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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특징

  • 시대별특징
  • 1960년대

1960년대 문화영화는 1950년대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스튜디오와 후반 작업 시설 등 기반시설이 완비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신진 인력들이 배치되면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생산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설치였다.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에 따라 정부의 영화제작이 일원화되고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이 시기의 문화영화는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문화영화 동시상영제도를 통해 촉발되었던 문화영화 진흥과 민간 문화영화사 육성에 관한 논의는 1960년대 내내 지속되면서 「문화영화 교환협정」, 상설 문화영화관 마련, 우수문화영화 보상정책, 문화영화제작가협회 창립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되거나 또 다른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는 정책적으로 문화영화를 지원하면서 민간 문화영화사들이 본격적으로 문화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이는 1970년대 민간 문화영화 전성기의 발판이 되었다.

1960년대 문화영화 성장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추동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부의 공보 정책을 들 수 있다. 1961년 8월에 발표한 「공보 목표, 정책, 지침 및 공보 활동의 방침과 구체적 방안」에서 이러한 방향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데, “혁명과업 완성에 전 국민의 자율적이며 적극적인 참가를 도모하여 공보 매개체인 신문 잡지를 비롯한 모든 간행물, 방송, 연극, 영화, 사진, 시가, 음악, 미술, 조각, 연설, 포스타, 삐라 등”을 통하여 “국민과 정부와의 접촉 기회를 최대한도로 확대시켜 상호이해를 촉진”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군사정부가 5.16 직후인 6월 22일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을 통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영화를 선점하고자 했던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박정희 정권 하에서 ‘공보 영화’는 정책적으로 장려되고 관리되었다.

둘째, 한국영화의 해외 시장 개척이라는 명제가 놓여 있었다. 당시 수출중심의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정부, 아시아영화제 및 합작영화 제작 등을 통해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 시장의 개척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영화 산업계, 한국영화의 세계성과 보편성에 대한 평론가들의 오래된 집착 등 여러 갈래의 욕망이 한 데 모여, 해외 진출을 위한 문화영화의 지속적 생산과 질적 제고를 주문했다. 민간 문화영화사들의 육성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여러 정책들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전반적으로 문화영화계가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시기의 국립영화제작소 및 민간 문화영화사 제작의 문화영화들은 해외로 진출했다. 따라서, 1960년대의 문화영화들은 국가와 시장의 여러 겹의 요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의 형식과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다.

문화영화 관련 정책과 제도의 변화

문화영화 의무상영제

문화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영화사에서 문화영화 의무 상영을 가장 먼저 강제했던 것은 1942년 「조선영화령」의 개정안에서였다. 이 개정안에는 영화상영 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의 상영을 의무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다시 문화영화 의무 상영 조치가 등장한 것은 1959년 1월이었다. 이 시기 신문들에서는 외국영화 상영 시 단편 문화영화 1편과 뉴스영화 상영을, 국산영화 상영 시 뉴스영화를 동시상영하는 시책 1)을 소개하고 있다. 1960년 3·15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이러한 시책을 통하여 공보실 영화제작소의 영화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62년 「영화법」이 신설되면서, 문화영화 의무 상영은 법제화되다. 1963년 「영화법」 1차 개정에서는 문화영화에 더하여 뉴스영화까지 의무 상영하는 것으로 규정이 변화했다가 1995년 제정 「영화진흥법」에서 다시 문화영화만을 의무 상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이는 1998년까지 유지되었다.

“문화영화 동시상영이란 눈 가리고 아웅 식이다. 제대로 된 영화가 상영되는 일은 거의 없다. 상영시간이 되도록 짧고 값싼 필름을 형식상 비추는 정도.. 광고 필름을 피로할 정도로 돌려댈망정... ” (「육성 외면... 문화영화/ 상영조차 힘든 실정/ 애써 한두 편 만들면 제작비 못 빼 도산/ 극영화보다 적극적인 뒷받침을」, 『경향신문』 1966. 6. 14. 5면)

「영화법」에 따라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 의무 상영제는, 민간 문화영화사가 전무하다시피 했고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의 리버티프로덕션과 국립영화제작소에서만 1년에 20~30편의 문화영화가 제작되던 당시 현실에 비추어볼 때, 다소 무리한 규정이었다. 문화영화 공급의 절대 부족과 정부 PR영화라는 비난, 극장의 편법을 극복하고 이 법이 정착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규정으로 인해 민간 문화영화사가 급증하게 되고, 제작비 현실화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한문화영화진흥위원회, 문화영화제작가협회가 생겨나는 등 문화영화를 둘러싼 제도와 환경 개선 논의들이 1960년대 내내 지속될 수 있었다.

우수문화영화 보상정책 및 각종 진흥책

문화영화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 문제는 「영화법」이 등장하고 난 뒤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문화영화 의무 상영제로 인해, 수요는 폭발했지만 공급은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존의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가 “관보취”라거나 “정부PR영화”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교육적 내용 혹은 예술적 취향과 교양을 함유하는 양질의 문화영화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은 박상호 감독의 〈비무장지대〉(1965)였다. 박상호 감독은 〈비무장지대〉가 국내 영화제들을 석권하고 제13회 아세아영화제에서 비극(非劇)영화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 공보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청원서에서 문화영화 육성을 위해 극영화와 똑같은 조건으로 외화수입 쿼터를 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외화수입 쿼터는 정부 차원에서 배정하는 것이었는데, 외화 수입을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하여 몇 가지 기준을 만족시키는 “우수영화”에 대해 일종의 보상으로서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우수 국산영화나 국산영화 수출, 해외영화제 출품 등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수입권을 주는 제도는 이미 1958년 문교부 고시로 시행되었는데, 1960년대에도 같은 방침에 따라 외화수입 쿼터를 정부에서 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무장지대〉 논란을 계기로, 1966년 12월에 공포된 「영화법 시행령」 제11조에서는 극영화에 한정되었던 우수영화보상정책이 문화영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 규정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1968년 공보부의 문화시책이었는데, 이는 연 4회 분기별로 우수영화 선정을 실시하여, 우수 단편 문화영화 3편을 제작한 제작자에게 외국 문화영화 한 편의 수입권을, 우수 장편 문화영화에는 외국 극영화 수입권을 준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69년 문화공보부가 발표한 문화영화진흥책은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문화영화 제작 지원 확대와 문화영화신용조합 창설을 제시했다. 문화영화 제작지원 확대는 외국 문화영화 수입쿼터 및 극영화쿼터 각 5편을 문화영화 제작자에게 주는 것으로, 이를 위한 구체적 기준으로는 시리즈물, 중편 문화영화에 대해서도 외국 극영화 수입쿼터를 제공하자는 것과 문화영화의 해외TV 상영에 대한 보상제도를 신설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우수 문화영화의 제작비를 대여해주는 등 제작을 적극 지원하는 문화영화신용조합의 창설이 주장되었는데, 문화영화신용조합은 거의 즉시 설립되어 당해 연도부터 제작비 지원을 시작하였다. 문화영화신용조합의 활동은 1970년 영화진흥조합의 창립으로 이어져, 우수 극영화와 문화영화에 대한 제작 지원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1969년 문화공보부에서 주관했던 ‘비흥행영화콘테스트’와 ‘8mm 영화촬영콘테스트’이다. 우수 민간 문화영화를 발굴하고 제작의욕을 높이기 위해 시행되어, 선정작들을 문공부에서 복사하여 보급하는 이 작은 영화제들은 “누구나의 영화” 운동으로, “등록제작업자가 아닌 국영기업체나 기타 단체, 개인이 제작한 영화를 권장하고 시상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표명”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영일, 「“누구나의 영화”운동/비흥행작품 콘테스트를 보고/ 허술하나 설득력 풍겨/ 계몽적 주제 높이 평가/ 소재 비슷, 해설 과잉」, 『서울신문』 1969. 7. 29. 5면)

문화영화의 제작비와 제작기간

나는 간첩이였다 제작관련, 1962,
공보부, BA0791792(5-1)

문화영화의 검열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바가 많지 않다. 1966년 2차 개정 「영화법」 에서 처음으로 ‘검열’이라는 단어를 명시하고 있는데, 문화영화, 뉴스영화, 텔레비전 영화, 광고영화 및 영화의 예고편의 검열에 있어서는 법 제13조의 규정에 의한 검열 기준에 의하는 외에 동법 시행령 제24조 제5항의 규정에 의한 18세 미만자의 영화 관람의 허용에 대한 심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2차 개정 「영화법」 이후, 극영화 검열을 둘러싼 논란이 심각해지고 연일 이에 대한 논쟁이 신문잡지를 장식했지만, 문화영화의 검열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 신문 기사 및 남아 있는 관련 서류들을 통해 당시 문화영화 검열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967년 2월 21일 『신아일보』에 실린 기사(「문화영화 오늘과 내일/ 어려운 민간에의 기대, 국립영화서 겨우 명맥/ 질적 저하, 악순환만/ 기껏 극영화의 꼬리표 구실, 해외수출 등 육성책 아쉬워」)에서 민간문화영화 제작비 부족의 타개책으로 광고 수입을 활성화하자고 주장하면서, 현재는 문화영화에 광고가 양성적으로 드러날 경우 영화 검열에서 상영불가 선고를 받는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1967년 8월 일본 문화영화 25편의 검열 신청 기사와 1969년〈혹성탈출〉, 〈천사의 시>, 〈구라파의 밤〉 등의 외국의 장편 극영화를 문화영화로 속여 검열을 받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의 기사 등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사들은 국내 민간제작 문화영화와 외국 문화영화의 경우, 장단편을 막론하고 검열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민간문화영화사가 제작한 단편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은영필름이 제작했던 〈월남의 맹호들〉(1968)의 검열서류에는 “특정상사 또는 특정인의 선전이 아니되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제한 및 시정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민간문화영화사는 아니지만, 국군영화제작소가 제작했던 뉴스영화〈월남전선〉에 대한 검열 기록 역시 일부 남아 있다.〈월남전선〉 제30호(1968)의 검열 서류에는 “국군이 베트콩 시체를 끌어내는 장면”을 삭제하라는 검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민간문화영화사의 단편문화영화 뿐 아니라, 국가기관인 국군영화제작소의 영화들에 대한 검열 역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검열의 주체인 공보부가 직접 제작한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은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문화영화 제작 관련 서류를 통해 파악해볼 수 있다. 이 시기 일반적인 극영화의 경우, 먼저 제작신고서와 함께 사전 검열, 즉 대본 심사를 위한 시나리오가 제출된다. 여기에서 1차 검열이 이루어지고, 이후 영화 제작이 완료된 뒤 필름으로 실사 검열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검열의 내용과 결과가 서류에 남게 되며 때로 시나리오에 직접 표기된 검열 대본이 자료로 남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의 제작 서류에서는 이렇게 진행된 검열의 내용과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나리오가 첨부되어 있는 경우, 빨간 펜 등으로 수정 지시를 한 내용들은 살펴볼 수 있으나 간단한 단어의 수정이나 생략뿐이며, 이는 일반적인 검열의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감수, 제작회의, 찬동서 등의 형식으로 영화의 내용이나 대본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이 요구되고, 이것이 실제 영화에 반영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나는 간첩이었다〉(1961)는 영화제작 후 녹음 대본을 내무부, 국방부, 중앙정보부, 아세아반공연맹 등에 보내어 ‘찬동서’에 서명을 받았다. 그 후, 각 기관에서 온 내용들을 담은 ‘장면수정안’이 첨부되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검열 조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반공계몽영화 새야새야 제작관련, 1965,공보부, BA0791857(10-1)

    반공계몽영화 새야새야 제작관련, 1965,
    공보부, BA0791857(10-1)

또한, 반공문화영화〈새야새야〉(1965)의 경우에도 중앙정보부의 감수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자료들로 미루어,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은 일반 극영화나 민간 문화영화가 거쳤던 프로세스에 따라 명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반공’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경우 2차 「영화법」 개정 이전에도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에서 사전 검토하는, 일종의 검열 작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영화 교환협정과 해외 문화영화의 상영

1960년대 이전 시기부터 다양한 국가들의 장・단편 문화영화가 수입되어 상영되어 왔지만, 1960년대에는 국립영화제작소가 주체가 되어 「문화영화 교환협정」을 맺었고, 또 해외 문화영화를 수입하여 내레이션 등을 고쳐 재편집한 뒤 국립영화제작소의 이름으로 배포하기도 했다.

먼저, 국립영화제작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던 캐나다의 국립영화제작소를 일종의 롤 모델로 삼아, 최봉암, 김인태 감독 등을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으로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에서 연수받도록 했고2), 1962년에는 「문화영화 교환협정」에 따라 〈의자공과 소년〉, 〈협동조합〉 두 편을 들여와 한국어 더빙 작업을 한 뒤 배포, 상영하였다. 한국의 문화영화도 이 협정에 따라 캐나다에 소개되었는데,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촬영상을 탄 국립영화제작소의〈새로운 고향〉이 캐나다의 7백 여 개의 필름도서관으로 보내지고 660조의 이동영사반에 의해 5,600개의 장소에서 상영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문화영화 해외로/카나다와 교환협정」, 『동아일보』 1963. 2. 11.)

한편, 라디오프리베를린 Sender Freies Berlin(SFB: Radio Free Berlin)의 TV다큐멘터리 〈Backed Wire Frontier〉도 〈철조망〉이라는 제명으로 번역되어, 1962년에 국립영화제작소의 재편집과 더빙을 거쳐 제작 되었다.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국립영화제작소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6월 22일 법률 제632호로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이전 시기의 기관은 1948년 공보처직제에 의해 설치된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로, 1956년 공보실 소속 선전국 영화과, 1960년 7월 국무원사무처 공보국 영화과로 변경되면서 국가생산 영화제작을 주도해왔다. 1949년 공보처 영화과 산하에 설치된 ‘사단법인 대한영화사’는 국립영화제작소가 설치될 때까지, 영화과에서 기획한 문화영화 및 뉴스영화의 제작을 일정부분 담당했다. 또한, 당시 한국영화계의 열악한 물적 토대를 보충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 민간 영화사들의 제작을 지원하는 일종의 영리사업체로 운영되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무성 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의 원조 및 대충자금의 투입으로 스튜디오를 완공하였다. 이로써 영화과는 영화제작소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기술보도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시라큐스 대학의 기술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인력들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적, 인적 토대 하에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에 따라 “정부 각 기관에 분산되어 있는 영화제작업무의 일원화”를 기하여 “예산의 절약과 급속한 영화제작기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공보부장관 소속”으로 설치되었고, 기존 영화과의 장비와 역할, 인력을 이관 받았다. 이 법은 국립영화제작소가 “공공기관의 영화제작사업 또는 민간영화제작을 조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을 국립영화제작소의 부대사업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립영화제작소의 업무 범위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 역시 국가생산 영화제작뿐 아니라 민간영화제작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62년 9월 공포된 각령 제967호 「국립영화제작소 부대사업에 관한 건」은 국립영화제작소가 할 수 있는 부대사업의 내용을 더 명확하게 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공공기관이나 민간영화제작업자”는 영화필름현상, 영화녹음 및 음복제(더빙), 영화필름의 축소, 확대 및 복사, 영화촬영, 기타 영화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사항 등 다섯 가지에 한하여 국립영화제작소에 의뢰할 수 있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부대사업에 관한 건(각령 제967호), 1962,
총무처, BA0189003(2-7)

즉, 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영화제작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을 뿐 아니라, 민간영화제작을 위하여 특히 후반작업을 비롯한 기술적 지원 등을 공식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1950년대 대한영화사가 담당했던 역할이 공식적으로 국립영화제작소의 역할로 이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립영화제작소 부대사업에 관한 규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기존 문화영화제작의 주된 발주자였던 중앙정부의 각 부처들 이외에도 지방 행정부, 민간 기업과 조직에 이르는 다양한 단체들이 이러한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문화영화 제작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서울시, 부산시, 경상남도와 같은 지방 행정단체, 대한나협회(대한나예방협회), 세기상사와 같은 민간단체의 요청에 의하여 문화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뉴델리 총영사관, 이탈리아TV 방송국, 월남전 참전 부대 요청에 의하여 문화영화 필름이 복사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는 국립영화제작소 영화 제작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10년간(1960~1969) 문화영화 총 466편의 제작을 비롯하여 매년 52편씩 주간뉴스로 제작되었던 〈대한뉴스〉를 제작하였고, 〈한국뉴우스〉(이후 〈고국소식〉으로 개제, 1962년부터 일어판), 시군 홍보용 영화 〈새소식〉과 〈농촌뉴우스〉(월 1회, 1966~1973) 등을 제작3)하는 등 국립영화제작소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제작활동을 지속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는 1968년 문화공보부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민간문화영화사

1962년 「영화법」에 문화영화 의무 상영이 명시되면서, 민간 문화영화사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영화법」과 함께 문화기록영화 제작을 내세우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동양문화영화촬영소’였으며, “민간업자가 만든 최초의 문화영화”로 기록된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 제작한 〈아세아의 별〉(1962)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신필름’의 PR을 위주로 한 것으로 비판 받았으나, 이후로도 ‘신필름’은 문화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차 개정 「영화법」 이후 문화영화제작업자로 등록한 제작사는 1963년 9월 신필름 등 6개사였고, 1964년 7월에는 25개사까지 늘어났다. 1963년 초까지는 의무 상영 편수를 채울 수 없을 정도로 문화영화의 공급이 부족했으나, 1964년이 되면 수요에 비해 많은 공급량이 유지되는 형편으로 태세가 전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극장이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므로, 민간 문화영화 배급의 문제가 상당히 열악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아일보』 1964.7.16.) 제작비 환수가 불가능하므로, 영화사들이 영화를 배급하지 않고 보유하고만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 1966년 6월 시점에는 10개의 제작사만 남아 있었고, 이 해 대종상 시상식에 민간 제작의 문화영화가 단 한 편도 출품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던 〈비무장지대〉 사건 이후, 민간문화영화 제작 활성화의 방안이 다각도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부의 문화영화나 PR영화도 민간업자에게 제작시키고 일체 손을 떼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수지는 안 맞아도 서로 만들겠다는 문화영화의 활로/ 정부와 경쟁 안돼」, 『경향신문』 1967.7.22.)

우수문화영화 보상정책을 통한 정부의 민간 문화영화 제작 장려뿐 아니라, 장편 문화영화의 흥행 가능성 또한 민간 문화영화 활성화에 기여했다. 1965년 일본에서 “레슬링 다큐멘터리” 〈역도산〉이 수입되어 크게 히트했는데, 이에 고무되어 신영문화영화사에서 제작한〈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또한 극장 개봉을 통해 수많은 관객을 모았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장편문화영화도 이런 흐름을 이어갔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첫 번째 장편문화영화 〈월남전선〉(1966)이 시의성으로 화제를 모았다면, <팔도강산>(1967)의 대대적인 성공은 장편문화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확실히 입증하는 것이었음은 물론, 문화영화에 스타 영화배우들을 기용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정착시키기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1967년에는 장편 애니메이션이 문화영화로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모았던 것 역시 고무적인 일이었다.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세기상사, 신동헌)부터 인형 애니메이션〈흥부와 놀부〉(주식회사 은영필름, 강태웅, 1967), 〈손오공〉(세기상사, 박영일, 1969) 등이 제작되어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성공을 동시에 거뒀다. 〈흥부와 놀부〉, 〈손오공〉은 문공부의 우수문화영화에도 선정되었으며,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등을 비롯한 각종 국내영화제의 문화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러한 장편 문화영화들의 성공은 이후 민간문화영화사의 제작 활성화를 이끄는 촉매제로 기능했다.)

마지막으로, 1968년 이후 TV를 통한 문화영화 배급이 확대되면서 민간문화영화사의 확실한 배급통로가 확보된 것도 1960년대 후반 민간문화영화 제작 활황에 크게 기여했다.

미공보원(USIS)의 리버티프로덕션

  • 리버티 뉴스 종료(대한뉴스 제626호), 1967 공보부, CEN0000543(4-1)

    리버티 뉴스 종료(대한뉴스 제626호), 1967
    공보부, CEN0000543(4-1)

리버티프로덕션 역시 1960년대의 주요 문화영화 생산자였다. 대부분 한국영화인들이 실제 제작을 맡았던 리버티프로덕션은 〈리버티뉴스〉와 함께 다수의 문화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리버티프로덕션은 후반으로 갈수록 이전과 같은 절대 우위의 뉴스, 문화영화의 생산자로 기능하지는 못했다. 특히 1963년을 기점으로 〈대한뉴스〉를 비롯한 국립영화제작소 영화들의 질적 향상과 함께 이 영화들에 대한 이동영사 지원이 한층 강화되면서, 리버티프로덕션 영화의 영향력은 이전처럼 절대적일 수 없었다. 이에 더하여 〈리버티뉴스〉를 지원하던 미 해외공보처(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USIA)의 대내외적 상황 변화로 인해 1967년 뉴스영화 제작지원 프로젝트(Kingfish Project)가 중단되면서, 미공보원의 영화제작은 더욱 위축되었다.)

196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주체적 특징

정권 홍보 영상 및 정치적 주제의 증가

5.16 군사정변 직후 국립영화제작소를 설립했던 군사정권의 목표는 명확했다. 가장 먼저,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최대한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기 내내 각종 중대한 국내외의 정치, 경제, 외교 이슈들은 무엇보다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통하여 홍보되고 설득되었다. 한일협정, 월남전 파병과 같이 국민들의 반대에 직면했던 사안들도 중요했지만, 가장 빈번하게 다뤄진 주제는 ‘반공’이었다. 노골적인 반공영화 외에도 문화를 다룬 영화나 오락영화 혹은 여타 주제를 다룬 영화에서도 반공과 관련된 언급이 삽입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공의 주제가 전파되었다. 또한, 국책 홍보와 정권 및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제작된 ‘선전용’ 문화영화도 상당수 제작되었다.

경제적 발전을 과시하기 위한 영화 제작

1960년대 초, 군사정부는 아시아영화제, 아세아반공대회, 국제음악제, 동방민속예술제전, 아시아작가대회 등의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했다. 이 행사들은 ‘혁명’ 이후 안정, 발전된 한국사회를 대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자 군사정권의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행사들을 담고 있는 문화영화들은 대내외적으로 한국의 경제 발전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외국인 및 해외 체류 동포들에게 한국 방문을 홍보하고자 하는 목적도 포함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영상들이 급증하였다. 예컨대 <팔도강산>과 그 시리즈 영화들의 목적은 바로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근대화된 조국의 모습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 오락 문화영화의 제작 활성화

1960년대 한국영화계는 극영화보다 문화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수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1963년과 1964년에<열반>과 〈초혼〉이 아시아영화제 비극(非劇)영화부문 최우수상을 잇따라 수상한 뒤에는, 노골적으로 해외영화제 출품과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둔 영화들이 제작 붐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들은 국립영화제작소 소속 영화인들이 ‘작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했던 ‘순수문화영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제작된 영화들은 대부분 해외공관과 문화원 등에 비치되어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혁명과업’에 정진하는 국민들, 월남파병 군인들 등의 위안을 목적으로 제작된 오락영화들도 다수 있었다. 만담, 민요, 고전 무용과 옛 가요부터 최신 가요와 재즈, 모던 댄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쇼 무대의 구성이 문화영화로 제작되었다. 특히 5.16 군사정변 직후에 제작된 오락영화들은 코미디와 만담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정권홍보적인 주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된 쇼 오락영화들은 ‘팔도유람’을 모티프로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형식적 특징

‘세미다큐멘터리(semi-documentary)’ 형식의 유행

1960년대에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이라고 명시된 영화의 제작이 많았다. 주로 실화나 수기를 극화한 영화가 많았는데, 반공이나 가정 경제난의 극복과 같은 주제가 자주 다뤄졌다. 수기였던 <나는 간첩이었다>와 <인민재판> ,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새야 새야>를 비롯한 <실화극장> 시리즈가 반공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주부일기>, <어둠을 헤치고>, <가시밭을 헤치고> 등은 어려운 살림살이를 극복한 주부와 소년가장의 수기를 극화한 영화였다. <모정의 뱃길>처럼 장한어머니상 수상자의 실화를 극화한 경우도 있었다.

장편극영화 형식의 등장 및 영화배우들의 출연

월남전 파병군인들을 담은 <월남전선>이 장편으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개봉한 이래, <팔도강산>의 상업적 성공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장편문화영화 제작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어지는 <팔도강산> 시리즈 역시 장편극영화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팔도강산>의 대중적 인기에는 당대 유명 영화배우들의 대거 출연이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장편문화영화뿐 아니라 단편영화들에도 남정임, 윤정희, 오영일, 김진규, 신영균, 구봉서, 서영춘, 김희갑 등의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여 문화영화의 오락성을 높였다.

유명작가들의 참여

<열반>과 <석굴암>의 조지훈, <인민재판>의 팔봉 김기진, <모정의 뱃길>의 박경리와 이서구, <농토는 부른다>의 이호철 등 유명작가들이 문화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참여는 문화영화의 질을 향상시켰으며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담당했다.

애니메이션 형식의 적극적인 활용

  • 어둠이 지나면)

    어둠이 지나면

  • 가족계획

    가족계획

  • 공중도덕

    공중도덕

1959년 최초의 애니메이션 문화영화였던 <쥐를 잡자>가 제작된 이래, 1960년대는 문화영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물론, 일부를 애니메이션으로 삽입하는 경우는 언급하기 힘들만큼 많았다. 이 중 전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문화영화는 <나는 물이다>, <112>, <다시는 속지말자>, <어둠이 지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한국의 70년대>, <가족계획>, <공중도덕> 등이 있다.

1)「오락순화에 치중/ 영화상영허가 사무요강과 국산에 보상특혜요강 공고」, 『동아일보』 1959.1.14.석3면; 「영화배급회사 5계급으로 구분」, 『조선일보』 1959.1.14.석3면;
「추천제에서 할당제로/ 문교부, 신년도 영화수입허가시책 발표/ 배정량은 실적따라/ 38개사를 5급으로 구분」, 『한국일보』 1959. 1. 14. 4면.
2)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관계」, 『영상예술연구』25, 2014.
3) 문화공보부, 『문화공보30년』, 고려서적주식회사, 1979, 47쪽.
4)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문화영화의 안과 밖』, 현실문화연구, 2014; 이순진, 「국가에 의한 영화 제작의 역사와 국립영화제작소」, 같은 책
5) 1960년대 후반 미공보원의 영화제작 축소와 킹피쉬프로젝트에 대하여는 박선영, 「냉전시기 뉴스영화의 정체성과 실천의 문제-〈리버티뉴스〉의 역사와 외국 재현을 중심으로」, 『사림』65, 2018 참고.

한국교향환상곡 (1960, 김영권)

이 영상은 우리에게 애국가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안익태가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자신의 〈한국교향환상곡〉의 전 악장을 지휘, 연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1960년 3월 말에 기획된 이 영화는 4.19혁명 직전에 제작된 영화들 중 한 편이었다. 따라서 이 영상의 제작주체는 공보실이었다. 이승만의 85회 생일을 기념하는 연주회에서 지휘하기 위해 유럽에서 귀국했던 안익태는 3월 초 일본 관서 지방에서 공연을 마치고 3월 23일과 24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이후 이 문화영화에 출연했다.

이 문화영화와 관련된 서류를 통해 몇 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안익태와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창덕궁에서 연주를 하였으며 녹음을 위해 국립영화제작소(당시 공보실 소속의 영화제작소)의 B스튜디오에서 다시 한 번 연주 촬영을 했다는 점이다. 동시녹음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되지 못했던 시기에, 더 나은 영상의 소리와 화면을 위해 두 번에 걸쳐 실내, 실외 촬영을 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영화의 제작취지를 보면 “평화로운 금수강산의 탄생으로부터 왜놈의 압박 그리고 해방의 환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흐름을 묘사하고 있는 〈한국환상곡〉을 음악영화로 제작보급함으로써 국민문화의 향상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환상곡〉에 대한 해설은 제작관련 서류에 첨부되어 있는 연주회 안내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음악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바와 같이 〈한국환상곡〉은 〈만주환상곡(만주국 경축음악)〉과 유사한 주제 선율들을 활용하고 있으며, 〈만주환상곡〉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과 독일 등에서 연주되었고, 이 연주 영상들이 2006년 발굴, 공개되어 논란이 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관의 자료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안익태가 주고 받은 서신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음악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을 몇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이 곡을 이승만에게 헌정한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안익태의 오랜 소원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 바로 이 영화, 〈한국교향환상곡〉이다.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수지맞는 양계업 (1960, 임학송)

이 영화는 농림부 제공, 국립영화제작소 제작으로 제작되었으며, 주한미경제협조처(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USOM)의 지원에 따라 지역사회 기술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대표적인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영상의 맨 마지막에 웃는 소년의 얼굴 위로 한미협조 마크가 오버랩된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의 시라큐스 대학과 기술협정을 맺고, 이 계약에 따라 한국에 온 영화 기술 교육 인력은 국립영화제작소에 상주하면서 소속 한국영화인들과 함께 상세한 기획서, 가이드라인, 촬영 콘티 등을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화를 함께 만들고 감수했다. 이 영화들은 주로 농촌개량, 보건위생 등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교육영화들이었다. 〈부락은 밝아오다〉, 〈결핵을 이기는 길〉, 〈구강위생〉, 〈자동전화는 이렇게〉 등 1959년~1962년 사이에 제작된 다수의 영화들에는 ‘USOM교육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수지맞는 양계업〉은 농가부업으로 적당한 양계업에 대한 교육내용을 담고 있는데, 중학생인 주인공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동네의 ‘을순이 누나’에게 묻고 들은 뒤, 이를 실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4H 클럽이 자연스럽게 소개된다.7) 극화된 형식이지만 배우들의 대사는 직접 들리지 않으며, 성우의 목소리로 녹음된 내레이션이 삽입되어 있다. 또한, 실사와 도표, 간단한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제작되었다.

한편, 이 영화는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한 가운데서 기획, 제작되어 제작기간이 총 2년 넘게 소요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애초 이 영화의 기획은 1960년 4월 19일에 완료되었으나 4.19혁명의 발발로 조직이 개편되는 동안 제작이 유보된 뒤, 1961년 4월 재제작을 시작하여 촬영대본이 만들어졌다. 봄, 여름, 가을의 3계절이 배경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그해 5월에 시작된 촬영은 이듬해가 되어서야 끝났고 1962년 3월에 촬영이 완료되어 해설과 편집이 이루어졌다.

민요잔치 (1961, 임학송)

<민요잔치>는 “생활의 명랑화와 국가재건에 수고하는 농민들을 위안”한다는 목적 하에, 추수 이후 농민들의 오락을 위해 제작되었다. 1950년대 〈내 강산 좋을시고〉에 출연했던 장소팔과 고춘자가 이 영화에도 출연하며, 이들의 만담을 중심으로 사이사이에 민요, 고전무용, 농악 등을 배치하는 동일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1950년대 제작된 문화영화 중에는 <내 강산 좋을시고>가 거의 유일하게 ‘오락’을 위한 영화였는데, 1960년대 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대중문화를 영화로 끌어들였다. <흘러간 옛노래>(1960)는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기에 주로 유행했던 가요들과 가수들을 중심으로 꾸려졌으며, <민요잔치>는 민요를, <즐거운 쇼>(1962)와 <쇼는 즐거워>(1963)는 당대의 유행가, 재즈, 캉캉춤, 코미디와 만담을 비롯하여 다소 선정적인 쇼 무대의 춤까지 차용하여 구성되었다.

<민요잔치>는 여러 가지 점에서 <내 강산 좋을시고>와 비교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라디오 만담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전국적 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대화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가 30여 분 가량의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사회자로 기능하고 있는 점, 도입부의 인사 만담과 장소팔의 팔도유람 레퍼토리가 활용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이들의 만담 내용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내 강산 좋을시고>의 만담은 대체로 장소팔, 고춘자의 기존 레퍼토리들을 활용하였다. 그 어떤 교훈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언어유희와 재치를 이용한 말놀음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 <민요잔치>의 만담은 매우 건전하다. 예를 들면, “웃음은 우리들의 생활을 명랑케 하는 마음의 양식입니다.”, “우리 농군들이 거두어 쌓아 놓은 노적가리산”, “산더미 같은 노적가리, 보리타작하는 농군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요”, “금년에 대풍년 들었으니 우리 애쓰신 농민여러분께 잔치를 베풀어 드립시다.” 등 매우 긍정적인 언급과 함께 ‘농민 위안’이라는 목적을 거의 모든 대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이전과 같은 말놀음을 통한 가벼운 웃음의 유발은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이후 제작된 영화들, 특히 <쇼는 즐거워>는 훨씬 더 노골적인 내용의 만담을 포함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구봉서의 만담, 사회자 곽규석의 마지막 멘트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국가를 재건하고 제3공화국의 새살림을 마련하는 이 마당에 사소한 불만이나 불평 또는 좀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꾹 참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다 같이 노력해야겠습니다.” 등은 이후 1960-70년대 문화영화에서 오락과 코미디가 동원되는 방식의 전범을 보여준다.

새 날은 밝아오다 (1961, 양종해)

이 영화는 5.16 군사정변 직후 국립영화제작소가 세워진 뒤, 가장 먼저 기획된 영화 중 한편이다. “혁명을 찬양하고 새나라의 건설을 상징키 위한 영화이며 널리 일반에게 보급상영”하기 위해 “선전영화 〈혁명찬가〉”로 기획된 이 영화는 30분의 러닝타임 동안 ‘조국 재건’의 ‘힘찬 기운’과 ‘밝은 미래’를 충실히 그려낸다. 구성 전창근, 작사 양명문, 작곡 김동진, 안무 송범 등 각 분야에서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전창근은 1941년 〈복지만리〉의 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뒤, 해방 이후 첫 극영화였던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에 주인공인 강직한 독립운동가로 출연하면서 배우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삼일독립운동〉, 〈아아 백범 김구선생〉 등의 민족주의적 영화들을 연출했고, 직접 안중근, 김구 등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김동진은 〈가고파〉, 〈내 마음〉, 〈목련화〉, 〈봄이 오면〉 등의 가곡을 작곡한 유명 작곡가이자, 〈6.25의 노래〉 작곡가였다. 또, 양명문은 문학자이자 시인으로, 1960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의 부교수로 재직했다. 송범 역시 조선의 대표적인 무용가였던 조택원과 장추화의 제자로, 한국전쟁 이후 가장 주목받는 무용가 중 한 사람이었다. 1961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62년 국립무용단 창립 시 부단장을 맡았다. 영상의 연출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 감독이었던 양종해가 담당했다.

이들이 참여한 “교향시곡” 〈새 날은 밝아오다〉는 송범을 주연으로 하는 무용단이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오프닝을 시작, 합창단의 노래로 서곡을 연다. 총 6장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1장 ‘새 시대의 서곡’, 2장 ‘새 시대의 시작’, 3장 ‘새 시대의 아침’, 4장 ‘새 시대의 과업’, 5장 ‘새 시대의 전망’, 6장 ‘새 시대의 희망’으로 구성되어, 장엄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와 군무, 각 산업 현장의 생생한 소음, 행진곡 풍의 음악 등이 어우러진다. 그야말로 웅장한 “혁명찬가”이자 선전영화로, 제작서류의 구성안을 참고하면 각 장의 구분과 의미를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5.16 군사정변 직후부터, 5.16을 정당화하고 의미를 “선전”하며 이후의 업적을 홍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문화영화가 기획, 제작되었다. 〈혁명공약종합판〉, 〈우리 국군〉, 〈다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새나라 건설을 위하여〉, 〈혁명 90일〉, 〈5.16혁명 1주년을 뒤돌아보다〉, 〈번영의 발판〉과 같은 영화들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새 날은 밝아오다〉는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대한뉴스〉의 부록이나 ‘기록영화’의 형식으로 제작된 데 비하여, 합창과 무용, 시, 행진곡 등으로 5.16의 정당성을 ‘예술’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영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간첩이었다 (1961, 임학송)

196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실화나 수기를 바탕으로 각색한 내용의 영상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전향한 간첩, 귀순한 북한군, 북한 탈출 민간인과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 등이 자주 호명되었는데, 이런 형식을 보통 제작서류에서는 “세미 도큐멘타리”로 지칭하였다. 〈나는 간첩이었다〉 역시 “전 괴뢰군 대좌이자 평양방직공장 정치부장” 출신인 남파 간첩 김혁이 부산에서 세탁소를 하면서 군사 기밀 등을 북으로 전송하다가 남한의 첩보대에게 정체를 발각당할 위기에 처하자 자수하게 된다는 내용을 극화한 “세미 도큐멘타리”이다. 실존 인물인 김혁이 영상의 시작 부분과 끝 부분에 등장하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는데, 김혁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영상의 끝부분에서 다시 등장한 김혁은 현재 약 20만 명의 남한 출신의 공산당이 간첩 훈련을 받고 있음을 알리며, 간첩은 어떤 표식도 없으므로 국민 모두가 간첩을 잡기 위해 합동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영상의 목적은 ‘간첩’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치적 투쟁은 “간첩이 멋있게 지휘”하는 것이며 “데모대 뒤에서 간첩이 웃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장면이나,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두고 “간첩인 내가 보기에도 뻔한 공산주의의 선전”을 하고 있으며, “열성 공산당원 이상의 행동”이라고 규정하는 장면 등은 “얼마 안 가 대한민국은 공산당의 발길에 짓밟힐 것”이라는 공포심을 자극하여 모든 정치적 반대를 공산주의의 책동으로 몰아가려는 정치적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서울과 부산 로케이션 촬영으로 진행된 이 영화는 보통 일반적인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가 한 달가량의 제작 기간을 갖는데 비해 〈제작지시서〉 작성 이후 완료보고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만큼 제작 과정이 신중하게 이루어졌으며 여타의 영화와는 다른 과정이 더해졌는데, 일종의 검열로 볼 수 있는 사전 검토 및 재촬영과 재편집 등이 그것이다. 먼저, 이 영화의 해설대본과 워크프린트(가편집본)는 후시 녹음 전 국방부, 중앙정보부, 내무부, 아세아반공연맹 등에 보내어져 시사되었으며, 이후 각 부처는 찬동서에 사인을 하여 공보부로 재발송했다. 또한, 추가 촬영분으로 김혁이 자신도 모르게 미행당하고 있는 장면과 김혁의 무선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정보부와 형사들의 모습을 삽입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각각의 장면은 제작취지에서 밝혔던 ‘공산당의 이면’을 드러내기에 적합하거나 대한민국 군경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장면은 1차 편집 이후 재촬영되어 실제 영상에 삽입되었다.

향토문화제 (1962, 강래식)

1962년은 지역의 향토문화제가 급증하는 시발점이었다. 이 영상에서 소개하고 있는 향토문화제들은 신라문화제, 남원춘향제, 5.16혁명 1주년기념 제주경마와 해녀축제, 충무공탄신제, 한산대첩제 등으로, 남원춘향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해에 시작된 행사였으며 남원춘향제 역시 행사 주체가 민간에서 관으로 이양된 첫 번째 행사였다.

영상에서 가장 먼저 소개된 ‘신라문화제’는 군사정권이 만든 관주도의 축제 양산화의 일환으로 출발한 대표적인 지역 축제 중 하나였다. 영상에는 씨름, 활쏘기, 농악대회 등의 각종 민속문화 및 놀이가 전시되었는데, 이는 신라 당시의 모습을 상기시켜주는 것으로 서술되면서, ‘신라’를 중요한 전사(前史)로 호명했다. 영상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박정희 의장이 직접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축제 이후, ‘신라는 화랑을 빼고 생각할 수 없으니, 문화제와 더불어 무술대회 같은 행사도 연구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직접 행사에 참여하고 내용에 관여하면서 신라문화제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으며, 특히 ‘화랑’을 강조함으로써 행사에 ‘호국’이라는 성격을 부여하고자 했다.(「해마다 무술대회를/박의장 경주서 당부」, 『동아일보』1962.4.23.)

두 번째로 소개된 ‘남원춘향제’가 이 영상에서 소개하는 여타 축제들과 달리 여성들을 위주로 한 행사였다면, 무엇보다 ‘남성적’인 행사로 구별되면서 ‘전통’을 통한 애국심의 강조, 무(武)에 대한 강조를 드러내는 것은 ‘한산대첩제’와 ‘충무공탄신제’였다. 이 두 축제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민족 최고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행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무장’ 이순신은 군사정부에게 누구보다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순신의 영웅화를 위하여 박정희 정권기에는 광화문 동상을 비롯한 수많은 기념물들이 제작되고 전시되었다. 이런 영웅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영상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산대첩제’와 ‘충무공탄신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제주에서 열렸던 경마대회는 경마 자체의 이채로움이 있었으나,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해녀들이 벌였던 마스게임이었다. 동일한 유니폼을 맞춰 입은 해녀들은 “제주의 민요 속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섬 이어도를 현실화하기 위해 이제 이곳에서도 재건의 봉화가 올려졌습니다. 꿈에만 그리던 이어도가 반드시 실현되기를 온 국민이 마음 모아 빌어야만 하겠습니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태극무늬에 이어 5, 1, 6 이라는 숫자를 몸으로 만드는 해녀들의 모습은 5.16 군사정변이 제주를 이상적인 섬 이어도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군사정부의 공보 선전을 시각화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지방의 축제들은 애초에는 각 지역의 특색을 살려 ‘향토’를 강조하고 ‘민족문화’를 진흥하려는 취지로 기획되었으나 군사정부 하에서 ‘호국’을 강조하면서 비군사적인 문화에도 군사적인 색깔을 부여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이러한 관제 행사의 색깔은 더욱 짙어져 축제들은 대동소이한 행사 내용, 동원된 학생 관객들을 통해 천편일률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었고 그 시점에서 많은 지역의 행사들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았다.

산업박람회 (1962, 윤창혁)

〈5.16혁명 1주년기념 산업박람회〉는 1962년 4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 총 47일 동안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던 산업박람회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애초 박람회라는 제도는 19세기와 20세기 제국들의 식민지 지배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의 거대한 전시장치로 나타난 것이 박람회였으며 식민 통치자들의 근대적 생산물과 식민지인들의 전근대적인 문화, 산업을 대비시킴으로써 식민지인들을 타자로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5.16 군사정변 1주년을 기념하여 등장한 산업박람회는 도입부의 내레이션에서 언급하듯이, 5.16을 기념하기 위한 것을 제1의 목적으로, 경기회복과 기술교류, 외국기술 도입 등 경제적 기능을 두 번째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경복궁 내에 지어진 재건국민관, 혁명기념관, 반공관 건물이다. 이 세 곳의 명칭이 각각 전면에 명시된 건물들을 로우 앵글로 잡아 화면을 가득 채워 웅장하게 보여준 뒤, 카메라는 반공관의 내부로 들어간다. 반공관에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에 사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모형들은 대조를 통해 자유세계의 우월함을 드러내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산업박람회의 제1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다음으로 영상에서 소개하는 경제개발5개년계획관에서는 “발전을 거듭하는 우리나라 각종 산업시설의 모형과 재건될 앞날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관을 비롯한 각 도의 전시관, 과학관 등에는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모형들이 주 전시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모형들은 현실과는 다른, 미래의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그 의미는 영상의 마지막에 흐르는 내레이션에서 선언된다. “45일 동안 250만이 다녀간 이번 산업박람회는 후진적인 가난과 게으름에 젖었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함께 우리도 노력하면 선진국 못지 않은 훌륭한 산업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가운데 막을 내렸습니다.”(내레이션에서는 “45일 동안”이라고 하였으나, 실제 47일 동안 개최되었다.)

이처럼 〈5.16혁명 1주년기념 산업박람회〉는 5.16 군사정변 이후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스펙터클하게 전시하고 군사정부의 경제 시책 하에 도래할 밝은 미래를 상상하게 함과 동시에 ‘반공’과 ‘자유’의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매우 정치적인 기획이었다.

가족계획 (1964, 박영일)

가족계획을 주제로 하는 영상은 가장 먼저 1961년 〈가족계획 1- 가족계획의 중요성〉과 〈가족계획 2- 가족계획강습회〉로 제작되었다. 1964년에 제작된 이 영화 〈가족계획〉이 두 번째로, 이후 〈가족계획(행복의 계단)〉, 〈딸 3형제〉, 〈가족계획(알맞게 훌륭하게)〉, 〈부부수첩〉, 〈루프피임법〉, 〈루프피임법 권장 만화〉 등이 연달아 제작되었다. 이 영상들은 제작된 시기에 따라 가족계획에서 강조하는 내용이나 교육 대상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특징을 보이는데, 1961년에 제작된 〈가족계획〉이 성인을 대상으로 실질적 피임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면, 여기에서 소개하는 〈가족계획〉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있다. 1965년에는 루프시술을 홍보하기 위해 이를 다루는 영상들이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면, 이후에는 루프시술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보다 극화된 형식으로 영상이 구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1960년대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은 ‘경제발전을 위한 인구통제’라는 명제와 함께 진행되었다. 1961년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조직되고, 가족계획사업을 국가정책으로 규정하면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출산을 조절하고 이를 통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재건국민운동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1963년에 제작된 〈가족계획〉은 제작취지를 “폭발해가는 인구 증가를 억제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뒷받침함으로써 국민소득의 증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계몽”하고자 함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어,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이 갖는 의미와 목적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목적에 따라 제작된 이 영상은 신혼 부부 두 쌍의 경우를 통해, 가족계획을 실천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의 2년 뒤, 5년 뒤, 9년 뒤, 14년 뒤를 비교해서 보여주면서 경제적 윤택함에서의 차이를 집중 부각하고 있다.

열반 (1964, 양종해)

1960년 양종해 감독의 〈발전은 협력에서(둑)〉가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 기획상을 탄 것이 해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문화영화가 수상한 실적이었다. 이후, 양종해 감독은 1964년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열반(한국의 불교)〉으로 최우수 비극(非劇)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초혼〉으로 또 다시 제12회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비극(非劇)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양종해 감독은 아시아영화제에서 세 번 수상한, 유일한 문화영화 감독이 되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대종상에서도 〈열반〉은 제3회 문화영화작품상을 수상했다.

〈발전은 협력에서(둑)〉의 수상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해외영화제 출품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화물열차〉도 기획단계에서 “국제영화제 출품에 적당한 작품”이라고 평가되었으며, 〈바닷가 사람들〉이나 〈초혼〉 역시 의도적으로 해외영화제를 겨냥하여 제작되었다. 또한, 〈꼭두각시 놀이〉, 〈석굴암〉, 〈봉산탈춤〉, 〈국악〉, 〈차전놀이〉, 〈강강술래〉, 〈한글〉 등도 “해외 P.R” 혹은 “우리문화의 우수성 홍보” 등의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였다. 대부분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들은 국립영화제작소 감독들에게는 정책 홍보나 정권 선전, 교육 등의 목적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순수문화영화’라고 불렸다.

그 중에서 〈열반〉은 한국 종교의 기원과 민간신앙의 풍습을 설명한 뒤, 불교의 전래와 발전상, 한국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 불교문화의 발전,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등의 문화유산 및 승려들의 생활과 불교 의식 등을 소개한다. 특히, 시인 조지훈이 유려한 문체로 작성한 내레이션과 극영화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곡가 정윤주의 인상적인 음악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함께 한국의 불교를 더욱 예술적으로 소개한다. 엔딩 씬의 석양을 찍기 위해 나흘 동안 산에 올랐다는 감독 양종해의 증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영화는 더 좋은 화면을 위해 작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1960년대 초 국립영화제작소 영화들의 다양한 성격과 질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다리 (1964, 배석인)

이 영화는 다리가 없어 불편을 겪던 마을에 미군이 와서 ‘아리랑 다리’를 건설해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자라는 14살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 영상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나룻배 사공의 딸 정자가, 다리가 건설되면 직업을 잃게 될 걱정에 싸인 아버지와는 달리 미군의 도움을 전적으로 고마워하고 수용하며 그들을 돕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1964년 5월에 기획되었는데, 제작서류에 명기된 기획취지는 다음과 같다. “한미 친선 강화와 미군부대의 총격사건을 미연방지할 것을 주 취지로 함.” 수록내용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기획되었다. 1. 아리랑다리가 없을 시의 불편한 마을 모습. 2. 다리가 생기면 생계가 끊어지는 김씨의 경우. 3. 다리건설 광경과 정자의 조력. 4. 미군부대 침입광경, 다리준공 광경. 5. 미군부대에 취직되는 김씨의 행복한 모습.

1964년 2월은 한미관계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시기였다. 2월 7일, 포천의 미군부대에서 보초를 서던 미군이 한국 소년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고로, 이전에 있었던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의 범죄 행위들이 더불어 소환되었고, 미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과 함께 반미감정이 고조되었다. 특히 가해자인 미군 병사에 대한 재판이 미군 내 법정에서, 일방적인 가해자의 주장에 따라 이루어진 데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10년째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인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요청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주한미8군 사령관 하우즈는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미군의 철조망을 뚫고 영내로 들어와 도둑질을 해 가는 한국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임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매달 약 7만 달러의 미군사시설물들이 도난당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미의 고위급 회담이 연달아 열리면서, 한국인들에 의한 도난을 방지하고 총기사고를 비롯한 각종 미군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미군 부대 근처를 ‘우범지역’으로 정하여 더 많은 한국의 군인, 경찰들을 배치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1964년 5월에 제작된 이 영화의 제작 취지가 ‘한미 친선 강화’와 ‘미군 부대의 총격사건을 미연방지할 것’이었던 것은 이런 배경 하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서류에 첨부된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상을 비교해보면, 몇 가지 의미심장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시나리오에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물품을 훔치기 위해 밤에 미군 부대의 철조망을 끊다가 미군의 총격에 의해 다리 부상을 입게 되는 분이 아버지의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 이때 정자는 “분이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다니 정말 뜻밖이었어요. 왜 그런 짓까지 했을까? 그렇다고 그 미군 보초는 총까지 쏘아야만 했을까? 저렇게 밤을 새워 남을 위해 다리를 만들어주는 미군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그 미군 보초는 총질까지 했을까? 물론 분이 아버지도 나쁘지만 총까지 쏜 미군도 원망스러워요”라는 대사를 읊는다. 이 장면은 당시의 사건과 그 해결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 취지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이 에피소드는 실제 편집된 영상에서는 전체 삭제되어 있다. 두 번째, 정자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미군부대에 취직시켜준다는 설정은 영상에서 ‘괭이를 메고 아리랑 다리를 건너 일 나가’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중학교에 입학하게 될 미래를 그리는 정자의 에피소드로 대체되었다. 세 번째, “왜 미쳤는지” 알 수 없는 금순 언니의 에피소드가, 애초의 시나리오에는 없으나 영상에는 삽입되어 있다. 이 장면 삽입의 표면적 이유는 미군의 친절함과 대민 봉사이겠으나, 서사적으로나 스타일적으로 매우 불균질한 이 에피소드의 삽입 자체가 주는 불편함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 영화가 여타의 영화들에 비해 훨씬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다는 점이다. 국내의 각 도시들에 배포된 부수도 평균 이상이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어 주한 미공보관, 한국의 집, 미공보원, AFKN, 미7사단 등에 배포되었다. 또한, UN을 비롯하여 약 30여 개국의 대사관 및 영사관에 영문판 37부, 동경 대사관에 일어판 15편 등이 배포되었다

새야 새야 (1965, 김상봉)

〈새야 새야〉는 〈실화극장〉 시리즈 중 초기에 제작되었던 단막극이다. 〈실화극장〉은 1964년 11월에 시작된 KBS TV의 인기 드라마로, 반공을 주제로 한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단막 연속 드라마였다. 1985년까지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방송되었던 이 드라마는 중앙정보부 출신의 김동현이 극작을 담당하여, 초창기부터 12년간 지속적으로 방송극을 썼다. 김동현은 대표작인 〈실화극장〉뿐 아니라 1960~70년대 반공, 첩보 극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와 원작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애니메이션 〈똘이장군〉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또, 〈실화극장〉의 상당수가 장편 극영화로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방콕의 하리마오〉(이만희, 1967), 〈돌무지〉(정창화, 1967), 〈제삼지대〉(최무룡, 1968), 〈추격자〉(김수용, 1969) 등이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소개하고 있는 〈실화극장〉 두 편- 〈자유의 뱃길〉, 〈새야 새야〉는 TV드라마로 제작된 뒤, 문화영화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영화로 활용된 위의 두 편은 〈실화극장〉 초기의 작품들이다. 단막극에서 연속극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한 이후의 드라마는 문화영화보다 극영화로 활용되기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새야 새야〉는 당대의 스타 배우 황해, 조미령, 전옥, 이일웅 등이 출연하여 귀순자 이월규의 실화를 각색하여 보여준다. 〈실화극장〉 1호 작품으로 명시된 〈자유의 뱃길〉이 조연급 배우들을 활용했던 것과 달리, 〈새야 새야〉의 화려한 캐스팅은 이미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쌓인 이 시리즈가 유명 배우들을 섭외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월규 본인이 등장하여 인사한 뒤 “헐벗고 굶주린 제 고향 이천 땅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이 농촌 마을로 이동하며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가족의 비극을 묘사하였다. 멜로드라마적 구성으로 연기력 탄탄한 배우들의 열연을 보여주는 〈새야 새야〉는 TV 드라마 반공극의 초기 작품 자료로도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한일회담 (1965, 황왕수)

1965년 전반기 한국을 뒤덮은 주요 이슈는 당연히 「한일협정」이었다. 1964년부터 「한일협정」이 시작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부상하였으며, 1965년 초부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 시위가 점차 격렬해졌다. 민정당은 5월로 예정된 「한일협정」비준을 앞두고, 만약 동의가 가결되면 의원직을 총 사퇴하겠다고 맞서며 국회 해산, 총선 제의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한일 정부는 6월 22일 일본수상관저에서 정식조인을 맺음으로써, 8개월을 끌어오던 「한일협정」회담을 끝맺었다. 조인식을 앞두고 정부는 각 대학과 고등학교를 휴교 혹은 방학 등으로 봉쇄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영상 〈한일회담〉은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가 점차 강력해지고 있던 시기인 1965년 2월 27일에 기획되었다. 이미 1964년에도 〈평화선〉이라는 제목으로 한일회담의 의의와 필요성을 강조한 문화영화가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1965년 5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협정조인식을 목전에 두고 제작된 이 영화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국민 계몽영화를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한일회담의 필요성과 경위를 재강조”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제작기획서〉의 표현대로, 애니메이션, 삽화, 실사 등 “P.R에 적합한” 기법을 모두 동원하여 제작된 이 영화는 중공의 야욕, 동아시아 정세의 위기, 전 세계적 과거 청산의 분위기 등을 전하며 한일회담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또한, 1951년부터 재개된 한일 관계를 “제3공화국”에서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매듭짓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재일교포의 처우와 재산권 문제, 무엇보다도 ‘재산청구권’에 따라 일본에서 무상, 유상으로 들여오게 될 2천억 원 규모의 자금이 강조된다. 이를 통해 기간산업과 사회 간접 자본이 확충되어 “근대화”가 이룩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다. 국민 절대 다수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 체결된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에서 유입된 자금, 1965년의 또 다른 큰 사건이었던 전투 부대 월남파병을 통해 획득한 외화 등을 기반으로,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근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동력을 얻게 되었다.

이 영상은 “한일회담 P.R의 중요성에 비추어 프린트 수를 대량적으로 배포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기 위해 애초 35mm 필름 41벌과 16mm 필름 33벌로 계획했던 것을 35mm 100벌과 16mm 33벌, 총 133벌로 여타 필름 복사 벌수의 3배에서 10배에 달하는 양을 제작, 국내외에 배포하였다.

맹호와 청룡(1집)(1965, 강대철), 맹호와 청룡(2집)(1966, 강대철)

1964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월남으로 파견한 데 이어,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를 파병했다. 최초의 전투부대 파병은 1965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는데 1진으로 청룡부대가 떠났으며 뒤이어 12일에 맹호부대가 월남으로 떠났다. 한국은 4차에 걸쳐 2개 사단과 1개 여단 약 5만 병력을 파병했다.

시리즈로 기획된 이 두 편의 영상 〈맹호와 청룡〉 1, 2집은 각각 1965년과 1966년에 제작되었다. 1965년에 제작된 1집은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통과된 뒤, 월남으로 전투부대가 떠나기 전까지 훈련과정과 파병 기념 축전, 출정식을 거쳐 월남에 도착하는 장면까지를 영상으로 담고 있다. 2집은 월남에서 한국군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비둘기부대의 대민 서비스,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의 압도적 전과, 위문공연단의 공연, 휴식을 취하며 관광을 즐기는 한국군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통령과 유명 정치인들, 최은희, 엄앵란을 비롯한 유명 배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는 파병대의 모습, 월남 항구에 도착하면 아오자이를 입은 월남 여성들이 꽃다발을 걸어주는 모습, ‘백호’와 ‘청룡’으로 불리는 용감한 한국군에 패배하여 손을 들고 몸을 웅크린 채 걸어나오는 베트콩의 모습, 미 부통령 등의 유명 인사들이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채명신 장군과 여담을 나누고 병사들을 격려하는 모습, 이국적인 월남의 자연과 거리 풍경 등은 〈맹호와 청룡〉이 선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이며, 이후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는 월남전 관련 영상들에서도 차용하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가 전달하는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는 월남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격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2집에서 베트콩 특공대에 의해 폭격을 당한 미군 숙소의 처참한 모습과 수색하는 한국군의 용감한 모습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한국군이 미군과 대등한 작전을 펼칠 뿐 아니라 오히려 미국에게 도움을 제공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즉,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이 미국의 든든한 우방이자 유일한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었음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 한편, 이국적인 월남의 풍광과 ‘아름다운’ 월남 여성, ‘왜소하고 주눅든’ 베트콩 남성들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월남을 타자화하고 여성화하여 ‘강인한 남성성’을 강조하는 한국군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이미지로 배치한다.

파병 초기에 제작된 〈맹호와 청룡〉이 ‘정의의 십자군’, ‘공산당 소탕’, ‘자유 수호’, ‘국위 선양’ 등을 강조하면서 월남전 참전의 대의와 정당성을 설파하는 데 비해, 이후에 제작된 영상들은 이에 더하여 참전을 통해 한국이 어떤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별되었다. 월남 참전 기간 동안 한국군이 벌어들인 외화는 총 10억 3천만 달러 정도였고, 이는 이 시기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끈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으며 박정희 군사정부를 안정화시키고 정치적 입지를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5천여 명의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팔도강산(1967, 배석인)

1967년 2월 구정 명절 특별 프로그램으로 개봉한 국립영화제작소의 장편문화영화 〈팔도강산〉(배석인)은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하여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고은아, 허장강, 박노식, 이민자, 이대엽 등 당대 톱스타들을 망라하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제작, 배급, 상영된 〈팔도강산〉은 보통 극영화가 1주~2주 정도 개봉관 상영을 하는 기존의 관행과 달리, 연일 매진사례를 기록하면서 4주 동안 개봉관인 국도극장에 걸려 3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그런 한편, 경기도와 서울시, 강원도 등 각 지방의 행정기관들이 학생 및 시민들을 동원하여 영화상영을 하는 등 정권차원에서 영화의 보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예측하지 못한 흥행과 변칙 상영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당해 7월 1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정부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민당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를 사전선거운동으로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언론에 밝혔으나 결국 선거관리위원회에 〈팔도강산〉의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 사건에 대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질의에 대하여 당시 공보부장관이었던 홍종철은 “영화 〈팔도강산〉은 국립영화제작소가 「영화제작법」 제4조에 의거, 국가의 경제발전상과 향토문화의 선전 및 계몽을 위해 제작한 것”이므로 「선거법」에 저촉된 것이 없다고 답하였으며, 선거관리위원회 역시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영화의 대대적인 흥행 성공에 고무된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한 발 더 나아가 〈팔도강산〉의 속편 제작 계획을 밝혀 “정부의 업적 홍보와 국민 계몽에 더욱 이바지”하겠다고 선언했다.

2월에 개봉하여 선거 기간까지 지속적으로 상영과 재상영을 거듭했던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정부 PR의 영화였으나 인기 배우 및 가수들의 출연과 고속도로를 비롯한 산업의 현장 등 스펙터클한 풍경의 전시 및 노래와 춤 등의 오락을 결합하여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그 해 극장가의 흥행 1위 영화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후, 〈속 팔도강산- 세계를 간다〉(양종해, 1968), 〈내일의 팔도강산 –제3편〉(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까지 김희갑, 황정순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팔도강산 시리즈가 이어졌다. 또한, 김희갑, 황정순 두 배우를 부부로, 기존 영화에 출연했던 스타들을 자식으로 캐스팅한 중·단편 문화영화들도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자가용 타고 친정가세〉(1972)나 〈새마을 만세〉(1973) 등이 이런 류의 영화들이다.

산성마을(1968, 윤창혁)

이 영화는 해발 800m에 위치하고 있는 물 맑은 산성마을이 임진왜란 때 군사들에게 양식과 술을 제공하면서부터 누룩 만들기를 생업으로 삼아온 역사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300년이 넘도록 누룩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 온 이 마을에 위기가 닥친 것은 ‘법의 금지’ 때문이었다.

1962년과 1963년의 계속된 흉년으로, 식량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1963년 막걸리의 원료로 백미 사용을 금지할 것과 양곡 소비제한조치의 일환으로 점심에는 쌀로 만든 음식 판매를 금지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1966년부터는 양조에 쌀 사용을 완전 금지하는 법을 만들게 되었다. 식량 부족뿐 아니라 주세(酒稅)의 증대를 위해서도 가내수공업 식의 술 제조는 규제 대상이 되었다. 1966년 주세가 총 내국세의 9.1%, 총 간접세의 18.8%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통계는 주세가 얼마나 중요한 정부의 수입원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영상의 첫 부분에서 언급된 “매년 주세 수입의 2,400만원 손실”이 바로 이 과잉 단속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친 세무서장은 입지 조건 때문에 이 마을이 산업화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한 뒤, 마을 주민 중 30세 이하의 젊은이들을 공장에 취직시키고 그 외의 주민에게 “적당한 부업”을 알선하여 누룩제조를 그만 두게 만든다. 기획서에서 밝힌 바, “250년 밀조주의 아성”으로 “그늘 속에서 살아왔으나”, “국세청의 선도”로 “밝은 생활”을 하게 된 산성마을 사람들의 사례는 이 영상 제작의 의도대로 “사회부정의 근절은 오로지 행정당국과 국민들이 상호이해하고 협조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을 널리 주지”시키는 데 있어 매우 적합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상과 제작서류에는 갑작스러운 법의 개정으로 인해, 생업이 불법으로 몰리게 된 이 마을 주민들의 당혹감과 이들을 설득하는 세무서 직원들의 비논리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작서류에 포함된 시나리오에는 세무서 직원이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들이 살지 못한다고 이렇게 취체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국가에서 금지된 누룩을 밀조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좀 더 잘 살기 위해선, 여러분이 스스로 누룩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감춰둔 누룩까지 모두 가지고 나와서 다시는 밀조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주십시오.”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한 것과 산성마을 주민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 어떻게 배치되는지, 정확한 설명 없이 산성마을 주민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을 무작정 그만 두도록 설득하는 장면은 국가의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행정 운영을 드러낸다. 위의 대사와 마을 주민들의 절규는 영상에 남아 있지 않지만, 감춰둔 누룩을 단속하기 위해서 십 수 명의 장정들이 들이닥쳐 주민들의 세간을 뒤져 누룩을 들고 나가는 장면과 이를 막기 위해 실랑이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이런 괴리를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밀주 단속 성공의 사례로 영화까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산성마을의 누룩제조는 근절되지 않았던 듯하다. 1979년 박영수 부산시장의 ‘민속주 지정 건의’를 수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9444호로 ‘전통 민속주’ 제도를 만들고 산성막걸리를 대한민국 민속주 제1호로 지정했다. 허가 당시 주민 150여 명이 출자해서 만든 유한회사 ‘금정산성 토산주’는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부일기(1968, 한탁성)

1955년 창간된 월간 여성교양지 『여원』은 1970년에 재정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주부생활』(1965), 『여성동아』(1967) 등과 함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잡지로 발간되었다. 문화영화 〈주부일기〉는 여원사가 제정한 ‘제1회 살림 잘하는 주부상’ 수상자들의 수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전 가정주부들이 뒤따르도록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조국근대화라는 기치 및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의 테제 하에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문화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강강술래〉, 〈행주치마〉처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한 여성들의 ‘싸우는’ 모습을 강조하는 영화, 〈새로운 가정의례〉, 〈건강한 가족〉, 〈보리혼식과 분식장려〉와 같이 정부의 시책에 맞춰 가족의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인 ‘주부’로 여성들을 호명하는 영화, 그리고 〈주부일기〉나 〈어둠을 헤치고〉와 같이 어려운 가정경제를 ‘저축’을 통해 알뜰히 꾸려나간 여성들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등이 제작되었다. 특히, 〈주부일기〉가 제작된 1960년대 후반은 국가 주도로 개인 저축이 장려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족자본 형성”에 있어 저축이 절대적 요소임을 강조하면서 저축의 국가적 의의와 가정적 의의를 설파하기 위해 제작된 소년가장의 이야기 〈가시밭을 헤치고〉(1966)의 제작의도는 〈주부일기〉나 〈어둠을 헤치고〉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중산층 여성들을 주요 타겟으로 여성들의 사회, 경제적 행위를 가정 내에서의 ‘주부’의 역할로 한정하고자 했던 『여원』을 비롯한 여성 잡지들의 편집 방향은 ‘살림 잘하는 주부상’이라는 타이틀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가정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농사일부터 보따리 행상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끈기와 노력을 다했던 김혜순 주부는 대부분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살림살이를 남편의 ‘생활력’ 덕분이라고 칭송한다. 또한, 여타 여성의 수기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남편들에 비해 비교적 민주적이고 덜 권위적으로 묘사된 남편과 김혜순 주부의 관계는 당시 여성 잡지들이 그렸던 이상적인 근대적 가족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었다. 독립적이고 강인하지만 가부장제 안에서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것, 그것이 바로 1960년대 후반 남성 중심의 국가 재건 프로젝트에서 여성 잡지가 담당했던 역할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창구사무개선(1969, 이지완)

이 영화는 일반 시민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공무원 교육용이라는 목적을 밝히고 제작, 배포했다는 점에서 여타 문화영화와는 구별된다. “창구사무 처리에 관한 시청각 교육을 통하여 각급 공무원에게 민주행정 구현을 위한 대민봉사도를 높이고 사무처리 과정에서 제기되는 제반 비능률적 요소를 발견, 사무개선의 의식을 고취하여 사무능률을 향상시킴을 목적”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각급 국가공무원 및 지방공무원” 그리고 “창구사무에 종사하는” 인력들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기관의 직장훈련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상의 시작 부분에서 “친애하는 공무원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이는 총무처장관 이석제였다. 총무처의 주 업무는 국무회의 의안 정리 및 서무, 법령 및 조약의 공포, 공무원 인사 관리, 행정 기관 조직 및 정원 관리, 행정 사무 및 민원 제도 개선과 실태 평가 등이었다.

이 영상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공무원의 행정 사무 및 민원 관련 업무가 바로 총무처의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영상은 시민들이 관공서를 이용할 때 불편과 불만을 느끼는 상황을 극화하여 다소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제시한 뒤, 대민 서비스의 중요성과 서비스 내용의 개선을 홍보한다. ‘시청각 교육’이 일반화되고 있었던 1960년대, 공무원 교육영화를 제작하여 직장훈련의 성과를 높이고자 했던 총무처의 의도가 엿보이는 영상이라 하겠다.

오붓한 잔치(1969, 박정근)

이 영상은 1969년 1월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과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시행령」, 그리고 3월로 예정된 세부준칙의 공포를 앞두고 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한 혼인을 예시, 홍보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스타배우 남정임과 오영일을 주인공으로 기용하여, 결혼을 일주일 앞둔 두 남녀의 갈등 상황을 통해 ‘간소하고 건전한’ 결혼식의 합리성과 의미를 주장하고 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실시한 의예간소화운동에서도 일상의 관혼상제 예식을 국가가 규제,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가정의례준칙은 그 기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한 것이었다. 이는 “구습타파를 통한 근대화와 근검절약을 위한 간소화”라는 취지로, 자율적 변화의 가이드라인 제공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영상의 제작을 비롯하여 가정의례준칙의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일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유신체제 성립 직후인 1973년 이를 강제하는 법률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권고사항은 강제규제로 변모하여 징역, 벌금, 경고 등의 벌칙규정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법적 규제는 1984년 완화된 개정이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가정의례준칙을 통해 전통적 관혼상제 문화를 해체시키고 근대적 일상성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국민들의 사생활의 영역에 깊이 개입, 통제하려는 국가주의적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일반 대중들로부터 공감과 호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점차 이를 본래 목적 이상의 사회에 대한 정치적 억압통제와 훈육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대중들의 반감을 불러왔음도 지적되어야 한다.

한편, 이 영상은 보건사회부의 요청에 의해 기획되었는데,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보건사회부의 행정주사가 작성한 세세한 의견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수정 의견에 의하여 몇 가지 내용이 변경되었는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신랑신부의 예물 교환에서 애초 예시되었던 것이 아파트 열쇠였으나, 이것이 너무 과중한 선물로 느껴지고 농촌 상영 시 이해 못하는 층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주택금고 납입서 또는 저금통장으로 교환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었다. 실제 영상에서는 이 의견이 반영되어 주택자금 납입 예금통장으로 대체되었다.

티우 대통령 방한(1969, 박희준)

“1969년 5월 17일부터 5일간 한국을 방문하는 티우 월남 대통령의 방한일정을 수록한 기록영화를 제작하여 관계국에 배포”할 목적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발전상과 한월간의 유대관계 및 아름다운 풍경 등을 조화”시켜 수록하도록 기획되었다. 1968년부터는 문화영화 제작 시에, 기존에 제작되었던 〈대한뉴스〉나 문화영화의 일부 장면을 발췌하여 활용하는 것이 빈번했는데, 이 영화 역시 〈뉴코리아〉, 〈월남전선〉, 〈정상회담〉, 〈성년한국〉 등의 여러 장면을 차용했다.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티우 월남 대통령의 방한을 국가적 행사로서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공보활동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기획, 조정된 생산물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1968년에 미국은 월남 공산군의 반격 및 국제 여론 악화 등으로 인해 협상을 통한 종전을 선언했고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결정했다. 다소 일방적이었던 미국의 결정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 및 국내 안보에서의 위기 등에 직면하여 한국군 철수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1969년의 티우 대통령 방한은 여러 가지로 선전, 활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공보부는 즉시, “대내적으로 방한의 의의 및 그 성과를 널리 홍보하여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국민에게 최대한으로 부각”시키며, 대외적으로는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선용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증진과 국제적 지위향상”에 기여케 하며, “양국간 상호경제협력관계와 친선관계를 더욱 돈독하게”할 뿐 아니라 한국이 월남의 평화 및 “아세아 태평양지역 자유제국과의 친선관계와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적극 P.R”하기 위해 “국내외 매스미디아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상을 과시”하고 “국제사회에 있어 한국의 국력과 지위의 급격한 향상을 국내외 피.알에 부각”시키기 위하여 다양하고 구체적인 세부 방침이 세워졌다.

공보부의 지침 중 미디어 홍보와 관련된 내용은, “뉴스 및 기록영화, 속보사진전시 등을 통한 보도”를 활발하게 할 것과 KBS 라디오와 TV, 영화제작반, 사진촬영반을 동원하여 취재보도하며 민간방송, 신문에도 자료를 제공할 것, 우리나라의 민속문화예술을 소개할 수 있도록 방한 시기에 맞춰 민속예술제를 개최할 것 등이었다. 세부적으로는 방한 전, 방한 중, 이한 후로 나누어 각각 KBS 라디오 및 TV 기존 프로그램에서 보도할 내용과 특집방송의 편성 등이 명시되었고, 영화제작에서는 〈대한뉴스〉에 담을 내용과 “기록영화”로 제작할 내용 및 분량, 해외판 기록영화의 제작 등이 조율되었다.

이렇게 제작된 영상 〈티우 대통령 방한〉은 한글 내레이션을 입힌 뒤, 영어 버전으로도 만들어졌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는 영문판을 소장하고 있다. 영상의 시작 부분에서 보이는 도시의 일출 장면 및 풍경 등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기존 영상의 일부를 차용한 것이며, 이어지는 영상은 공항 도착 장면부터 티우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며 보여준다. 이 영상 및 관련 서류들은 국가와 체제의 선전에 정밀하게 활용되었던 미디어의 속성을 드러내며, 이를 세부적으로 기획하고 조정했던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공보 현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오락순화에 치중/ 영화상영허가 사무요강과 국산에 보상특혜요강 공고」, 『동아일보』1959.1.14.석3면; 「영화배급회사 5계급으로 구분」, 『조선일보』 1959.1.14.석3면;
「추천제에서 할당제로/ 문교부, 신년도 영화수입허가시책 발표/ 배정량은 실적따라/ 38개사를 5급으로 구분」, 『한국일보』1959.1.14.4면.
2)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관계」, 『영상예술연구』25, 2014.
3) 문화공보부, 『문화공보30년』, 고려서적주식회사, 1979, 47쪽.
4)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문화영화의 안과 밖』, 현실문화연구, 2014; 이순진, 「국가에 의한 영화 제작의 역사와 국립영화제작소」, 같은 책.
5) 1960년대 후반 미공보원의 영화제작 축소와 킹피쉬프로젝트에 대하여는 박선영, 「냉전시기 뉴스영화의 정체성과 실천의 문제-〈리버티뉴스〉의 역사와 외국 재현을 중심으로」, 『사림』65, 2018 참고.
6) 「안익태 선생, 만주국 창립 기념음악 작곡」, 『연합뉴스』 2006.3.8.; 「안익태 선생 친일여부 논란」, 『경향신문』 2006.3.8.; 송병욱, 「다시 보는 안익태: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
『내일을 여는 역사』27, 2007; 「베를린에서 개최된 일본 콘서트」, 허은 외, 『영상, 역사를 비추다: 한국현대사 영상자료해제집』, 선인, 2017.
7) 4H운동은 미국에서 시작하여 1947년 경기도 군정 앤더슨 중령에 의해 ‘농사청년구락부’라는 명칭으로 재도입되었다. 4H는 Head(지육), Heart(덕육), Hands(노육), Health(체육) 등
4가지의 덕목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 원조당국이 사업의 방침과 기술 지원을 담당하고 실질적 운용은 한국정부가 관할하였다. 한봉석, 「4H운동과 1950년대 농촌 청소년의 ‘동원’ 문제」, 『역사비평』83. 2008.
8) 박선영, 「1960년대 초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와 ‘영화’: 군사정권의 공보정책과 문화영화」, 『이화사학연구』54집, 2017.
9) 박선영, 「1960년대 초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와 ‘영화’: 군사정권의 공보정책과 문화영화」, 『이화사학연구』54집, 2017.
10) 최석영, 「조선박람회와 일제의 문화적 지배」, 『역사와 역사교육』3,4호, 1999.
11) 배은경,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여성 모성 가족계획사업』, 시간여행, 2012.
12) 공영민 구술채록,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양종해』, 한국영상자료원, 2006.
13) 실제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된 것은 1966년 7월 9일이다.
14) 「분별없는 미병 총질」, 『동아일보』 1964.2.7.; 「미군 총맞고 절명」, 『경향신문』 1964.2.7.; 「미군총에 또 중상」, 『경향신문』 1964.2.10.; 「쓰레기통을 뒤지려 들어갔다가 미군경비병에게 발견되어 도망치던 허군이 총에 맞아 쓰러진 곳」, 『동아일보』, 1964.2.11.; 「미군총격사건과 그 대책」, 『동아일보』 1964.2.12.; 「한미행정협정체결을 위한 미국의 현명한 결단을 촉구한다」, 『동아일보』 1964.2.12.; 「한미우호관계를 흐리게하는 미군의 발포사건」, 『경향신문』 1964.2.14.; 「군수품 도난 강력한 대책을」 , 『경향신문』 1964.2.15.; 「70만불 손실있다손치더라도 인명과 못바꾼다」, 『동아일보』 1964.2.15.; 「미군총에 또 절명」, 『경향신문』 1964.2.17.; 「총격, 도난방지 대책협의」, 『경향신문』 1964.2.18. 등 1964년 2월 한 달 동안 『경향신문』, 『동아일보』에 실린 미군범죄와 그 반응 및 대책 관련 기사만 약 70여 건에 이른다.
15) 박선영, 「프레임 속의 전쟁: 국립영화제작소와 국군영화제작소의 베트남전쟁 영화를 중심으로」, 허은 외, 『영상과 아카이빙 그리고 새로운 역사쓰기』, 선인, 2015.
16) 홍석률, 「위험한 밀원- 박정희, 존슨 행정부기 한미관계와 베트남전쟁」, 『역사비평』 88호, 2009.
17) 「시인 최원준의 부산탐식프로젝트〈58〉 산성마을 누룩과 산성막걸리」, 『국제신문』 2017.7.4.
18) 이소영, 「‘건전한’ 혼례의 법제화: 가정의례준칙을 통한 호화결혼식 단속, 1969-1984」, 『법과사회』57호, 2018.
19) 고원, 「박정희정권 시기 가정의례준칙과 근대화의 변용에 관한 연구」, 『담론201』9(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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