작에 대한 외화수입쿼터 제도도 폐지하였다. 또한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극영화가 수입되는 폐해를 막기 위해 외국 문화영화의 수입 불가 조건이 신설되었다. 곧, 극적 요소가 있거나 단순 오락·흥행을 위해 제작된 영화,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을 소개, 혹은 선전하는 등의 영화는 문화영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도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1973년 공포된 4차 개정 「영화법」 은 1970년에 분리되었던 수입과 제작을 다시 일원화시키고 기존의 등록제였던 영화제작업을 허가제로 전환하여 국가의 규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시행령의 문화영화 규정 중, 외국 문화영화의 수입 불가 조건에서 “특정 사람이나 물건을 소개하거나 선전하는 영화”라는 항목이 삭제되었다. 이러한 문화영화 수입 조건의 완화는 얼마 못가 1976년 개정 시행령에서 재강화된다. 극영화와 문화영화의 기준이 모호한 작품들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화된 수입 불가 조건은 “주된 소재나 구성에 있어서 극적 요소가 있는 영화, 순수 기록물 또는 준 기록물이 아닌 영화, 영화의 주된 내용을 해설이 아닌 대사로 처리한 영화, 교육적•문화적인 효과가 없는 단순한 오락 위주의 영화”는 문화영화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의 문화영화는 국립영화제작소 핵심인력들이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업에 뛰어 들어 산업 발전에 따른 기업홍보영화, 관광홍보, 지역개발을 다룬 문화영화 등을 제작하면서 점차 정부주도에서 민간 부분으로 확대되었다. 민간 문화영화 제작자들은 문화영화의 범주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광고영화, 만화영화 등을 제작하면서 다양한 판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들에게 1970년대는 문화영화의 전성기였다.
1984년 5차 개정 「영화법」에서는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완화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1970년대 전반을 거치면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의 기능은 점차 TV 뉴스와 다큐멘터리로 옮아갔다. 1970년대부터 도래한 TV 대중화로 인해 관객을 빼앗긴 영화는 자생력을 되찾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의 물결에도 여전히 문화영화, 뉴스영화의 동시상영이 강행되었던 것은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96년 마침내 「영화법」이 폐지되고 「영화진흥법」이 신설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개칭이 아니라 신설인 까닭은 국가가 영화를 관리•지도하며 좌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변화되기 시작한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1994년 국립영화제작소는 국립영상제작소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 영상홍보원, 한국정책방송원 등으로 이어진다. 1996년 뉴스영화의 동시상영 조항이 폐지되고 1998년에는 문화영화의 의무상영도 폐지되었다. 문화영화와 뉴스영화의 동시상영 의무화가 법적으로 명문화된 1962년부터 따지면 36년만이고, 1942년 일제가 개정 「조선영화령」에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을 강제한 것으로부터는 56년만이었다. 2004년까지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에서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몇 편의 영화가 더 제작되었으나, 사실상 문화영화는 사회적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1)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 국가 정체성」, 『역사와 현실』 74, 한국역사연구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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