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8
김상연
국립영상제작소
CEN0005459
10분 34초
(00:29)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꿈의 산실 영화.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은 오늘 영화는 과거 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영상으로 우리 곁을 찾아왔습니다. (00:47)최첨단 대규모 멀티 영화 시대를 맞아 우리 영화와 함께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문화 영화 48년. (00:59)영화가 가장 큰 볼거리였던 시절, 하루에 만 명이 모인 때가 있었는데 1958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무료로 상영한 뉴스와 문화 영화의 상영일이면 명동 시공간은 언제나 발 딛을 틈이 없었습니다. (01:17)당시 국립 영화 제작소는 35밀리미터(mm) 필름으로 국내 소식은 물론 해외 소식까지 포함한 대한 뉴스와 문화 영화를 제작, 배포하면서 우리나라 영상 매체의 선도적 역할을 다해왔습니다. (01:33)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감격과 48년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기록했고 6.25 한국전쟁 때는 피난지 부산에서 대한 뉴스를 제작하면서 첫 문화 영화, ‘명령만 내리면’을 제작해, 우리의 국방력을 소개했습니다. (01:57)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미래를 다짐할 즈음, 서울의 교통이 재정비되고 국산 차 1호 시발이 생산된 그 무렵 문화 영화는 품질 관리, 댐 건설 등을 제작, 활발한 우리 생산지 현장을 소개했습니다. (02:13)장안의 화제가 된 첫 번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린 1957년 우리나라 고전 무용계의 큰 별 ‘김백봉 여사 무용단’이란 문화 영화를 제작, 우리 춤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습니다. (02:25)그리고 우리 민요와 고전 무용, 만담으로 엮어진 ‘내 강산 좋을시고’를 제작해 당시 생활에 지친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었습니다. 남자 : 그러고 보니까 참 오래간만입니다. 오래간만입니다. 여자 : 그런데 웬 인사를 자꾸만 하세요? (02:37)그 무렵 사람들은 도봉산 계곡이나 한강을 찾아 더위를 식혔는데 1959년 추석날 덮친 태풍 사라호를 보도해 당시 수재민을 구하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그 이듬해 젊은 사람들이 피 흘려 이룩한 4.19 혁명이 일어났는데 당시 국립영화제작소는 생생한 상황을 영상 실록으로 남겼습니다. (03:01)그해 6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문화 영화로 제작했는데 1962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대단위 공업 단지가 건설되면서 당시 우리 사회의 재건 분위기를 담은 ‘조국은 새롭다’와 ‘우리 마을의 자랑’ 그리고 ‘새 나라 새 강산에 일하러 가자’라는 국토 건설의 노래 등 문화 영화를 제작, 우리의 발전상을 기록했습니다. (03:27)발전하는 산업은 해외 수출로 이어졌고 당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섬유 산업의 발전상을 ‘섬유와 우리 생활’로 제작, 배포했습니다. 도시와 달리 농촌은 더딘 변화를 보였는데 정겨운 장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던 60년대 초, ‘장날 풍경’이란 문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03:50)우리 생활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치렁치렁한 한복 대신 간편한 짧은 치마 입기 운동이 벌어졌고 (04:00)(노래)팔도강산 팔도강산 좋을시고 딸 찾아 백리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아들 찾아 천리길 에헤야 데헤야 우리강산 얼시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살림 절시구 잘 살고 못 사는게 팔자만은 아니더라 잘 살고 못 사는게 마음먹기 달렸더라 줄줄이 팔도강산 좋구나 좋다 팔도강산 좋을시고 천리길이 하루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새나라를 이루네 에헤야 데헤야 우리강산 얼시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살림 절시구 잘 살고 못 사는게 팔자만은 아니더라 잘 살고 못 사는게 마음먹기 달렸더라 내일의 팔도강산 좋구나 좋다 (04:07)경제 개발에 한창이던 1967년 국립영화제작소는 극 영화 ‘팔도강산’을 제작했는데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총 출연해 한화 사상 최초로 3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 팔도강산 붐을 일으켰습니다. (04:23) 남자1 : 제가 아무리 못 살아두요. 남자2 : 야, 술맛 참 좋다. 여보, 이 강원도는 물맛이 좋아서 그런지 술맛이 꿀맛이구려. (04:34)65년 시작된 월남 파병, 이국 땅에서 대한남아의 기상을 떨친 우리 국군의 모습을 문화 영화로 제작해 국내의 월남 현지의 상황을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04:48)1968년 서울의 심장을 강타한 1.21사태. 후에, 그해 4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문화 영화를 통해 자주 국방, 향토 방위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05:00)1979년 우리 산업의 대동맥 고속도로가 서울, 인천 구간에 이어 서울, 부산 간에 속속 건설되면서 뻗어가는 우리 경제에 디딤돌 역할을 했습니다. (05:13)(노래)새마을 노래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05:14)1970년대가 밝아오고 ‘새마을 운동 농촌 주택’을 제작, 문화 영화는 새마을 운동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05:24)한편 오대양을 뻗어나간 우리 수산업의 발전상을 원양업, 북양업 등의 문화 영화로 제작했고 중동 건설 현장의 모습을 국내에 홍보했습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은 77년 100억 달러 수출의 위업을 달성했고 100억 불 수출의 발자취를 통해 그간의 성과를 기록했습니다. (05:50)70년대의 대표적인 문화,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경범죄 단속이라는 새로운 풍속들을 낳았고, 74년 8월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를 맞았습니다. 그 무렵 전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갔고 저축, 절약, 불우이웃 돕기 등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06:13)늘어나는 인구 억제 정책으로 가족 계획 운동이 널리 보급되고 ‘지구는 만원이다’ 등으로 한 가정 두 자녀 낳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06:26)우리나라 지도를 바꾼 삽교천 방조제가 건설되고 박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한 1979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국토방위 이상 없다’ 라는 문화 영화를 통해 굳건한 방위 태세를 국민들에게 알렸습니다. (06:42)1980년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했습니다. 한편 나날이 발전해가는 우리 산업은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낳았는데 80년대 심각해지는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환경 오염의 실태와 그 대책을 다룬 문화 영화들을 제작,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07:04)(노래)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07:04)피맺힌 사연을 간직한 분단의 아픔, 이산가족 상봉을 기록했습니다. 여자 : 아무도 원한 적 없어, 오빠! 엄마! (07:17)(노래)손에 손잡고 (07:17)1988년에는 동서와 남북을 이어준 일류 평화의 대전 제24회 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벽을 넘어서’라는 극장 홍보 영화를 제작, 상영해 올림픽의 영광을 되새기려 했으며 2시간 5분짜리 서울 올림픽 공식 기록 영화를 제작, IOC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영광은 4년 뒤 바르셀로나로 이어져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내 세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습니다. (07:54)1991년 마침내 남북한이 나란히 UN에 가입했고 1970년대 이래 남북 관계를 담은 남북 적십자 회담, 남북 조절 위원장 회의, 남북 고위급 회담 등을 필름으로 기록했습니다. (08:12)또한 해외에 우리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 영화를 제작해 보내주면서 93년 경제 과학 기술 올림픽인 대전 엑스포를, 95년에는 문화 예술 대향연 광주 비엔날레를 제작했습니다. (08:29)자동차 천만 시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이름이 바뀐 국립영상제작소는 문화 영화로 올바른 교통 문화 정착과 공중 질서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08:43)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지난 50년 우리 삶의 발자취를 담은 ‘시련과 영광’을 제작, 영상 실록으로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08:57)1996년, 2002년 월드컵 개최라는 기쁜 소식이 전 국민을 열광시킬 무렵 우리는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됐습니다. (09:08)바닥난 외환고는 우리 경제를 80년대로 되돌려 놨는데 문화 영화는 ‘위기를 기회로’, ‘IMF는 지금부터’ 등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작품을 내놨습니다. (09:22)지난 48년 간 우리 것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국립영상제작소는 우리 소리, 판소리의 득음 과정을 담은 문화 영화 ‘판소리’와 독 짓는 오부자의 장인 정신을 문화 영화로 제작,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삶의 진솔한 모습을 담아온 2,700여 편의 문화 영화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크고 작은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09:49)1995년 케이블 TV 방송과 함께 문화 영화를 제작해온 국립영상제작소는 48년간의 문화 영화를 후세에 남길 귀중한 영상 실록으로 철저히 보존, 관리하고 있습니다. 매달 한 편씩 극장에서 소개해오던 문화 영화가 이번 6월 30일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의 격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국립영상제작소는 국민과 정부를 이어주는 케이블 TV 채널 14 K-TV와 함께 수준 높은 문화 영화 제작과 국가 영상 기록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