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보 가족 (1991)
문화영화 <우리는 정보 가족>은 재단법인 정보문화센터로부터 재료비와 제작 수수료를 제공받아 국립영화제작소 제작1과에서 만들어졌다. 연출은 김금동이
맡았으며, 촬영에는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다. 당시
「영화제작지시서」의 기록에 따르면, 제작 기간은 1991년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였다. 보급 대상은 전국 극장이었던 바,
문화영화 의무상영제에 따른 일괄 배급을 상정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35mm 필름 156벌과 16mm 필름 2벌에 대한 복사가 계획되어 있기도 하였다.
러닝 타임 7분 정도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기획 목적은 “정보화시대의 정보통신기기 이용과 정보활용을 통해서 우리생활을 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게
이끌어 준다는 내용”을 홍보함으로써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토록” 하려는 데
두어졌다. 이를 위해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레이션 설명이 포함된 기록영화 형식을 취하고 그 중간 부분은 단편적인 서사를 담은 짧은
극영화 1편으로 채움으로써 그 교육적, 계몽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에는 서울 시청 앞의 풍경이 펼쳐지며 “바야흐로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라는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깔려 나온다. 이후 신문사 윤전기, 거리의 포스터, 서점의 진열대,
거리의 전광판,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속 다양한 이미지가 각각의 쇼트를 장식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의 정보의 중요성과 편리한 생활을 위한
통신망 활용의 필요성이 계속해서 차분하고도 또랑또랑한 톤의 음성으로
강조된다. 이렇게 1분여가 지나면,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뜨고 곧이어 한 ‘정보 가족’의 사례가 소개된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간단명료하다. 슬하에 7살 유치원생 딸 하나를 둔 37세의 무역회사 부장 ‘정보통 씨(길용우 분)’가 자신의 아내인 33세
주부 ‘김옥자 씨(견미리 분)’의 생일 기념으로 주말 제주도 여행을
약속하였으나, 회사 일로 인해 이행이 어려워지자 여행을 보류하는 한편 아내가 제안한 저녁 외식과 음악회 관람도 사양하는 대신 꽃 배달 서비스를
통해 장미꽃 다발을 선물함으로써 결국에는 아내와 딸을 웃음 짓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극중 인물의 이름에 반영되어 있듯, 정보통 씨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주요 정보를 주로 컴퓨터를 통해 습득한다. 아울러 업무뿐만 아니라
꽃 배달 서비스 등 일상에서도 편리함을 영위한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주부 김옥자 씨 역시 전화 서비스를 통해 주말 날씨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고 컴퓨터를 사용하여 제주도행 항공권을 예매하는 등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들 부부의 대화는 다름 아닌 컴퓨터 전자
메일로 이루어진다.
서울 아파트에 거주하는 3인 구성의 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짜인 단막극이 종결되면, 나머지 1분 10여초 동안 영화의 흐름은 다시 처음
1분여와 같이 유지된다. 영화는 전화를 이용한 ARS(음성정보서비스)나
컴퓨터를 이용한 PC(정보통신)서비스를 통해 스포츠나 레저, 날씨, 각종 문화행사, 시간, 국내외 주요뉴스, 증권이나 부동산, 금융 및
상품유통, 관광 및 교통 정보 등을 얻을 수 있음을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알기
쉽게 정리하고, 이후 다양한 장소에서 각종 사례를 찍은 실사 장면들을 통해 누구라도 “정보 사회의 주인공으로서 새로운 정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다.
1990년대는 컴퓨터의 보급과 발달이 가속화되고 무선호출기를 거쳐 휴대폰 등 개인 통신 장비가 상용화되며 PC통신에 이어 인터넷 구축이 보편화되어
가던, 정보통신의 혁신적 변화가 일던 시기였다. 문화영화 <우리는 정보 가족>에는, 이미 1990년대 초 시점에서 이렇듯 급변하게 될 새로운
환경을 예측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대응 태세를 갖추도록 함으로써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려 한 정부
당국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고 할 만하다.
대전 너른 벌에 희망찬 기운 (1993)
이 작품은 대전직할시의 의뢰를 받아 “대전의 유구한 역사와 시대별 사건, 관광명소 및 대전의 발전상을 소개하여 ’93엑스포개최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엑스포를 맞는 시민들의 긍지와 결집력을 고취”한다는 취지 하에,
국립영화제작소 제작1과에서 이창호의 연출로 만들어졌다. 관련 문서를 확인하건대, 1992년 10월 제작이 개시되어 1993년 2월경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된 이 작품은 당초 20분
분량의 ‘대전, 오늘과 내일’이라는 제명으로 기획되었으나, 중간에 ‘엑스포와 대전’으로 바뀐 뒤 한 차례 더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최종 러닝
타임도 16분 15초 정도로 편집되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홍보용 문화영화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컬러 및 흑백 영상과 사진 이미지를 통해 대전의 과거와 현재가 전시되고 중심부와
주변부의 곳곳이 시각화됨과 동시에 남녀 두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정확하고
구체적인 해설이 어우러지면서, 그 면면에 대한 소개와 설명이 상세하고도 알기 쉽도록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작지시서」 상의 수록 내용은 “1 교통, 관광, 문화, 교육, 관광의 요충지 대전의 상징(백목련, 까치) 2. 청동기 시대부터 대전의
유구한 역사와 시대별 사건 3. 교통안내, 관광명소와 문화재, 특산품
쇼핑산업 4. 대덕연구단지, 교육과 문화예술등 5. 에필로그(대전엑스포현장과 조감도, 엑스포개최의의등)”이었는데, 제작 과정에서 영화는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순서에 입각하면서도 구성에 있어 보다 체계성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완성본에서는 지구본과 세계 지도에 이어 나온 한국 지도 속에 대전의 위치가 표시된 뒤, 대전과 관련된 다양한 사진 자료 위에 제목 이미지가
나타나며 영화가 시작된다. (1) 대전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 자연 환경이
소개된 후, (2)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의 대전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때 유물 및 유적에 관한 사진과 영상, 근대 이후 대전의
모습이 담긴 과거 흑백 사진과 영상이 활용된다. 또한 대전역, 목척교,
유성과 신탄진의 옛 5일장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과거 흑백 이미지와 현재 컬러 영상으로 대비된 채 비추어진다. (3) 다음으로, 1989년
‘직할시’로 승격한 대전의 면적, 인구, 신시가지에 관한 설명, 오정동의
농수산물시장, 동구인동의 공단, 평촌동의 한국담배인삼공사를 통한 대전의 농수산업 및 공업에 관한 설명, 북으로 대표되는 특산물과 시민회관,
보문산 공원, 시내 중심가, 유성온천, 대청호와 계룡산 국립공원 등 대전
시민의 문화, 여가, 휴식, 휴양, 관광 공간에 관한 설명, 대전국립묘지에 관한 설명이 관련 영상과 더불어 차례로 이어진다. 아울러 (4)
향교와 서원을 비롯한 옛 선열들의 교육 및 학술 기관들과 1917년에 세워진
관립 경성중학교 대전분교 등 근대 교육 기관에 이어 국립 충남대학교, 시립 한밭도서관 등 현재의 교육 및 학술 기관들이 소개된다. 특히 국립
중앙과학관, 대덕연구단지 등을 통해 ‘과학 도시’로서의 대전의 면모가
강조되는데, 그러면서 (5) ‘대전 엑스포 93’을 계기로 2000년대 미래 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엑스포 부지와 공간
조감도, 마스코트 등의 영상 이미지를 통해 역설된다. 그리고 대전 시민들의
표정과 대전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주지하다시피,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에서는 세계박람회(EXPO)가 개최되었다.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세계 108개국과 33개의 국제기구가 참가하였는데, ‘새로운
도약의 길’이라는 주제가 붙은 대전 엑스포를 통해 정부는 서울 올림픽(1988)의 영광을 재연하고 첨단 과학을 주도하며 21세기 선진
산업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이에, 대전직할시 측에서도 대전을 알리고
엑스포 행사를 홍보하려는 차원에서 국립영화제작소에 의뢰하여 문화영화 <대전 너른 벌에 희망찬 기운>을 내놓았던 것이다.27)
1990년대 한국에서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국제적 행사의 개최가 성사되었던 바, <광주 비엔날레>(1996)나 <국제의회연맹 서울 총회>
(1997) 등과 같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기획·제작된 여타
문화영화 내에도 이들 행사 관련 사항들이 종종 담겨지곤 하였다.2) 이미 1992년 말에 기획되어 1993년 초에 완성된 <대전
너른 벌에 희망찬 기운>의 경우 이들 작품보다 선행되어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울러 이들과는 달리 대전 엑스포 개최 이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특색을 보인다고 하겠다.
경복궁 (1994)
<경복궁>은 국립영화제작소 제작3과에서 해외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관련 문서에 따르면, 작품의 목적은 “경복궁의 아름다운 전각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흔히 볼 수 없는 궁궐복원 과정도 수록하여 소개한다”는 데
두어졌고, 제작 기간은 당초 1994년 4월부터 11월까지로 상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촬영 과정 중에 국립영화제작소가 국립영상제작소로
변경되면서 담당 부서도 영상2과로 옮겨졌으며, 감독 역시 김성민에서
백용선으로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촬영은 정형준과 홍성주가, 해설은 우재근이 맡았고, 1994년 12월 완성 후 VHS 15벌이
복사되어 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 등에 배포되기도 하였다.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된 20분 분량의 문화영화로 기획된 이 작품의 「영화제작지시서」 상 수록 내용은 “1. 근정전, 경희루, 향원정 2.
단청작업 3. 목작업 등 복원공사”였으나, 「해외홍보영화 “경복궁” 제작
완료 보고」 공문 상에는 “o 서울전경 o 왕도로서의 서울 o 궁궐, 궁궐과 역사 o 서울의 궁궐 o 경복궁, 경복궁의 특징 o 경복궁의 훼손,
복원계획, 복원 o 경복궁의 의의”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를 토대로,
영화는 17분 30여초 동안 경복궁을 둘러싼 설명을 다채로우면서도 체계적으로 행한다.
근정전이 찍힌 사진 위로 한글과 영어로 영화의 제목이 표기된 뒤, 약 1분 동안은 한강, 중구 및 종로구의 도심, 여의도 일대, 암사동 선사
유적지 등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한국의 수도 서울에 대한 소개 해설이
깔린 채 화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1분 30초가량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등 조선 왕조 시대에 서울 지역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관련 화면들과 어우러진 채
“조선의 대표적인 궁”인 경복궁의 역사와 공간에 관한 개괄적 소개가 50여초 동안 있은 후, 경복궁 내 주요 건축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5분가량 뒤따른다. 이때 광화문, 근정문, 일화문, 월화문 등의 주요 문,
근정전, 사정전, 천초전, 수정전 등의 주요 건물, 경회루, 정자, 취향교 등의 연못 주변 건축물, 자경전과 그 굴뚝 시설, 집옥재와 부속
건물들, 육상궁을 비롯한 칠궁 등이 차례로 다루어진다.
시작 후 8분 20여초가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해설의 초점을 달리한다. 먼저, 1분여 동안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경복궁의 훼손 사례를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이에 정부가 1990년부터 이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점을 만춘전의 복원 사실을 예로 들어 알려준다. 이어 약 7분간 ‘대목수’ 신흥수의 지휘 하에 진행되는 나무 골재
구축 작업, 기와 작업, ‘만봉 스님’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는 단청 작업
등을 통해 경복궁 복원의 과정과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로 인한 경복궁 이미지의 변화상을 이미지 특수 효과를 활용하여 제시한다. 이어
나머지 1분 정도는 경복궁의 가치와 의의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이와
함께 경복궁 복원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회루 사진 위로 제작 참여자들의 한글 자막과 국립영상제작소의 한글, 영문 자막을
표기하며 끝을 맺는다.
경복궁의 곳곳이 담긴 다양한 영상 화면 및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이미지와 잔잔한 배경 음악 위로 남성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차분히 전해지는
친절한 해설이 조화를 이루는 <경복궁>은, 완성 후에는 4개 국어로 된
외국어 판이 제작됨으로써 해외 홍보용이라는 당초의 취지를 충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바탕에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되어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1995년 8월 15일 중앙청, 즉 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대한
철거가 결정됨으로써 크게 부각된 정부의 경복궁 복원 사업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이 작품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과 ‘한국 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기획·제작된 <서울 관광 안내>
(1994) 및 <관광한국>(1996) 등 여타 작품들의 경우처럼, 개방화의 조류 속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관광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한 1990년대 당시의
정책적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쓰레기 종량제 그 후… (1995)
문화영화 <쓰레기 종량제 그 후…>는 “’95년 1월 1일 시작된 쓰레기 종량제의 정착과정과 성과 및 자원 재활용을 통한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홍보”한다는 목적 하에 국립영상제작소 영상2과에서 국내 홍보용으로
기획되었다. 사용 필름은 35mm 컬러였고, 제작 기간은 1995년 2월부터 4월까지 약 2개월간이었으며, 연출은 박종철이, 촬영은
이상호가, 해설은 이명희가 담당하였다. 당초 제명은 ‘다시쓰는
자원’이었으나, 영화 제작이 마무리 단계에 있던 1995년 4월에 변경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작품 완성 이후에는 전국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 35mm 필름 164벌을 복사 수량으로 마련해 둔 데다가, 9벌의
VHS와 별도로 케이블TV에 방영하기 위한 텔레시네(Tele-cine) 작업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영화제작지시서」 상에 러닝 타임은 10분으로, 수록 내용은 “o prologue o 쓰레기 매립지의 가득한 쓰레기들 o 종량제 실천 및 수범사례
o 자원 재활용 o 애니메이션 – 1인당 쓰레기량등 o 간편해진
쓰레기 수거 o epilogue”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완성본은 시간 면에서는 5분 50여초로 단축되었음에도, 보다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관련 현안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갖도록 유도한다.
지구본 속 한국 지도 안에 가득 찬 쓰레기 사진이 한 가정의 분리 수거 장면 및 꽃밭 그림 이미지로 바뀐 뒤 그 위로 제목이 붙는다. 이어, 한
아파트촌의 전경이 비추어지고 한 가정에 모여 쓰레기 분리를 행하는 이곳
주부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쓰레기 문제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시작으로,
화면에서와 같은 주부들의 노력으로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순조롭게 정착되고 있음이 전해진다. 뒤이어 한 주부가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고, 그 음성이 자연스레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역할을 하면서 서울 상계동의 한 아파트에서의 쓰레기 분리 사례가 화면에
채워진다. 이렇게 1분여가 지나면, 이후 1분 20여초 동안 지역 주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일본 및 생활 속에서 자발적으로 분리 수거를 실천
중인 독일의 사례와, 쓰레기 매립지 화면 위에 애니메이션 효과로 자막이
등장하며 유럽, 일본, 한국의 ‘1인당 1일 쓰레기 배출량’ 비교 수치가 차례로 제시된다. 화면은 다시 서울 주택가와 아파트촌에서의 쓰레기
재활용 모습 및 애니메이션 글씨 효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약 1분간
쓰레기 배출 방법에 관한 기본 정보가 제공된다. 그리고 이후 1분 40여초 동안 재활용 쓰레기가 어떠한 공정을 거쳐 유용한 재료로 재탄생하는지가
종이, 유리, 음식물 찌꺼기 등의 순으로 재생 산업의 차원에서
소개된다. 그리고 나머지 약 1분간은 종량제 실시 후 ‘쓰레기 감량 및 경제적 효과’와 그 필요성이, 사람들의 분리 수거 모습, 애니메이션
자막, 숲 속의 풍경의 화면을 배경으로 하여 강조된다.
이처럼 <쓰레기 종량제 그 후…>는 199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쓰레기 종량제’의 성공적 정착의 사례와 그 사회적, 경제적 효과, 그리고
지속적 유지의 필요성 등을, 다양하고 체계적인 화면 구성과 명확하고
논리적인 해설 전개를 통해 효율적으로 알린다. 1990년대에도 국립영화제작소나 국립영상제작소에서는 <맑은 물 맑은 공기>(1990),
<아껴쓰는 전기>(1992), <선진 질서의 현장>(1993) <0.5초의 방심>(1995), <경주는 프로 운전은 초보>
(1996), <여름 이야기>(1997) 등 생활 속 실천 사안을 다룬 문화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졌는데, <쓰레기 종량제 그 후…>의
경우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따른 생활의 변화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지닌다고
할 만하다.3) 다만, 화면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 그
중에서도 주부들로 설정되어 있는 바, 이를 통해 현재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1990년대 당시의 성역할에 대한 일반화된 통념이 엿보이기도 한다.
다시 뛰자! 코리아! (1997)
이 작품은 국립영상제작소에서 국내 홍보용으로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협조요청서」 등 관련 문서 상에는 영화의 제명이 ‘다시뛰자 KOREA’로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제작 목적이 “우리경제가 위기에 처한 원인을
진단하고, 위기극복을 위해서 정부, 기업, 국민모두가 고통을 분단(‘분담’의 오기로 보임-인용자)하고 이 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해야 함을
홍보”한다는 데 두어졌고, 형식적인 면에서는 ‘세미다큐멘터리’ 구성 방식을
취하면서 단편적 서사를 지닌 극적 연출을 가미한다는 특징을 띠기도 하였다. 감독은 강명준이, 촬영은 윤주환과 이상호가, 각본은 김지영과 상인숙이
담당하였다. 촬영에는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으며, 당초 9분으로
기획되었던 것과 비슷한 9분 40여초 분량으로 완성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 작품의 제작 기간이 계획 상 1997년 12월 6일부터 16일까지였고 실제로도 12월 17일까지 하루 정도 연장되었을 만큼
매우 짧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동년 11월 발생한 ‘IMF 사태’
직후 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들의 협조를 구하려는 차원에서 ‘문화영화’로서 이 작품이 시급히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는
<다시 뛰자! 코리아!>라는 영화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 보이는데,
결국 이 작품은 1997년 12월 18일부터 1998년 1월 24일까지 전국 극장에서 1, 2순위 동시 상영을 통해 관객에게 제공되었으며
계획 단계에서 K-TV 방영을 예정하고 있기도 하였다. 35mm 필름
복사 수량에 있어서도, 계획 당시에는 전국 극장에서의 상영을 위한 157벌 정도였으나 제작 완료 후 306벌로 크게 늘었다. 그만큼 이
작품의 메시지가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작완료보고」 공문 상의 수록 내용은 “기업체 면접을 앞둔 극중의 이유복과 자금난을 겪고 있는 아버지와 이유복을 통해 IMF자금지원을 받아야
하는 최근의 심각한 경제위기의 원인진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
경제추제(‘경제주체’의 오기로 보임-인용자)들의 노력 등을 나레이션과 세미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러 가지 산업 현장의 사진 이미지 위로 ‘다시 뛰자!’와 ‘코리아!’라는 자막이 띄워지고 힘차고 경쾌한 음악이 깔리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이어,
자연스레 배경음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바뀌면서 장면 역시 전환된다.
화면에는 한 카페가 등장하고, 이후 나이트클럽과 포장마차, 대기업의 면접 시험장, 은행, 승용차 안, 거리의 벤치, 합격자 발표 장소, 공원
등의 순서로 공간적 배경이 변화한다. 그러면서, 20대 청년 유복(이상인
분)이 ‘IMF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망각하고 이전의 생활 습관을 버리지도, 별다른 문제 의식을 느끼지도 못하다가 아버지(최낙천 분) 회사의
자금난과 자신의 대기업 면접 시험 탈락을 경험한 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서사적 흐름이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향락 풍조에 젖어
있었음을 지적하며 IMF 시대에 걸맞은 올바른 생활 습관을 강조한다.
그리고 국민의 합리적 소비와 더불어 정부의 긴축 재정, 기업의 생산성 향상의 필요성도 역설한다.
영화의 주인공 ‘유복’은, 이름처럼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성장해 왔으며 대기업 두 곳에서 1차 시험에 합격해 놓은 청년이다. 그러나 IMF 사태로
인해 그동안 물질적 기반을 제공해 준 아버지 회사의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자신마저 면접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차를 팔아 아버지에게 금전적 지원을
하는 한편 아버지와 함께 힘과 용기를 내어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이와 같은 유복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IMF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바람직한 삶의 변화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유흥에 빠져 있는
유복의 모습이 담긴 ‘나이트클럽’ 신(scene)과 자금 사정이 크게
나빠져 궁지에 몰리게 된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된 ‘은행’ 신 다음에 여러 자료 화면들과 남성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적 영상을
삽입함으로써, IMF 사태의 발생 원인과 현실적 여파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근검절약 실천하여 우리경제 살립시다.”라는 구호 풍의 문장을 제시하며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립영화제작소 혹은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들어진 문화영화 가운데는 절약 및 저축 생활을 권하거나 독려하는 작품들이 일정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건국 이후 최대의 경제적 위기’로 일컬어지는 IMF 사태를
통과하며 보다 더 당대의 현실을 제시하고 국민의 참여를 호소하는 방식의 <다시 뛰자! 코리아!>와 같은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아울러 그 경향이
(1998), <위기를 기회로>(1998) 등을 통해 1998년으로도
이어지는데, 이를 통해 1990년대 말 당시의 경제적 상황과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문화 영화 48년 (1998)
<문화 영화 48년>은 “1950년도부터 문화영화를 제작 전국극장을 통해 48년동안 상영되어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며 사랑을 받아온
문화영화가 금년 6월 30일부로 종영됨에 따른 추억의 영화를 제작 홍보”하려는
목적 하에 국립영상제작소에서 국내 홍보용으로 기획된 문화영화이다. 연출은 김상연이, 촬영은 장달용이 맡았다. 관련 문서에 따르면, 촬영을
위해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고 제작 기간은 1998년 5월
20일부터 1주일간이었으며 보급 대상은 ‘전국 극장’ 및 ‘K-TV 방송’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계획대로 35mm 필름 321벌이
복사되었다. 그런데 전국 극장에서 1, 2순위 동시 상영이 이루어진
기간이 1998년 6월 14일부터 30일까지였던 바,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작품 자체가 극장에서 의무적으로 상영된 마지막
문화영화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계획 단계에서의 러닝 타임은 8분 정도였으나, 완성본은 10분 30여초로 그 시간이 늘었다. 「영화제작협조요청서」 상의 수록 내용은 “타이틀,
초기영화, 노천홍보영화, 이동영사, 명동시공관뉴스영화 상영, 역사의
기록, 세계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총51편의 문화영화가 작품상 수상작 등”이었다.
내용 상 이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단순하게 짜여 있다. 해방에서 “최첨단 대규모 멀티 영화 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립영상제작소와 그 전신인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문화영화 제작을 통해 영상 매체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음을 1958년 시공관에서의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무료 상영이 실시된 사례를 통해 주지시킨 뒤, 이들 기관에서 만들어진 문화영화의 전반적인
작품 경향에 대해 각 시기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을 예로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구성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연대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시대별 키워드가 제시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영역에서 한국이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였고 또한 그것이 당대의 문화영화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다양한 자료 화면과 뉴스영화 톤의 내레이션 해설을 통해 설명한다.
즉, 1940년대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록한, 1950년대의 경우 한국전쟁, 전후 경제 상황 및 대중 예술과 문화적 행사 등을 담은
문화영화가 만들어졌음을 밝힌다. 1960년대에 관해서는 4.19혁명,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한, 사회 재건 및 국토 건설, 산업적 발전, 일상의 변화, 베트남 파병, 1.21 사태 발발과 향토 예비군 창설,
고속도로 건설 등을, 1970년대에 대해서는 새마을운동, 원양 어업과 중동
건설, 100억 달러 수출 달성,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유행, 지하철 개통, 저축·절약·이웃돕기·산아제한 등 사회 캠페인의 확산, 국토 개발 및
방위 등을, 1980년대의 경우 광주민주화운동, 환경 보존 운동,
이산가족 상봉, 서울올림픽 개최 등을 둘러싼 여러 문화영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1990년대를 대상으로 하면서는 이전 시기를 보다
광범위하게 포괄하며 설명의 범주를 넓힌다. 가령, 서울올림픽 개최(1988)와
바르셀로나올림픽 참가(1992)를 자연스레 연결하고, 남북한 UN 동시 가입(1991)에 관한 내용과 함께 이전까지의 남북 교류 상황을
제시하며, 대전 엑스포(1993)와 광주 비엔날레(1993) 개최를 동시에
다루는 등의 식이다.
이어 국립영상제작소 체제 하에서 교통 문화 및 공공 질서 정착을 기하거나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거나 외환 위기 극복을 추구하거나 전통 문화의
중요성을 알린 작품들이 제작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그동안
국립영화제작소, 국립영상제작소에서 2700여 편의 문화영화가 제작되어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가 수상하였다는 사실과, 이렇게 48년 동안 만들어진
문화영화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영상 실록’으로 철저히 관리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그러면서, “매달 한 편씩 극장에서 소개해 오던 문화영화가 이번 6월 30일로 막을 내린다“는 감사의 멘트와 더불어, 앞으로도
“국립영상제작소는 국민과 정부를 이어 주는 케이블 TV 채널 14 K –
TV와 함께 수준 높은 문화 영화와 국가 영상 기록을 계속 해나가 겠습니다.”라는 문장과 국립영상제작소의 주소와 전화 및 팩스 번호를 자막에
띄우면서 막을 내린다.
이와 같이, <문화 영화 48년>은 국립영화제작소와 국립영상제작소의 제작 활동에 대한 기나긴 역사적 발자취를 자기 반영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것은 다시 한국 문화영화의
과거를 더듬어 보는 데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인 자료 중에 하나가 되어 있다.
1) 관련 문서를 보건대 이 작품은 35mm 2벌과 VTR 6벌이 복사되었던 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극장에서의 의무상영 대상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 1990년에는, 1988년에 개최된 제24회 서울 하계 올림픽 관련 기록이 담긴 <세계는 서울로>가 약 65분 분량으로 완성되어
선보여지기도 하였다.
3) 1990년대에 기획·제작된 이러한 종류의 문화영화로는, 1993년 8월 12일 시행된 ‘금융실명제’를 배경으로 저축 생활을
권장하는 <밝은 내일>(1994) 등을 꼽을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앞서 만들어진
이 작품을 보건대, 시간적으로나 내용 구성적인 측면에서 <쓰레기 종량제 그 후…>와의 유사성이 발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