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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영상소개

  • 분야

    정치

  • 생산연도

    1980

  • 감독

    한호기

  •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 관리번호

    CEN0005833

  • 재생시간

    19분 22초

영상해설

  • 6.25전쟁의 비참함을 상기하여 안보 의식 고취

영상자막

  • (00:12)이 영화는 6.25 당시 한국 종군 기자가 촬영한 것과 북괴군 및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필름, 그리고 미 국방성에서 제공한 필름으로 제작한 것이다.
    
    (00:38)6.25 전야에 고요히 잠든 서울. 채 날이 밝기도 전 이른 새벽 저 포문이 열리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다.
    
    (00:52)북한 공산집단은 보병 10개 사단 11만 명의 병력으로 소련제 T34형 탱크 244대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으로 물밀 듯 기습 남침해왔다.
    
    (01:23)잠결에 북괴의 침입에 놀란 국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01:38)기습 남침 사흘 만인 6월 28일 오전, 수도 서울이 북괴군에 점령되었다. 38선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110리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01:53)왜 이렇게 사흘 만에 힘없이 서울을 빼앗겼는가.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고 국군은 속수무책 후퇴해야만 했는가.
    
    (02:05)돌이켜 보면 8.15해방이 되자 38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에서는 소련군 첩보원이었던 30대의 김성주가 김일성의 이름을 빌어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 독재정권을 세웠다.
    
    (02:26)김일성은 소위 인민군을 뽑고 무기생산 등 오로지 남침 준비에 혈안이 되었다.
    
    (02:46)남침 준비를 굳히기 위해서 김일성은 중공에서 한인계 팔로군 2만 명을 인민군으로 편입시키고 중공과 상호방위조약까지 맺어놓았다.
    
    (03:04)더욱 소련과의 비밀군사협정에 따라 소련제 T34형 탱크도 속속 북한에 도착했다. 이렇게 전쟁 준비를 완료한 김일성은 서슴없이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03:27)한편 남한은 어떠했는가. 해방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남한은 갑자기 불어 닥친 자유의 물결로 두셋이 모이면 정당이 생겨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03:46)더욱이 여수 반란사건 등 폭동으로 몰고 가던 공산분자들의 책동으로 나라 안은 어지럽기만 했다. 정판사사건, 대구폭동, 지리산폭동, 제주도폭동 등이 그것이었다.
    
    (04:04)이런 분위기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한 대비책에는 한계가 없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의 철저한 남침 준비에 비하여 이렇게 죽창을 들고 공산 도발을 막으려 했던 사실을 우리는 지금에도 잊어서는 안 된다.
    
    (04:25)당시 우리 국군의 무장은 빈약했다. 정부는 북괴 남침을 염려해서 미국에 대해서만 군사 원조를 계속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자위력을 갖추지 못한 채 미군은 동란 발발 일 년 전에 모두 철수해버렸다.
    
    (04:47)동란 직전 5월에는 10여 개 정당, 단체의 난립 속에 어수선한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그리고 바로 남침을 당했다. 대구, 부산만 남긴 국가 존망에 위기를 맞은 것이다.
    
    (05:06)3개월간 북괴에 짓밟혔던 서울의 모습을 본다.
    
    (05:20)미처 남으로 피난 가지 못한 시민들은 이렇게 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 노동에 서명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05:37)폭격으로 없어진 각종 수송수단 등을 북괴는 인력으로 대신했다. 연약한 여자들도 중노동에 동원됐다.
    
    (05:49)그 잔인했던 인민재판의 현장이다. 그들은 공산당에 비협조적이라는 누명만으로도 반동분자로 몰아 인민재판을 통해 무차별 학살했다. 서울 시민은 치를 떨며 그저 숨어 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06:10)여기는 인민의용군 모집 현장이다. 나이 어린 중학생까지 강제로 잡아다가 이렇게 하루 이틀 훈련시켜 일선으로 내몰았다.
    
    (06:22)이 많은 소년 소녀들이 총도 제대로 못 쏘면서 전선의 총알받이가 되어버렸다.
    
    (06:35)7, 8월의 더위 속에 국민들은 허겁지겁 무조건 남으로 향했다.
    
    (06:54)전 국민이 거지가 되었던 피난 생활.
    
    (07:13)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우리의 젊은 학도들도 분연히 궐기했다.
    
    (07:24)이들은 앞을 다투어 군문으로 뛰어들었다. 군번 없는 학도병들도 낙동강 전선으로 나섰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못한 이들의 희생은 컸다. 애국심 하나만으로는 잘 훈련된 북괴군을 당할 수 없었다.
    
    (07:51)낙동강 교두보는 미국을 비롯한 UN 참전 16개국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대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 치열했던 다부동, 영천, 포항 등지에서 대혈전. 이 전투에서 파죽지세에 북괴군은 주력을 잃고 주춤했다.
    
    (08:27)북괴군 포로들. 그중에는 이렇게 나이 어린 병사도 많았다. 김일성 집단의 포악성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08:43)적군의 허리를 자르는 인천상륙작전.
    
    (09:02)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한국 해병대와 UN군은 24시간 내에 해안교두보를 확보했다.
    
    (09:13)인천이 수복되는 순간 지옥보다 참혹했던 적 치하에서 숨어 살던 시민들은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09:230지체 없이 한국 해병대와 UN군은 서울로 향했다. 화염이 충천했던 서울.
    
    (09:32)3개월만인 9월 27일 아침 6시, 우리 해병 선발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다.
    
    (09:50)서울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 포탄에 부서진 벽돌만이 뒹굴고 적 치하에서 벗어난 시민들이 거리를 오간다.
    
    (10:03)모진 고난을 이기며 100일 만에 고향에 돌아온 피난민들. 그러나 그곳에는 기쁨보다 폐허 속의 통곡만이 엉켜 메아리쳐갔다.
    
    (10:18)붉은 무리들의 총칼에 죽어버린 자식들. 행방조차 알 수 없는 부모 형제. 무려 43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으며 3만 명 이상이 북으로 끌려갔다.
    
    (10:43)노구를 이끌며 죽은 자식의 시체만이라도 찾으려는 노모들. 너무나 엄청난 절망에 여인들은 기절하거나 미쳐버렸다.
    
    (10:57)그 참극과 비통 속에 우리 국군은 북진을 계속해 마침내 10월 26일 그 선봉은 한만 국경선이 있는 초산에 도달했다.
    
    (11:16)눈앞에 전개된 저 강이 바로 압록강이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던 순간이었다.
    
    (11:29)그러나 한반도에는 또다시 의용군의 이름으로 중공군이 나타났다. 꽹과리, 나팔, 피리를 불며 자그마치 30개 사단, 30만 병력이 압록강 얼음판으로 건너왔다.
    
    (11:54)불개미처럼 밀고 내려오는 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한미연합군은 곤경에 빠졌다.
    
    (12:04)또다시 후퇴의 길은 시작됐다. UN군은 작전상의 후퇴라고 했지만 우리 국민은 고향을 아주 등진 마지막 길이었다. 그해에는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12:25)특히 자유가 무엇인가를 잠시나마 겪었던 북한 국민들은 다투어 피난길에 올랐다.
    
    (12:42)피난길의 허기진 아이들. 이 어린아이들이 겪은 뼈저린 체험은 지금도 생생하리라. 이 아이는 지금쯤 어디 살며 무엇을 하고 있을까.
    
    (13:00)그 해 12월 초 15만 명의 피난민이 모여든 흥남부두. 배를 타느냐, 못 타느냐 하는 것은 바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밀고 밀리며, 밟고 밟히며, 자유를 찾아 배에 올랐다.
    
    (13:18)흥남에서, 인천에서, 항구마다 배를 타려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몸서리치는 공산 치하를 벗어나려는 민족의 몸부림이었다.
    
    (13:35)서울 시민에게도 피난령이 내렸다. 이것이 한 많은 1.4 후퇴였다. 한강에는 120만 서울 시민과 북에서 남하한 50만 동포가 합쳐 큰 혼잡을 이루었다.
    
    (13:57)한강을 넘은 피난민은 기차를 탔다. 화차든 기관차든 어디든지 올라탔다. 이 처참했던 현장은 불과 30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얼어붙은 아기 얼굴을 녹이려는 모정. 이 아이가 살아있다면 지금쯤 30대 후반이 됐을 것이다.
    
    (14:28)자식을 행여 떨어질까 화통에 매어놓는 아버지. 화풍에서 뿜어대는 증기는 얼굴에 닿자, 곧 얼어붙었다. 그래도 남으로 가야한다.
    
    (14:45)무작정 남으로 내려가는 피난길. 남녀노소, 맹인까지 집을 나섰다.
    
    (15:02)비극의 행진은 남으로 갈수록 도도한 물결처럼 불어만 갔다. 실로 목숨을 건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해방 이후 소용돌이치는 정세 속에서 그저 자유만을 즐겼고 그 자유를 지킬 줄 몰랐던 데서 당한 민족의 비극이었다.
    
    (15:26)생명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피난 생활. 이 민족의 비극을 저지른 공산집단은 지금도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15:45)전쟁 중의 피난 학교. 아이들에게 교실이 있을 리 없다. 이렇게 노천에서 공부했다.
    
    (16:07)피난 대학교도 문을 열었다. 전란에 와중에서도 공부는 계속돼야 했다. 정차 이 나라 주인공으로 다시는 이런 민족의 비극이 없도록 바라면서.
    
    (16:28)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38선 대신 휴전선이 그어진 채 전투만 잠시 멎어진 것이다.
    
    (16:43)국란 3년 1개월에 결산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에게는 이제 집도 없고 남편도 없었다. 이런 전쟁미망인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17:00)일시에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는 무려 10만 명이었고 국군이 10만 명이나 전사했으며 민간인은 100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17:14)길거리를 헤매는 부모 잃은 아이들. 도움의 손길만을 찾는 고아들. 
    
    (17:27)철없는 아이들에게 누가 이런 비극을 안겨주었는가.
    
    (17:39)두려움에 떨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아이들.
    
    (17:59)울다 지친 아이들은 그저 열심히 기도했다.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 30년 전 그때 우리가 기도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18:19)6.25의 비극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북괴는 아직도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다. 두 번 다시 이 땅 위에 이런 참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늘의 이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왔는가. 6.25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나 보릿고개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가난을 딛고 온 국민의 노력으로 이만큼 성장, 번영의 80년대의 문턱에 섰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련에도 견디고 넘어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하물며 공든 탑을 무너뜨려서야 되겠는가. 진정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다. 6.25 서른 돌!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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