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4
김성민
국립영상제작소
CEN0004869
17분 29초
(00:20)유구한 한 민족의 역사와 함께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수도 서울의 상징 한강. (00:33)서울은 현재 발전된 모습이 갖춰지기 오래전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생활 터전이었으며 문화의 발상지였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흔적을 서울의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현재 수도 서울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집단 생활터가 되어왔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01:02)한반도의 중심지에 수도를 정한 조선. (01:11)조선 왕조시대 수도 서울의 대표적 궁궐에는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등 다섯 개의 궁이 있다. (01:27)이 궁들의 모습에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01:43)궁궐은 왕의 거처이자 국가 통치의 발원지로 한 나라의 가장 고급스러운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던 곳이었으며 권력의 치열한 암투와 왕족들의 일상생활이 이어져 온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었다. (02:07)하지만 국운이 쇠하여 사직이 무너질 때 가장 큰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02:26)조선의 대표적인 궁인 경복궁.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에 의해 1,395년 창건된 궁궐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이라고도 불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정궁이다. 600년을 이어오는 동안 경복궁은 수차례에 걸친 화재와 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됐었고, 뒤를 이어 집권한 임금의 뜻에 따라 대규모의 복원을 반복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경복궁은 큰 건물의 부속 건물인 행각이나 건물을 잇는 행랑을 제외한 단독 건물만도 150여 채가 넘고 방의 수에 있어서도 7,481개를 갖춘 방대한 규모의 궁궐이다. (03:21)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조선 시대에 궁과 궁 밖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03:37)근정문은 현존하는 조선 왕궁의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있는 건물이다. (03:52)근정문의 좌우로 만들어진 일화문은 문관들의 출입 장소로, 월화문은 무관들의 출입 장소로 이용됐다. (04:09)근정전은 문무백관들과의 각종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우람한 자태와 처마 곡선의 조화가 뛰어난 아름다움을 갖춘 건축물이다. (04:37)고급스럽게 장식된 천장의 문양과 여의주를 다루는 두 마리의 흑룡으로 장식된 우물천장은 임금의 위엄을 과시하듯 장엄한 모습이다. (04:55)근정전 뒤로는 사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왕으로 상징되던 당시의 궁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05:13)사정전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천추전과 수정전이 위치해있다. (05:25)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큰 규모의 누각인 경회루는 연못 뒤에 놓여진 건물로 잔치도 하고 뱃놀이도 즐기며 외교사절을 영접하던 장소다. (05:44)용 모양의 조각을 한 48개의 돌기둥과 동물상이 조각된 3개의 다리에서 당시의 궁궐 생활상을 볼 수 있다. (05:59)식수로 쓰이던 열상 진원의 샘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향원정. 연꽃과 수초가 자라는 연못과 함께 연못 중앙에 놓여진 향원정이 안정된 몸놀림으로 자리하고 있다. 오색단청의 정자와 조선 시대 연못에 놓인 나무다리 중에서 가장 긴 다리인 취향교가 한 폭의 그림 같다. (06:30)자경전은 겨울철에 낮 시간에 거처하는 건물로, 경복궁에 남아있는 유일한 침전 건물이다. (06:54)자경전의 난방을 위해 만들어진 굴뚝에는 해, 산, 학, 거북 등 십장생을 박아 넣어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07:19)자경전의 서쪽 꽃담은 조선 시대의 높은 예술적 수준을 가늠케 한다. (07:34)집옥재는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던 곳이며 그 부속 건물로 협길당과 팔우정이 있다. (07:53)육상궁을 비롯한 칠궁은 한국 정원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정비 소생이 아닌 임금이 그의 모친을 모신 사당이다. (08:21)일제시대에 전국에서 수탈한 문화유산들을 경복궁 내에 설치함으로써 경복궁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08:36)구 조선 총독부 건물은 대표적인 훼손의 예로 일제는 원래의 시설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조선 총독부를 지어 민족정기의 맥을 끊으려 했다. (08:59)정부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변형된 경복궁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지난 90년부터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09:15)경복궁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주춧돌만 남아있던 만춘전이 복원됐다. (09:31)경복궁 복원 공사에서 목 작업을 책임진 대목수 신응수 씨. 수목 중의 수목인 춘양목을 찾아 태백산 자락을 누비는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다. (10:10)대목수 신응수 씨는 혹시라도 부정을 타면 나라 전체에 액운이 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치성을 들인다. (10:33)이렇듯 정성을 들여 나무를 베고 작업장으로 옮겨진 목재들은 용도에 따라 신응수 씨와 목수들의 정성 어린 손놀림으로 다듬어진다. (11:01)대목수 신응수 씨는 우리 재래의 연장으로 서까래를 다듬고 마름질을 끝내는데, 이것은 조선의 연장에서 조선 장인의 정신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11:25)반석 위에 기둥이 서고 그 끝을 상창방으로 잇는다. 고건축에는 못을 거의 쓰지 않는데 이렇게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 맞추며 집을 짓기 때문에 건축이 견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11:52)상창방 작업이 끝나면 종도리를 올린다. 종도리는 건물의 맨 위에 올려지는 것으로 이 작업을 할 때는 전 목수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된다. (12:08)춘연은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12:19)도리와 도리 사이에는 서까래가 오른다. 서까래 작업에서는 조선 건축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연정이라는 못이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12:39)서까래 사이에 틈을 메우는 작업이 개판 작업이다. (12:47)훌륭한 집을 짓겠다는 신응수 씨의 욕심은 한이 없다. 그의 눈매에서 우리는 곧 모습을 드러낼 새 건축물을 그려볼 수 있다. (13:13)목공소가 끝난 지붕에 기와를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올린다. (13:27)기와 작업은 어느 부분 하나라도 통일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여 조선 건축의 미를 되살린다. (14:05)단청은 예부터 건물과 물건들을 엄숙하게 꾸며서 일반 잡귀와 구분하기 위한 의장 활동이다. 단청은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는 역할과 동시에 나무의 부식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14:38)경복궁 복원 공사에 단청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만봉 이치호 옹이다. 만봉 스님은 6세에 출가하여 화업에 입문하게 되었고, 18세에 금어(金漁)의 칭호를 받았다. 금강산을 비롯한 북한 지역의 사찰 단청과 전국의 많은 명당과 사당들이 그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15:16)경복궁 복원에 힘쓰는 만봉 스님과 단청을 입히는 수제자의 얼굴에서 큰일을 정성껏 해내려는 장인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15:41)궁궐의 복원은 단시일 안에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다. 궁궐 건축의 중요성에 비추어, 정밀한 발굴 복원이 필요하다. (16:00)이러한 노력으로 경복궁은 본래의 모습들을 찾아갈 것이다. (16:25)우리 민족 문화의 상층부를 주도해온 주역들의 영역이 얽혀있는 의미로운 장소로 궁궐은 앞으로도 잘 보존되고 소중하게 남겨져야 할 유산이다. 경복궁 복원은 조선 정궁의 위엄을 되살리고 수치스러운 역사의 잔재를 털어내는 숭고한 민족적 과제이다. 왕궁의 제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 고건축의 아름다움과 함께 상처받은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