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영화보기

  • 영화보기
  • 전체

아리랑다리

영상소개

  • 분야

    정치

  • 생산연도

    1964

  • 감독

    배석인

  • 생산기관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 관리번호

    CEN0002741~CEN0002742

  • 재생시간

    20분 58초

영상해설

  • 한미협조로 건설된 아리랑다리 건설을 보여주는 영상기록이다. 뱃사공이 건네주어야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마을에 한미친선 강화와 유대를 위한 협조로 미군에 의해 아리랑 다리가 건설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상자막

  • (00:31)
    딸 : 아버지! 아버지 모자!
    
    저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나룻배를 건너 주어야 한답니다.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도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도 이 강에서 나룻배로 살으셨다니까 우리 집은 대대로 나룻배로 먹고 살아온 셈이에요. 그런데 강 건너 동두천이란 마을과 이쪽 안흥리 사이를 흐르는 이 강에는 나룻배라곤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저의 아버지는 조금도 쉴 사이가 없어요. 특히 아침 등교시간이 되면 강 건너편에서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때문에 나룻배 한 척으로써는 여간 불편하지 않아요. 상급반 학생들은 나룻배를 기다리다 못해 옷을 벗고 강물을 건너는 일도 참 많아요. 그러나 강물이 너무 거세거나 폭풍이 불 때는 나룻배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 10리 길을 둘러 다녀야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강물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나룻배 대신 징검다리를 이용하게 되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나 어린 학생들로서는 좁은 징검다리를 건너기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에요. 뿐만 아니라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지는 학생들도 참 많았어요.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쉬지 않고 학생들과 동네사람들을 위하여 나룻배를 움직여 왔어요. 
    
    손님 : 사공! 사공! 사공~! 여기로 와요! 사공!
    
    (03:18)밤이 깊어 아버지는 피로에 지쳐 잠이 든 후에도 사람들은 악을 쓰고 사공을 부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럴 때는 하는 수 없이 서툰 솜씨나마 내가 삿대질을 하여 나룻배를 건너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이 강에 다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오늘밤은 정말 기쁜 날이에요. 왜냐하면 오늘밤은 뜻밖에 교장선생님이 밤늦게 나룻배를 건너 오셨는데 교장선생님은 오늘도 군수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아마 이 강에 다리가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나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딸 : 아버지, 아까 교장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이 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교섭 중이래요. 
    아버지 : 다리가 생기면 남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린 밥도 못 먹게 돼!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정말 뜻밖이었어요.
    
    (05:17)오늘은 뜻밖에 많은 손님들이 나루터에 나타났어요. 군수님과 읍장님 그리고 우리 마을 가까이에 있는 미 제7사단 사단장님도 여러 장교들을 데리고 우리 마을에 도착하여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했어요. 읍장님은 모여든 동네 사람들에게 이 강에 다리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읍장님은 다리 공사를 착수하게 된 경과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매달 열리는 한미친선 회의에서 군수님을 비롯하여 읍장님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 7사단장님과 의논하여 우리 마을에 다리를 놓을 것을 결정하셨다는 것이었어요. 오늘은 우선 현장을 보러 나오셨다는 것이었어요. 나뿐 아니라 이 소식을 들은 동리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사단장님은 떠나기 전에 분희 아버지와 순이 할머니 그리고 나하고도 악수를 해주었는데 보기에 참 친절하고 어진 사람 같았어요. 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여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곧 다리 공사가 착수된다는 소식을 전했으나 아버지는 여전히 좋아하지 않았어요. 정말 다리가 생기면 우린 밥도 못 먹게 될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후 어느 날 다리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미군 공병 대원들이 여러 가지 기구와 물건을 가져와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에요. 다리가 없어서 온갖 불편을 당해온 우리 마을 사람들도 공사 광경을 구경하면서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09:18)그런데 다리 공사는 특수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동리 사람들이 도울 일을 거의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미군 아저씨들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교장선생님도 시간이 나는 대로 다리 가에 나와서 미군들을 위로 해주고 말벗이 되어주기도 했어요. 처음엔 낯이 설었던 미군들도 날이 갈수록 친하게 되었고 나는 미군들에게 점심을 나누어 주기도 했어요. 나는 조그마한 일이나마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여간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휴식시간이 되면 미군들은 모두 천막 가에 모여 앉아 아리랑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미군 아저씨들과 아리랑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더 한층 친하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7사단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리랑을 연주하기 때문에 7사단 미군들은 모두 아리랑 노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11:43)뜻밖에도 우리 마을에 사는 금순이 언니가 정신 이상이 되어서 다리 공사장에 나타난 것은 정말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었어요. 다리 공사를 하던 미군들은 금순이 언니를 마침 지나가던 엠블런스 차에 실어 병원으로 보내게 됐으나 끝까지 발악을 하며 안가겠다는 금순 언니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리 공사가 반 이상이나 이루어진 어느 날 아버지는 홀로 나루터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정말 딱한 일이었어요. 폭풍이 불거나 강물이 거셀 때는 10리 길이나 둘러 다녀야 했던 이 강에 다리가 생긴다고 온 동네가 기쁨에 가득 차 있는데 왜 아버지만이 실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리가 생기면 우린 밥을 굶게 된다고 아버지는 늘 얘기하셨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14:05)금순이 언니가 앰브랜스 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은 후에도 매일 같이 히튼이라는 의사는 금순이 언니 집까지 찾아와 치료를 계속해주었어요. 그래서 금순이 언니도 근 한 달 동안이나 히튼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병이 퍽 나아졌다니까 정말 기쁜 일이었어요. 7사단장님은 가끔 다리 공사를 시찰하시기 위하여 직접 공사장까지 나오셔서 공병 대원들을 격려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동네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지시하기도 했어요. 한국말을 제법 잘하는 미국인이 앞으로 열흘이면 다리가 완성된 것이라고 하니 몹시 마음이 설레이는군요. 다리 공사는 밤에도 계속되는 날이 많았습니다. 일을 많이 하면 그만큼 다리가 빨리 완성되겠지만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미군들을 볼 때 어쩐지 미안하기도 했어요. 교장선생님은 가끔 커피도 끓이고 과일도 사와서 수고하는 미군들을 찾아주시었고 나도 교장선생님을 도와 커피도 따르고 과일도 나누어 주고 했는데 그런 때가 정말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한국 과일을 맛있게 먹는 미군들을 볼 때 난 정말 기뻤어요. 그러나 이 강에 다리가 생기면 우린 밥도 못 먹게 된다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날 때 나는 어쩐지 무서워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난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도 무슨 다른 직업이 생길 것을 빌어보기도 했어요. 
    
    (16:57)다리 공사를 시작한지 꼭 한 달 만에 드디어 다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공사 감독을 해온 알바트 상사가 내가 미군들을 도와준 기념으로 다리 위에 내 이름을 달게 되었다는 것이었어요. 난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온 동네사람들과 손님이 한자리에 모여 드디어 준공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로서는 가장 기쁜 날이었어요. 군수님이 다리 공사에 공이 많았던 미 인사처장에게 감사장을 주었고 또 사단장님은 우리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게 파이프를 선사했고 또 할아버지는 긴 담뱃대를 선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었어요. 
    
    (18:25)드디어 손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쁨과 흥분 속에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어요. 다리의 이름은 아리랑 다리라고 지었는데 그것은 한국과 미국의 굳은 우정을 서로 길이길이 기념하기 위한 것이래요. 나도 미군 아저씨와 함께 아리랑 다리를 건너갔으며 금순이 언니도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로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됐으니 정말 기뻤어요. 생각하면 모두가 즐겁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나룻배가 못 건너갈 때는 10리 길이나 둘러서 다니거나, 때로는 물속으로 강을 건너거나, 위험한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했던 학생들도 이제는 마음 놓고 언제든지 이 아리랑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단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에요. 그리고 다리가 생기면 밥을 굶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시던 아버지도 이제는 나룻배를 버리고 대신 괭이를 메고 아리랑 다리를 건너 일 나가시는 걸 볼 때 나의 가슴은 기쁨과 만족감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19:55)아버지가 황무지 땅을 계단식으로 개간하는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무렵이면 나는 언제나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같이 가줄 생각에 잠겨 보기도 했어요. 
    
    딸 : 아버지!
    
    그리고 난 아버지에게 나도 하루빨리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면서 아버지와 나란히 집으로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생각해봤어요. 이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우리는 마음대로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요.

관련 기록물

35208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2동
© National Archives of Korea.

국가기록원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